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거꾸로 세워진 탑을 오른다.
다행히 탑엔 입구가 있었고, 내부엔 계단도 있어서 벽면을 기어오르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겉모습은 내가 살면서 본 어떤 건축물보다도 특이한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내부는 무난했다.
겉에 비하면 그리 허름하지도 않았다.
먼지가 좀 많긴 했지만.
“이 탑은 언제 세워진 겁니까?”
[내가 죽기 전에 세워졌으니, 최소 2,000년은 됐겠지.]
“2,000년 전의 탑이 이렇게 멀쩡한 게 신기하네요.”
[본디 뛰어난 건축물의 자태란 반만년의 풍파에도 빛을 잃지 않네.]
“그럼 이 건축물의 수명은 이제 3,000년 남은 거군요.”
[말이 그렇단 걸세.]
탑의 높이는 상당해서 오르는 게 쉽지는 않았다.
평상시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
내공은 물론이고 진기까지 끌어다 썼으며, 백화 상태 이후로는 슬슬 몸뚱이 이곳저곳이 쑤시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 기절하고 싶다.
[힘내게, 연자여. 조금만 더 가면 돼.]
“그 말 벌써 다섯 번은 하신 것 같은데요…….”
[이번엔 진짜야. 보게.]
무신의 말에 고개를 드니, 어스름한 빛이 보였다.
천장에 뚫려 있는 구멍.
아마도 옥상으로 이어지는 그곳을 향해 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진짜네요.”
[내가 뭐 하러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박찼다.
이윽고 드러난 탑의 옥상, 혹은 꼭대기엔 자질구레한 장식물 없이 탁 트여 있었고.
거의 정중앙에 허름한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이거 맞아요? 내가 아는 칠죄검이랑은 다르게 생겼는데.”
[맞네. 지금은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지.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닌 듯하니까.]
쿠르르…….
동굴이 화답하듯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깨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칼자루를 잡았다.
“혹시 검집은…….”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제법 힘을 준 게 무색하게 쑥 뽑혔다.
“그냥 뽑히는군요.”
[무슨 의미인가?]
“그 왜, 전설의 검 같은 건 뽑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명검은 주인을 고른다는 말도 있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검은 그저 도구일세. 다루는 것도 아니고, 그저 뽑는 데에 자격이 필요할 리 없지 않은가. 애초에 검 주제에 주인을 고른다니 어불성설일세.]
“…….”
신이라 그런지 낭만이 없네.
2,000년 전에는 영웅 소설도 없었나 보다.
나는 섭섭함을 숨기며 뽑은 칠죄검을 대충 벨트 사이에 끼웠다.
다행히 날이 많이 녹슬어 있어서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됐죠? 이제 그만 이 지긋지긋한 동굴을 벗어나고 싶은데.”
[아직 하나 더 남았네.]
“뭡니까?”
[방금 있었던 제단으로 가서, 검을 올린 다음 내게 공양을 해야 해.]
“공양이요? 저는 가진 게 없는데…….”
잠깐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나는, 곧 먹다 남은 육포를 발견했다.
“이거라도 드릴-.”
[먹을 건 괜찮네. 그대는 그냥 제단에 검을 올리고 짧게 기도하면 돼.]
“아하. 알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탑을 내려왔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긴장을 풀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다.
이 몸뚱이로 기도까지 해야 하다니.
눈 감았다가 그대로 기절하는 건 아닐지 몰라.
…그런 속내를 감춘 채 제단 앞에 선 채로, 두 손을 모은 다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도해야 하는 걸까.
나는 비록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종교를 믿지 않는다. 믿는 신도 없다.
유치한 이유지만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해서다.
이러한 자존심은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까지 내가 신을 찾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신적인 존재와 교류하고, 소통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신앙심이랄 게 없다.
그렇다면 신앙심이 없는 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지금 나의 행동- 그러니까 합장과 묵례는 이 세상의 보편적인 기도 방식도 아니다.
나는 그저 눈과 입을 닫은 채 침묵했고, 그 상태로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미풍이 느껴진 건 그 순간이었다.
계절을 잊을 만큼 따뜻한 바람.
그 바람 속엔 무신의 목소리가 깃들어 있었다.
[이제 눈을 뜨게.]
나는 눈을 떴다.
그러자 제단 너머에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겐 그저 밝은 그림자처럼 보여서 생김새나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도 예상이 가지 않았다.
[흐음. 아직 신앙이 부족해서 완전한 현현顯現은 불가능한 듯하군.]
“그 모습은…….”
[말했잖은가, 연자여. 그대에게 은하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렇게 급하게 가르쳐 주지 않으셔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어서 그러네. 이 잊힌 제단이 있다면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현현할 수 있으니까.]
그런 까닭이.
[잘 보게. 지금 이 자리에서 시연할 테니까.]
손을 뻗어 칠죄검을 잡고,
무신의 인영은 자세를 취했다.
“…….”
무공의 이름에는 대부분 그 구결과 진의가 슬며시 감춰져 있다.
내가 익힌 백일식白日式은 찬란히 타오르는 태양에 영감을 받은 무공인데.
그 때문에 백일식을 위해 개발한 심법- 염화제일공은 폭발력과 지속력, 회복력에서 강세를 보인다.
그렇다면 은하검銀河劍에 담긴 묘리는…….
“…….”
무신의 움직임은 배려 가득한 시연이었다.
문자 그대로 누군가에게 찬찬히 보여 주고, 가르치기 위한 동작.
만약 이토록 천천히 전개하지 않았다면, 나는 무신의 움직임에서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했을 거다.
지금은 희미하게 느껴졌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꽃잎, 그중 한 장을 간신히 쥐었을 뿐이었으나, 그래도 은하검의 묘리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크고, 웅장하다.’
그것이 내가 느낀 은하검의 특징이다.
이 무공의 근원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떠올리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피로도, 시간도 잊은 채 몰입했다.
작은 움직임 하나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지금의 나는 이 움직임의 단 1퍼센트도 해석할 수 없지만, 단지 머릿속에 박아두는 것만으로 언젠가 반드시 도움이 될 터였다.
“…….”
마침내 무신의 움직임이 끝났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찰나밖에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은하검이 준 여운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침묵했다.
[은하란 저 밤하늘에 펼쳐진 무수히 많은 별의 집합체를 뜻하네.]
무신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자여, 그대는 태양도 넓은 관점에선 단지 하나의 별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는가.]
“음. 태양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들으면 게거품을 물 말씀인데요.”
[그들의 신앙을 내리깎을 생각은 없네. 나는 그저 천지 만물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니.]
“…….”
무신의 인영이 다시 제단 위에 칠죄검을 놓았다.
[은하검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웅장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살짝 쫀 것 같기도 하고요.”
[쫄았다?]
“그러니까… 두려웠다는 뜻입니다.”
[흠.]
어쩐지 내 솔직한 고백에, 무신은 마음에 든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하군. 어리다고 해도 한 명의 무인. 공포를 순순히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
[사실 당연한 것일세. 인간은 원래 인지를 벗어난 거대한 존재에게 두려움을 품기 마련이니까.]
“거신 같은 존재 말입니까?”
[단순히 신만을 말하는 게 아닐세.]
무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자는 그대가 딛고 있는 대지의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무런 문헌도,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던 고대의 지배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반대로 지금으로부터 수억 년 이후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무신이 내 표정을 보는 듯하더니,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연자는 이러한 요소에 대해 깊게 생각한 적이 없는 듯하군.]
“그렇습니다.”
[왜인가?]
“너무 아득합니다. 제 삶은 언제나 다음 발자국을 내딛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그토록 먼 것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무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겠지.]
인간의 본질…….
나는 어쩐지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지를 아득히 초월한 존재란, 단지 존재만으로 경외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일세.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보며 품는 감정과 동일하겠지.]
“…….”
[그리고 우주宇宙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장 거대한 개념이라네.]
나는 그제야 은하검에 담긴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포괄.”
[맞네.]
훅.
희끄무레한 무언가는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은하검의 극의란 만물의 포괄을 의미함세.]
“그럼 그 무술을 극성까지 익힌다면…….”
[연자의 그릇은 우주宇宙를 품을 만큼 넓어지겠지. 태양을 모방한 검술을 완성하더라도 부담은 없을 걸세.]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무신이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했다.
어떤 의미에서 은하검은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무공이었다.
딱히 은하검이 백일식의 상위 무공이라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신의 수준이 스승님의 윗줄인 것도 아니고.
이것은 그저 상성의 문제였다.
[은하검은 총 일곱 단계로 구성되어 있네. 차례대로 일추一樞, 이선二璇, 삼기三璣, 사권四權, 오형五衡, 육양六陽, 마지막으로 칠광七光이지. 그대가 바라는 걸 얻으려면 최소 오형의 경지에는 이르러야 할 것이네.]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경지의 분류는 혹 적천칠성赤天七星에서 따온 것입니까?”
[맞네.]
적천칠성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일곱별을 말한다.
신기하게도 이 성군은 노을이 질 무렵에 가장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나는 물끄러미 칠죄검을 내려다봤다.
“혹 칠죄검의 형태 또한 칠성에서 따온 것입니까?”
[바로 그러하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칠성은 점성학은 물론이고 마도학, 흑마법, 정령술, 연금학, 신학神學에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그 대부분의 학문에서 일곱별은 각기 빛과 어둠, 나무, 불, 땅, 쇠, 물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큰 틀에서 보면 은하검 또한 음양오행陰陽五行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무공이란 뜻이고.
그 뜻은 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염화제일공과 맞닿는 부분도 있다는 것.
내 머릿속에선 방금 무신의 검무가 처음부터 떠올랐다.
무공이란 신기한 분야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분야기도 했다.
염화제일공과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았을 뿐인데, 더는 은하검이 크고 두렵게 느껴지지 않게 됐다.
오히려 신이 났다.
‘지금 깨달은 은하검의 묘리를 백일식에 접목시킨다면-.’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닐 거다.
권법과 검법의 차이는 작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내 머리는 일찍이 없을 정도로 맹렬히 회전했고, 본능적으로 염화제일공의 운공을 시작했다.
화륵-.
쥐꼬리만 한 내공이 전신 혈도를 내달렸다.
영산 시절의 경험까지 합하면 수천, 수만 번도 더 반복했던 순환 과정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낯설고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토록 익숙했던 길이 다르게 보인다는 건, 내 시야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겐 스스로의 육체가 작은 우주라도 된 것처럼 광활하게 느껴졌다.
‘우주?’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우주란 개념을 단지 크고, 거대하게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인간에겐 모두 각자의 우주가 있다.
깨닫고 나면 간단한 이치.
인체야말로, 하나의 소우주小宇宙였다.
[이건…….]
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깨달음의 뒤에 오는 정신적 쾌락에 휩쓸리고 있는 도중이었다.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지만, 축축함이 기분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깨달음의 후폭풍.
이럴 때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한동안 혼자 있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다.
[연자여, 은하검에 입문한 걸 축하하네.]
무신의 말에서도 잔잔한 여운이 느껴졌지만.
그러나 이어지는 무신의 말에, 나는 찬물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그대는 백노광과는 무슨 관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