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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26화 (26/172)

26화

사람이 많이 지치면 헛것이 보일 때가 있다. 이건 내가 경험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인데.

지금은 헛것이 아니라 헛소리가 들리는 상황.

“…무신?”

[그렇다. 연자여.]

무신.

신神…….

무슨 말인지 짚이는 게 없지는 않다.

칼자크가 발견했던 역세모 문양.

동굴 어딘가에 있다던, 잊힌 신의 제단.

‘설마…….’

방금 전투로 잊힌 신이 깨어난 건가?

[놀랐는가? 그러나 연자여, 이 무신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네. 이 영광스러운 제안 또한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란 뜻이지. 자. 어서 내가 있는 제단으로 오시게.]

시끄러워 죽겠네.

간만에 무리해서 그런지 지끈지끈 골이 땡긴다.

무신인지, 문신인지. 일단은 좀 닥쳐 줬으면 하는 심정.

[흠. 그대는 이 인연이 기껍지 아니한가 보군. 그런가. 그대는 나의 연자가 아니었는가…….]

모르겠고, 일단은 좀 자고 좀 있다가-.

[그럼 다른 신도를 찾아봐야겠군. 마침 뛰어난 무인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듯하니.]

“…뭐?”

나는 그 말에 감기려던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줬다.

무인이 여기로 오고 있다?

칼자크나 아르잔을 말하는 건 아닐 거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 둘은 사파이어 스네이크가 분출한 냉기에, 아직도 꽁꽁 얼어 있는 상태일 테니까.

[동굴 반대쪽에서 누군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구나. 흐음. 신神의 가호 또한 느껴지는군.]

신의 가호.

이 존재는 그리 말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오고 있는 게 위대한 가문의 후예는 아닐 거다.

전에 말했다시피 잊힌 신은 선악의 개념이 모호한 존재다.

무슨 말이냐면, 이자들은 72신의 축복만이 아닌 앙신의 저주조차 가호로 여긴다는 뜻.

즉 현재 이곳을 향하고 있는 건 하덴아이하르의 하수인이며, 그놈이 이 잊힌 신의 신도가 된다면…….

최악의 경우 마왕이 한 명 더 늘 수도 있다.

‘아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며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 * *

내가 향한 곳은 보석수의 알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였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와의 격전 속에서 드러난 그 공간 말이다.

자박-.

고약한 냄새.

오래된 알 껍질을 밟으며 전진한다.

캄캄한 어둠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니 갈림길이 연속해서 나왔는데.

[오른쪽일세.]

[여기선 왼쪽.]

[이제 직진일세.]

자칭 무신이라는 자의 안내에 따라 쉽게 나아갈 수 있었다.

몇 개나 되는 갈림길을 지났을까.

잠시 후 대단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건물 수십 채쯤은 우습게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천장은 사파이어 스네이크를 직선으로 세워도 될 만큼 높았다.

그런 넓고 아득한 장소에, 홀연히 세워진 건축물이 있었다.

“…….”

거꾸로 세워진 탑.

역천逆天을 상징하는 잊힌 신의 유적.

긴 세월 동안 풍파를 피할 수는 없었는지, 탑 자체는 허름하고 손상된 곳이 많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순간적으로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볼품없다기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이랄까.

[연자여, 이리로.]

무신의 말에 걸음을 재촉했다.

탑의 앞에는 단출한 제단이 있었다.

“…이건 거꾸로 안 만들었네.”

[당연한 말을. 제단을 거꾸로 만들면 제물을 올릴 수 없잖은가.]

“제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신이시여, 저는 잊힌 신에 대해선 깊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의 첫 번째 신도가 되면 구체적으로 무슨 득이 있습니까.”

[허어. 어찌 신앙의 가치를 득실로 판단하는가? 이 무신의 신도가 되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영광스러운 일이거늘.]

“신의 기준은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세속의 존재가 세속의 가치를 탐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음…….]

무신이 침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래. 신과 인간의 관점은 다른 법이지.]

잠깐 고민하던 무신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그렇다면… 그대가 신도가 된다면, 본인이 익힌 최강의 무술을 전수해 주지!]

“그건 딱히 필요 없는데요.”

무신은 내 즉각적인 대답에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필요 없다니? 어째서인가.]

“저는 이미 익히고 있는 무술이 있습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네. 연자는 아직 나이도 어린 듯하니, 무술을 새로 익힌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것이야.]

“당분간 새 무술을 익힐 생각은 없는데요…….”

[어째서?]

“그야 제가 익히고 있는 무술이 최강이니까요.”

[…….]

무신이 잠깐 할 말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연자여, 그대는 무인으로서 아직 미숙해서 모르는 듯하지만, 무도를 걷는 이라면 최강이라는 말은 그리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네.]

“무신께서는 막 말했잖아요.”

[나는 무신이야. 무武의 신神씩이나 되는 존재가, 스스로 창안한 무술이 최강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지 않은가?]

맞는 말이긴 하네.

[답답하군. 연자는 이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고 있어.]

어째 반응이 생각보다 인간적인 신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말투나 기도에서 초월적인 헌앙함과 원숙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무신이라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이 무신과 몇 가지 문답해 보고 싶어졌다.

“무신이시여, 무릇 저를 가르친 스승께서 이르시길,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무술엔 고하高下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익히는 자의 역량, 또한 사용자와 무술 간의 적성이 얼마나 잘 맞느냐가 중요하다고요.”

[틀린 말은 아니로군.]

“제 스승의 말씀에 동의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본인의 무공을 최강이라 칭하신 겁니까.”

본인本人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아니지만, 마땅한 지칭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신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연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군. 나름대로 개인의 무학에 대한 단서도 잡은 듯하고. 경지를 떠나서, 그 나이에 이루기 힘든 성과인데…….]

“…….”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겠네. 우선 일정한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모두 최강最强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네.]

나는 살짝 눈을 깜박였다.

오랜만에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라서 그렇다.

[어떤 이에겐 최강이 단순히 무적을 의미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겐 무패일 수도 있지. 또 어떤 이는 단순히 살아남는 걸 최강으로 여길 수도 있네. 각기 어떤 삶을 겪었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이야.]

무신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무적無敵과 무패無敗는 비슷한 말인 듯하지만, 사실 그 차이가 명백하다.

아예 적수가 없는 것과 직접 싸워서 승리만 따내는 건 다른 일이니.

그리고 패배하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최후에 살아남는 걸 승리로 치는 건… 글쎄다.

내 관점으로는 인간보다 짐승의 겨루기에 가깝지 않나 싶다.

[내 무공이 최강인 이유는 단순하네. 그 누구라도, 동일한 조건에서, 균등한 시간을 투자해서 익힌다면, 나의 무술을 익힌 자가 최강에 다다를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야.]

“그건 증명된 겁니까?”

[그렇다네. 아주 오래전… 그대들은 잊은 시대에, 무수히도 증명되었지.]

무신의 목소리에 잠시 아련함이 맴돌았다.

[…그나저나 궁금하군. 연자를 가르친 자는 상당한 고수인 듯한데, 그자는 자신의 무술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던가?]

“하늘 아래는 물론이고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것을 뛰어넘을 무술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백일식보단 고금제일공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이념은 결국 백노광의 것이 맞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무술이라……. 정말 오만한 자군.]

무신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럴 자격이 있어 보이네.]

“…….”

[연자에게서 들은 인상을 미루어 짐작하면, 아마도 그 스승은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을 걸세.]

- 만약 길거리 검술을 반쪽으로 익히더라도, 내가 최강이다.

순간적으로 목덜미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실제로 본 적도 없을 텐데, 이 무신이라는 자는 스승님의 성향을 정확히 꿰뚫었다.

[재미있군. 나도 비슷한 자를 한 명 알고 있긴 한데…….]

“…….”

[아무튼, 그런 생각의 소유자니 당연히 스스로 만든 무술, 혹은 운용법을 최강이라 여기는 게 당연할 터. 즉 연자에게 말한 ‘무술엔 고하가 없다’라는 말을 해석하면 이러하네.]

-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무술엔 고하가 없다. 내가 창안한 것을 제한다면.

“…음.”

나는 스승님의 인물됨을 이렇게 순식간에 파악한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직접 만난 적도, 본 적도 없고, 나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전해 들은 것만으로 말이다.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진실을 떠나서, 일단 예의를 갖출 만한 존재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그렇다고 의문이 전부 풀린 건 아니다.

“그러나 무신이시여, 말씀대로라면 무신님이 가르쳐 주신다는 무술 또한 최강이 아니라, 단순히 당신 스스로만 그렇게 여기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허허.]

무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크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무신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연자가 익혔다던 무술을 내게 보여 주게. 그럼 내가 해당 무술의 개선점을 말해 주지.]

“…….”

[그대의 스승을 모욕할 생각은 없으니 표정은 풀게.]

내 표정이 어떠하기에

난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을 뻔하다, 그게 더 못난 행동이란 생각이 들어 가까스로 참았다.

[듣고, 일리가 있다고 느껴지면 수용하면 될 일이야. 어떤가.]

“…음.”

살면서 이런 오만한 제안을 들을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세상에, 천하제일인 백노광의 무공에 첨삭을 하겠다니?

만약 앞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말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호기심이 들었다.

어쩌면, 이 무신이라는 존재가 스승님에게 버금가는 무武의 정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좋습니다.”

나는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 * *

검무를 펼치듯, 백일식을 처음부터 전개했다.

급히 펼칠 필요는 없으니까, 천천히.

무신이라는 존재가 이 무공의 핵심과 진결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

그 도중 문득 칼자크의 제안이 떠올랐다.

나를 제자로 삼고 싶다고 말했었지.

칼자크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자였다.

강하고, 정이 많고, 엄격해야 할 때를 구분하며, 그러면서 끈기까지 갖춘 사내다.

사회적인 명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르침에 적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종합하면 칼자크는 인간미를 갖춘 뛰어난 스승이었다.

만약 그가 본가에 쭉 머물렀다면, 회귀 전 나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괜히 떠올린 게 아닌 것.

하지만 나는 그런 칼자크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이상하게도 그를 사범이나 선생, 스승이라 부르고 싶지 않아서다.

사실 칼자크만이 아닌 누구라도 그렇다.

스으으-.

[…….]

스승과 함께 만든 무공, 백일식.

내게 백일식은 기억이다.

전반부인 제일초식부터 제십초식까지.

모든 초식의 기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모든 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많은 것을 배웠다.

단순히 무술만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잘못된 점, 고쳐야 할 점, 삶의 방향성,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리고 나 같은 놈에게도 장점이 있단 걸 알게 됐다.

그러니 나에게 백노광이란 존재는, 단순히 스승이란 단어로 퉁 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

백일식의 시연이 끝났다.

나는 살짝 숨을 헐떡이며 제단을 바라보았다.

몸 상태가 구려서 그런지, 단순히 시연만 했는데도 몸이 뜨겁다.

‘썩을…….’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겠네.

나는 조만간 부메랑처럼 돌아올 백화의 반동을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연자여, 방금 익힌 무술의 이름은 무엇인가.]

여태껏 쭉 침묵하던 무신이 말했다.

“백일식白日蝕입니다.”

[음.]

잠시 침묵하던 무신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자여, 긴말 않겠네. 백일식은 그만 익히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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