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사람이 많이 지치면 헛것이 보일 때가 있다. 이건 내가 경험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인데.
지금은 헛것이 아니라 헛소리가 들리는 상황.
“…무신?”
[그렇다. 연자여.]
무신.
신神…….
무슨 말인지 짚이는 게 없지는 않다.
칼자크가 발견했던 역세모 문양.
동굴 어딘가에 있다던, 잊힌 신의 제단.
‘설마…….’
방금 전투로 잊힌 신이 깨어난 건가?
[놀랐는가? 그러나 연자여, 이 무신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네. 이 영광스러운 제안 또한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란 뜻이지. 자. 어서 내가 있는 제단으로 오시게.]
시끄러워 죽겠네.
간만에 무리해서 그런지 지끈지끈 골이 땡긴다.
무신인지, 문신인지. 일단은 좀 닥쳐 줬으면 하는 심정.
[흠. 그대는 이 인연이 기껍지 아니한가 보군. 그런가. 그대는 나의 연자가 아니었는가…….]
모르겠고, 일단은 좀 자고 좀 있다가-.
[그럼 다른 신도를 찾아봐야겠군. 마침 뛰어난 무인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듯하니.]
“…뭐?”
나는 그 말에 감기려던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줬다.
무인이 여기로 오고 있다?
칼자크나 아르잔을 말하는 건 아닐 거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 둘은 사파이어 스네이크가 분출한 냉기에, 아직도 꽁꽁 얼어 있는 상태일 테니까.
[동굴 반대쪽에서 누군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구나. 흐음. 신神의 가호 또한 느껴지는군.]
신의 가호.
이 존재는 그리 말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오고 있는 게 위대한 가문의 후예는 아닐 거다.
전에 말했다시피 잊힌 신은 선악의 개념이 모호한 존재다.
무슨 말이냐면, 이자들은 72신의 축복만이 아닌 앙신의 저주조차 가호로 여긴다는 뜻.
즉 현재 이곳을 향하고 있는 건 하덴아이하르의 하수인이며, 그놈이 이 잊힌 신의 신도가 된다면…….
최악의 경우 마왕이 한 명 더 늘 수도 있다.
‘아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며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 * *
내가 향한 곳은 보석수의 알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였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와의 격전 속에서 드러난 그 공간 말이다.
자박-.
고약한 냄새.
오래된 알 껍질을 밟으며 전진한다.
캄캄한 어둠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니 갈림길이 연속해서 나왔는데.
[오른쪽일세.]
[여기선 왼쪽.]
[이제 직진일세.]
자칭 무신이라는 자의 안내에 따라 쉽게 나아갈 수 있었다.
몇 개나 되는 갈림길을 지났을까.
잠시 후 대단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건물 수십 채쯤은 우습게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천장은 사파이어 스네이크를 직선으로 세워도 될 만큼 높았다.
그런 넓고 아득한 장소에, 홀연히 세워진 건축물이 있었다.
“…….”
거꾸로 세워진 탑.
역천逆天을 상징하는 잊힌 신의 유적.
긴 세월 동안 풍파를 피할 수는 없었는지, 탑 자체는 허름하고 손상된 곳이 많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순간적으로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볼품없다기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이랄까.
[연자여, 이리로.]
무신의 말에 걸음을 재촉했다.
탑의 앞에는 단출한 제단이 있었다.
“…이건 거꾸로 안 만들었네.”
[당연한 말을. 제단을 거꾸로 만들면 제물을 올릴 수 없잖은가.]
“제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신이시여, 저는 잊힌 신에 대해선 깊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의 첫 번째 신도가 되면 구체적으로 무슨 득이 있습니까.”
[허어. 어찌 신앙의 가치를 득실로 판단하는가? 이 무신의 신도가 되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영광스러운 일이거늘.]
“신의 기준은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세속의 존재가 세속의 가치를 탐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음…….]
무신이 침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래. 신과 인간의 관점은 다른 법이지.]
잠깐 고민하던 무신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그렇다면… 그대가 신도가 된다면, 본인이 익힌 최강의 무술을 전수해 주지!]
“그건 딱히 필요 없는데요.”
무신은 내 즉각적인 대답에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필요 없다니? 어째서인가.]
“저는 이미 익히고 있는 무술이 있습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네. 연자는 아직 나이도 어린 듯하니, 무술을 새로 익힌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것이야.]
“당분간 새 무술을 익힐 생각은 없는데요…….”
[어째서?]
“그야 제가 익히고 있는 무술이 최강이니까요.”
[…….]
무신이 잠깐 할 말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연자여, 그대는 무인으로서 아직 미숙해서 모르는 듯하지만, 무도를 걷는 이라면 최강이라는 말은 그리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네.]
“무신께서는 막 말했잖아요.”
[나는 무신이야. 무武의 신神씩이나 되는 존재가, 스스로 창안한 무술이 최강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지 않은가?]
맞는 말이긴 하네.
[답답하군. 연자는 이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고 있어.]
어째 반응이 생각보다 인간적인 신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말투나 기도에서 초월적인 헌앙함과 원숙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무신이라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이 무신과 몇 가지 문답해 보고 싶어졌다.
“무신이시여, 무릇 저를 가르친 스승께서 이르시길,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무술엔 고하高下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익히는 자의 역량, 또한 사용자와 무술 간의 적성이 얼마나 잘 맞느냐가 중요하다고요.”
[틀린 말은 아니로군.]
“제 스승의 말씀에 동의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본인의 무공을 최강이라 칭하신 겁니까.”
본인本人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아니지만, 마땅한 지칭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신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연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군. 나름대로 개인의 무학에 대한 단서도 잡은 듯하고. 경지를 떠나서, 그 나이에 이루기 힘든 성과인데…….]
“…….”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겠네. 우선 일정한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모두 최강最强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네.]
나는 살짝 눈을 깜박였다.
오랜만에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라서 그렇다.
[어떤 이에겐 최강이 단순히 무적을 의미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겐 무패일 수도 있지. 또 어떤 이는 단순히 살아남는 걸 최강으로 여길 수도 있네. 각기 어떤 삶을 겪었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이야.]
무신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무적無敵과 무패無敗는 비슷한 말인 듯하지만, 사실 그 차이가 명백하다.
아예 적수가 없는 것과 직접 싸워서 승리만 따내는 건 다른 일이니.
그리고 패배하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최후에 살아남는 걸 승리로 치는 건… 글쎄다.
내 관점으로는 인간보다 짐승의 겨루기에 가깝지 않나 싶다.
[내 무공이 최강인 이유는 단순하네. 그 누구라도, 동일한 조건에서, 균등한 시간을 투자해서 익힌다면, 나의 무술을 익힌 자가 최강에 다다를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야.]
“그건 증명된 겁니까?”
[그렇다네. 아주 오래전… 그대들은 잊은 시대에, 무수히도 증명되었지.]
무신의 목소리에 잠시 아련함이 맴돌았다.
[…그나저나 궁금하군. 연자를 가르친 자는 상당한 고수인 듯한데, 그자는 자신의 무술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던가?]
“하늘 아래는 물론이고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것을 뛰어넘을 무술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백일식보단 고금제일공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이념은 결국 백노광의 것이 맞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무술이라……. 정말 오만한 자군.]
무신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럴 자격이 있어 보이네.]
“…….”
[연자에게서 들은 인상을 미루어 짐작하면, 아마도 그 스승은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을 걸세.]
- 만약 길거리 검술을 반쪽으로 익히더라도, 내가 최강이다.
순간적으로 목덜미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실제로 본 적도 없을 텐데, 이 무신이라는 자는 스승님의 성향을 정확히 꿰뚫었다.
[재미있군. 나도 비슷한 자를 한 명 알고 있긴 한데…….]
“…….”
[아무튼, 그런 생각의 소유자니 당연히 스스로 만든 무술, 혹은 운용법을 최강이라 여기는 게 당연할 터. 즉 연자에게 말한 ‘무술엔 고하가 없다’라는 말을 해석하면 이러하네.]
-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무술엔 고하가 없다. 내가 창안한 것을 제한다면.
“…음.”
나는 스승님의 인물됨을 이렇게 순식간에 파악한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직접 만난 적도, 본 적도 없고, 나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전해 들은 것만으로 말이다.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진실을 떠나서, 일단 예의를 갖출 만한 존재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그렇다고 의문이 전부 풀린 건 아니다.
“그러나 무신이시여, 말씀대로라면 무신님이 가르쳐 주신다는 무술 또한 최강이 아니라, 단순히 당신 스스로만 그렇게 여기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허허.]
무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크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무신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연자가 익혔다던 무술을 내게 보여 주게. 그럼 내가 해당 무술의 개선점을 말해 주지.]
“…….”
[그대의 스승을 모욕할 생각은 없으니 표정은 풀게.]
내 표정이 어떠하기에
난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을 뻔하다, 그게 더 못난 행동이란 생각이 들어 가까스로 참았다.
[듣고, 일리가 있다고 느껴지면 수용하면 될 일이야. 어떤가.]
“…음.”
살면서 이런 오만한 제안을 들을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세상에, 천하제일인 백노광의 무공에 첨삭을 하겠다니?
만약 앞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말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호기심이 들었다.
어쩌면, 이 무신이라는 존재가 스승님에게 버금가는 무武의 정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좋습니다.”
나는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 * *
검무를 펼치듯, 백일식을 처음부터 전개했다.
급히 펼칠 필요는 없으니까, 천천히.
무신이라는 존재가 이 무공의 핵심과 진결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
그 도중 문득 칼자크의 제안이 떠올랐다.
나를 제자로 삼고 싶다고 말했었지.
칼자크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자였다.
강하고, 정이 많고, 엄격해야 할 때를 구분하며, 그러면서 끈기까지 갖춘 사내다.
사회적인 명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르침에 적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종합하면 칼자크는 인간미를 갖춘 뛰어난 스승이었다.
만약 그가 본가에 쭉 머물렀다면, 회귀 전 나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괜히 떠올린 게 아닌 것.
하지만 나는 그런 칼자크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이상하게도 그를 사범이나 선생, 스승이라 부르고 싶지 않아서다.
사실 칼자크만이 아닌 누구라도 그렇다.
스으으-.
[…….]
스승과 함께 만든 무공, 백일식.
내게 백일식은 기억이다.
전반부인 제일초식부터 제십초식까지.
모든 초식의 기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모든 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많은 것을 배웠다.
단순히 무술만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잘못된 점, 고쳐야 할 점, 삶의 방향성,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리고 나 같은 놈에게도 장점이 있단 걸 알게 됐다.
그러니 나에게 백노광이란 존재는, 단순히 스승이란 단어로 퉁 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
백일식의 시연이 끝났다.
나는 살짝 숨을 헐떡이며 제단을 바라보았다.
몸 상태가 구려서 그런지, 단순히 시연만 했는데도 몸이 뜨겁다.
‘썩을…….’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겠네.
나는 조만간 부메랑처럼 돌아올 백화의 반동을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연자여, 방금 익힌 무술의 이름은 무엇인가.]
여태껏 쭉 침묵하던 무신이 말했다.
“백일식白日蝕입니다.”
[음.]
잠시 침묵하던 무신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자여, 긴말 않겠네. 백일식은 그만 익히도록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