22화
“손상이요?”
“부수는 건 너희한테 난도가 너무 높아. 그러니 손상이다. 찌그러뜨리거나, 금이라도 가게 해도 합격으로 쳐주지.”
“…….”
칼자크가 우리 표정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왜? 너무 쉬울 것 같냐? 그럼 바로 시도해 보든가.”
그러자 아르잔이 동의를 구하듯 나를 보았는데,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묘하게 의욕이 느껴졌다.
이 녀석도 반년을 여기 처박혀 있기는 싫은가 보다.
“해봐.”
“…실례하겠습니다.”
아르잔이 바닥에 비늘을 내려놓은 뒤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저 비수는 대체 어디서 계속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
아르잔은 비늘을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처럼 노려보다가, 비수를 양손으로 감싼 채 내리찍었다.
깡!
무슨 강철을 후려친 듯한 소리가 났다.
아르잔은 하마터면 비수를 놓칠 뻔한 것처럼 보였다.
조금만 휘두르는 자세가 어설펐다면 손목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이건…….”
칼자크가 튕겨 날아간 비늘을 보며 말했다.
“말해 두는데 실제 놈의 비늘은 이것보다 훨씬 단단해. 그건 그 뱀 새끼 몸에서 떨어져 나간 지 좀 된 거니까.”
“…….”
“그런데 고작 보석수의 비늘 하나 못 부수는 놈들이, 뭐? 사흘? 망상이 심하군.”
아르잔이 입을 닫았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어쩐지 시무룩한 얼굴이다.
약간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는 게, 리벤지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주제를 알았으면 이제…….”
그사이 나는 비늘을 주우며 말했다.
“이걸 부수면 되는 겁니까?”
“…내 말 제대로 들은 거냐?”
“들었지요.”
나는 물끄러미 비늘을 내려다봤다.
가만히 쥐고 있자니 손이 조금 차가워졌다.
비늘 자체가 음기를 띠고 있어서 그렇다.
칼자크의 말대로, 떨어져 나간 지 제법 됐는데도 이 정도 냉기를 방출할 정도라면… 본체와 싸울 때는 아예 눈발에서 싸우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이래서 오셀 놈이 그런 비수를 준비했던 거군.’
그렇다면…….
어쩌면 이곳에서, 공략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칼자크가 아닌 나일 수도 있겠다.
“그래. 한번 해봐라. 무기는 뭘 쓸 거냐? 내 검이라도 빌려줄까.”
“괜찮습니다.”
나는 비늘을 동전처럼 튕겼다 받기를 반복했다.
칼자크는 팔짱을 낀 채-팔 한쪽으로 그러고 있자니 상당히 재밌는 모습이 되었다.- 나를 지켜보았고.
대략 그 동작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한 다음, 비늘을 높게 던졌다.
피잉-.
비늘이 공중을 부유하는 동안 자세를 잡았다.
매만지면서 감촉을 확실히 각인시켰고.
덕분에 강도도 어느 정도 알겠다.
자연스레 내 머리는 저 비늘에, 보석수에, 사파이어 스네이크에 가장 효과적인 초식을 찾았다.
부유하는 비늘이 내 눈높이까지 떨어졌을 때, 나는 육체 내부의 화기를 주먹에 응집했다.
백일식白日式 제육초식第六招式.
낙화落火.
콰자작!
얼음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늘이 사방으로 튀었다.
후폭풍이 요란했으나, 다행히 이곳에 있는 둘은 충분한 강자였다.
이들은 조각난 비늘을 어렵지 않게 막거나 피했다.
“실례.”
“…….”
“…….”
내 사과에도 침묵은 당장 깨지지 않았고.
칼자크와 아르잔이 비슷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다.
어울리는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꼭 탭댄스를 추는 개새끼를 목격한 듯한 표정이다.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난 이 둘이 놀랄 걸 예상해서 잠깐 기다려 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칼자크였다.
이자는 왠지 모르게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나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방금 그거, 형型이 존재하는 무술이군.”
“맞아요.”
“누구한테 배웠지?”
“혼자 만들었는데요.”
그러자 칼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헛소리. 방금 네 움직임에 담긴 정수는 고작 몇 년 분이 아니었어. 평생 무武에 이바지한 달인에게서나 느껴지는 중후함이 담겨 있었단 말이다.”
역시 도검선생이다.
안목만큼은 케이안조차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게 내 사정이라서, 일단은 우겼다.
“진짜 제가 만들었다니까요. 참고한 서적이 많기는 했지만.”
“…….”
칼자크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으나, 그것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사실 나로선 켕길 것도 없다.
내가 만들었다는 게 아예 틀린 말도 아닐뿐더러, 나중에라도 내 과거를 파헤쳐도 뭐가 나오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 그래도 델락의 아들놈이라면…….”
긴가민가하던 칼자크가 끙끙 앓으며 고민에 잠기더니,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애송이.”
“예?”
어쩐지 눈빛이 부담스럽다.
설마 납득하지 못한다고 우기는 건 아니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칼자크는 전혀 엉뚱한 말을 꺼냈다.
“너, 내 제자가 돼라.”
“……!”
아르잔이 놀랐다.
“어, 싫어요.”
“……!?”
아르잔이 더 놀랐다.
* * *
배드니커의 가주-철혈공이 혈연에 지닌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확히 말하면 피붙이, 즉 자식을 향한 집착이긴 한데.
- 가능성이란, 피血에 잠재되어 있다.
위와 같은 발언이 철혈공을 상징하는 말로써 전 제국에서도 회자가 될 정도니 말 다했다.
누구보다 자식의 육성에 진심이고, 싹수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문자 그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온갖 귀한 영약, 비약을 밥 대신 먹고, 가문에 보관된 명검을 하사받는다.
성장이라는 명목 아래, 일국의 왕족만큼이나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철혈공이 아무리 자식을 귀하게 여겨도, 도무지 신경 써 줄 수 없는 요소가 하나 있다.
가르침.
철혈공의 실력은 제국 최강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
당연히 자식들은 아비를 누구보다 숭상하며, 그에게 단 한마디의 조언이라도 받길 간절히 바란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철혈공은 배드니커의 가주임과 동시에 제국 제일가는 악마 사냥꾼이며, 황실의 검, 그리고 [위대한 가문]의 집행자이기도 하다.
그가 맡은 최소한의 업무만 쳐도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니, 아무리 소중한 자식들이라도 훈련을 봐줄 시간은 없다.
그래서 철혈공은 직접 제국을 떠돌았다.
자신을 대신해 자식을 가르칠 자들을 직접 초빙하기 위해서.
배드니커의 대사범이란 직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총 열 명으로 구성된 대사범들은 각각 분야가 다르다.
검, 창, 도끼, 활과 같은 무기의 달인부터 해서 예절이나 교양, 역사를 가르치는 학자, 심지어는 신학神學, 정령학, 마도학의 전문가도 있다.
그 철혈공이 제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직접 엄선한, 이른바 각 분야 최고의 인재들인 것이다.
그리고 칼자크는 알고 있다.
철혈공의 자식들이 대사범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게 도검선생-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당연하다.
가주인 철혈공의 무기조차 검이다.
대부분 가주를 동경하는 자식들의 관심이 검의 달인에게 쏠리는 건 당연한 일.
그래서 칼자크는 이 상황이 더 어이가 없다.
‘이거 뭐 하는 새끼야.’
방금 이 애송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 어, 싫어요.
분명히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아직 귀가 먹지는 않았으니 잘못 들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칼자크는 즉시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말이 헛 나온 거냐? 그럴 수 있지. 특별히 다시 한번 말해 주마, 꼬마야. 이 도검선생 칼자크의 제자가-.”
“싫습니다.”
“…….”
칼자크의 입이 툭 벌어졌다.
* * *
칼자크의 멍한 표정을 보면서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잠시 후 퍼뜩 정신을 차린 칼자크가 말했다.
“너… 이게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지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뭐 내가 거짓말이라도 치는 것 같아? 아하. 이제 알겠다. 나중에 내가 없던 일로 할까 봐 그렇지? 야, 나 그렇게 비열한 새끼 아니야. 한번 꺼낸 말은 안 무른다고.”
“그래요?”
“그래!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하고…-.”
“괜찮습니다.”
“…허, 허허.”
칼자크가 실성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목표물을 바꿨는지 아르잔을 보았다.
“야, 네 도련님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집사 된 도리로 뭐 할 말 없냐?”
“…….”
아르잔이 잠깐 생각하더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이건 대단히 귀중한 기회입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도검선생과 사제의 연을 맺는 건 단순히 그에게 무학을 전수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사범에게 인정받는다면 원로회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고, 얼마 안 가 가주님의 귀에도 이 소식이 분명 닿게 될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도련님의 좋지 않은 인식을 바꿀 첫 발자국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너무 정치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아무튼 좋았다.”
칼자크가 아르잔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수염을 쇄골까지 기른 아저씨가 저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니 기분이 참 별로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아르잔이 말하는 바는 물론 안다.
당장 방금 설명한 것 이외에도, 칼자크를 스승으로 삼으면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래도 됐어.”
내가 멍청해서 이 제안을 계속 거절하는 건 아니다.
사실 거절한 직후엔, 나 자신도 왜 이리 단호한 태도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이유는 단순했다.
아마도 나는, 천하제일인 백노광 이외의 누구도 스승으로 모시고 싶지 않나 보다.
“아니, 그래도-.”
“제자 얘기는 이쯤 하고요. 비늘을 부쉈으니 이제 제 말에 따라 주시는 거죠?”
“…….”
칼자크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애송이 넌 그렇다 치고 아르잔은 결국 못 부쉈잖아.”
“이 녀석은 힘을 숨기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 건에 관해선 아마 나보다 칼자크가 더 잘 알 수도 있다.
아까 일어나기 직전 이것과 관련된 얘기를 나눴을 테니.
예상대로 칼자크가 끙끙대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델락 아들놈한테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지. 죽어도 난 모른다.”
“안 죽을 겁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함께 나가시죠, 선배님.”
* * *
사흘 뒤는 내가 여러 관점에서 생각하고 선택한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단순히 일행의 컨디션만이 아니라 현재 남은 식량과 정보 공유, 그 이후 아슬아슬하게 본가까지 복귀할 것까지 고려한 타이밍.
“눈 돌아가게 맛있구만. 더 없냐?”
“어허. 아껴 먹어야 해요.”
칼자크는 육포 사냥꾼이 됐다.
여기서 뭐 먹으면서 버텼나 싶더니, 틈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이나 이끼, 그리고 간혹 동굴의 박쥐를 잡아먹었단다.
딱딱한 육포를 진수성찬으로 느낄 식생활이기는 했다.
짤막한 식사가 끝난 다음엔 칼자크에게서 보석수- 사파이어 스네이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보석수란 놈들 사이에도 급이 있는 건 알고 있나?”
“예. 가주님이 토벌한 건 그중에서도 중하급에 속하는 놈들이었다고.”
칼자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리고 사파이어 스네이크는 명백하게 상급이야. 덩치만 봐도 감이 오겠지만.”
칼자크는 날카로운 돌로 벽면에 직직, 뱀 그림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체격. 전투에 있어서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달팽이도 저만큼 크면 재앙일 텐데, 심지어 저놈은 뱀이라고. 덩치에 안 맞게 교활하기까지 한 놈.”
“음.”
“정면 대결은 미친 짓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저놈을 관찰했고, 지지난번 싸움에서…….”
칼자크의 뱀 그림은 생각보다 훌륭했는데, 왼손으로도 잘도 그렸다.
애초부터 왼손잡이였을 수도 있겠다.
“…놈의 약점을 찾았다.”
콱!
칼자크가 돌조각으로 뱀 그림의 어느 지점을 찔렀다.
“그놈의 턱 아래에 반대로 뒤집힌 비늘이 있다. 이게 바로 놈의 약점이지.”
뒤집힌 비늘.
나는 영산에서 잡은 적 있는 이무기 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역린.”
“뭐라 말했냐?”
“아뇨.”
칼자크는 습관적으로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보았다.
“정신없이 싸우던 도중에 저 비늘을 툭 건드렸는데, X알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지랄 발광을 하더라.”
갑자기 아르잔이 주먹을 꾹 쥐었다.
저런 농담을 좋아하는구나. 좀 깬다.
“좀 더 깊숙이 찔렀다면 치명상이었을 거다.”
“저걸 찔렀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확실히 전투가 수월해지겠군요.”
“맞아. 내 작전은 놈이 잠을 잘 때 몰래 접근한 다음, 급소에 한 방 먹이고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덧붙인다.
“사실 여기 머물 동안 몇 번이고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데엔 재능이 없어서 말이지.”
나도 마찬가지다.
기척을 숨긴 채 움직이는 건 내 특기가 아니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아르잔에게 향했다.
이 녀석에 대해선 나보다 더 잘 알 칼자크도 시선을 같이했다.
아르잔은 금방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말했다.
“그 임무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냐?”
“예.”
“좋아.”
이후로도 칼자크는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알려 줬다.
내 말에 억지로 따르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열정적인 설명을 들으니 기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나 아르잔보다 보석수 사냥에 훨씬 진심인 게 칼자크였다.
그렇게 설명이 끝나고, 간단하게 몸도 풀면서 운공하고, 수련하고, 먹고, 자고, 아르잔과 얘기도 나눴다.
물론 귀찮은 일도 있었다.
“야, 너 진짜 내 제자 안 할래?”
“…….”
내가 수련하는 걸 본 칼자크가 다시 질척대기 시작한 것이다.
첫날에 거절한 이후로는 나름 예의를 차리며 사양했는데, 숨 쉬듯이 칭얼대니 내 인내심도 슬슬 바닥났다.
“일없으니까 좀 가십쇼. 훈련 좀 합시다.”
잡상인 내쫓듯 보내면 칼자크는 “싸가지 없는 새끼! 너 잘났다!” 하고 물러났고.
잠시 후에 다시 와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실 칼자크를 쫓는 게 훈련보다 더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좌충우돌 우당탕탕 사흘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준비됐냐?”
“네.”
“갑시다.”
“좋아.”
우드득.
칼자크가 목 관절을 풀며 중얼거렸다.
“…다 끝나면, 뱀 고기나 먹어 볼까.”
마침내 뱀 사냥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