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배드니커의 본가, 교류회 나흘 차.
제아무리 즐거운 축제라도 나흘씩이나 이어지면 열기가 시들해지는 법이다.
교류회도 예외는 아니라서, 홀을 가득 채웠던 인파가 많이 사라진 상태.
사실 당연한 일이다.
교류회에 참가하는 건 여간 일이 아니라서 그렇다.
품위를 위해 단 하루도 겹치는 옷을 입어선 안 되고, 치장에도 흐트러짐이 있어선 안 된다.
이곳에서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가 어떤 식으로 퍼질지 모르니 사소한 잡담을 나눌 때조차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듣기로 첫날 이후 몸살이 나서 앓아눕는 귀부인들도 많다고.
그러나 몸이 약한 루시아는 의외로 나흘 차까지 꼬박꼬박 개근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엔 슬픈 이유가 있었는데,
어차피 치장에 신경 쓸 만큼 의상이나 귀금속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교류회 중에 누군가와 길게 얘기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툭 터놓고 말하면 누군가와 1분 이상 대화한 적도 없다.
“…후우.”
루시아는 바깥 정원에 나와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흘 동안 제법 바쁘게 움직였는데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일단 교류회의 가장 큰 목표였던 대사범은 그다지 참석하지 않았다.
루안이 좋아하는 도검선생은 코빼기도 안 보였고, 대신 법학선생과 예술선생이 모습을 보였는데.
두 사람 모두 루시아를 보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특히 법학선생은 루시아를 보더니 말도 섞기 싫은 듯한 표정을 지어서, 짙은 모멸감을 느껴야만 했다.
멍하니 앉아서 입김을 내뱉고 있자니, 우측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날이 춥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콧수염, 인생의 황혼을 상징하는 주름, 그것과 상반되는 건장한 체격.
케이안이 옆에 서 있을 때면, 루시아는 꼭 은퇴한 노기사에게 호위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경, 제가 고맙다고 말했던가요?”
“몇 번이나 하셨지요.”
“그래도 다시 한번 말할게요. 고마워요.”
그러자 케이안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살짝 허리를 숙였다.
루시아는 새삼스레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닫았다.
철혈의 징수인 케이안
아니. 이제 전前 징수인인가, 아무튼.
이 사내에게 도움을 받은 건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오죽하면 교류회 첫날엔 어느 테이블에서도 이 얘기만 나올 정도였는데, 처음엔 루시아도 케이안이 무언가 착각한 줄 알았다.
그건 아니란다.
이유를 물어보니 돌아오는 말은…….
그저 루안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첨이라고.
루시아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힌 발언이었다.
설마 자신이 저택을 떠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령 가문의 원로회가 루안에게서 아무런 비전을 보지 못하고, 징수를 명했다면…….
그럼 지금 저택에 있는 루안은-.
“부인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었습니다.”
케이안은 루시아의 망상을 단호히 일축했다.
그 이상 무언가를 말해 주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다른 사실을 귀띔해 줬다.
- 루안이, 지금 본가를 향해 오고 있다고.
그것도 무려 철혈공의 명령으로, 2차 가호식을 받으러!
루시아로선 환희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혹시 가주님께서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철회한 것일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루시아는 스스로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철혈공에 관해선 아직 잘 모르겠다.
그의 자식까지 낳았음에도 그렇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안다.
배드니커의 가주- 철혈공은 흥미를 느끼지 않은 상대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하다는 것.
직접 명령해서 루안을 부르고, 2차 가호식을 명할 정도라면…….
일단 그 아이에게 최소한의 흥미는 느꼈다는 뜻이고, 그 사실만으로 최악은 이미 면했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아들을, 그것도 본가에서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교류회에서 소기의 목적조차 달성하진 못했으나 큰 상관은 없다.
다른 어중이떠중이의 눈에 드는 것보다 철혈공 단 한 사람에게 인정받는 게 훨씬 중요하니까.
그랬는데.
“…….”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흐르고.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교류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옆을 지키는 케이안에게 물었다.
“산맥에서 이 배드니커의 본가까지, 일반적으로 얼마나 걸리나요?”
“1주일 정도입니다.”
“…1주일.”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송곳니기사단이 본가를 떠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계획보다 며칠이나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케이안이 루시아의 염려 섞인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너무 염려치 마시지요. 보석 산맥은 제국의 금지이니만큼 움직이는 데에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다행히 동행한 기사들은 전문가입니다. 살짝 둘러 가더라도,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한 것이겠지요.”
케이안이 말하는 바는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은 있다.
2차 가호식이 실질적으로 행해지는 건 12월 31일- 즉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그 준비까지 고려하면 최소한 하루, 여유롭게는 이틀 전까지 본가에 도착해야 할 터.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천금 같은 기회가 사라질 뿐 아니라 가문에서 책망할 수도 있다.
그 어떤 사정도 변명이 될 테고.
‘오늘은 12월 26일.’
앞으로 나흘 내로 루안이 못 온다면, 가호식의 참여 자격은 차등 순번으로 넘어간다.
‘아니.’
사실 가호식 같은 건 상관없다.
아들은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가호를 받지 않아도 사람이 사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루안, 무사하지?’
루시아로선 그저 하나뿐인 아들이 무사하길 바랐다.
* * *
배드니커의 본가.
수많은 객실 중 유난히 어두운 방.
대낮인데도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어쩐지 그 이유만은 아닌 듯한 음침한 방이었다.
“이번 가호식에는 네가 참여하게 될 것이다.”
가르쉬아 가문.
배드니커의 분가分家 중 한 곳.
그 가문의 가주인 레이건이 말했다.
“어쩌면 이번 기회로 너도 배드니커의 이름을 받게 되겠지.”
분가가 다시 본가의 이름을 얻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배드니커에선 예외다.
이 가문은 철저한 실력주의.
실력만 증명하면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모두 허용된다.
그러나 하르바 가르쉬아는 친부의 말을 경청하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가호식의 마지막 자리는 루안 배드니커의 차지가 아닙니까?”
본격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저택 내에선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애초에 너의 것이었던 자리다.”
레이건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이번 가호식에 참여하는 마지막 인물인 가르쉬아 가문의 장남- 하리바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결정이 단숨에 뒤집혔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인물- 철혈공의 한마디.
배드니커에서 유일하게 가법家法 위에 서 있는 게 철혈공이다.
그런데도 이번 명령은 오랜만에 가주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만들었는데…….
결국 철혈공의 혈연에 대한 집착이 안 좋은 방향으로 발현됐다는 것.
애초에 루안 배드니커가 어떤 놈이냐면.
가호를 단 하나도 받지 못한 무능력자,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온갖 사건의 주범.
결국엔 가문의 보검까지 갖다 판 미친놈이 되겠다.
그런 망나니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다니?
대놓고 불만을 표출한 자는 없었으나, 누구도 그 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루안 배드니커는 기일까지 본가에 당도하지 못할 것이다.”
레이건이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무언가 안배를 두셨습니까?”
“그렇지는 않다. 이 가문에서 철혈공의 눈을 속일 방법은 없지……. 나는 그저 계획의 귀띔을 들은 것뿐이다.”
하리바가 침묵했다.
레이건은 기회주의자다.
그리고 기회주의자의 특징은,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하나의 동아줄로는 안심하지 못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래야 할 이유만 있다면 얼마든지, 또 어디까지고 잔인해질 수 있다.
하리바는 레이건의 특징을 안다.
어디 알기만 할까.
“부족한 것 같습니다만.”
제 아비보다 훨씬 잔인한 성정의 소유자가 하리바다.
“무엇이?”
“단순히 기일까지 본가에 오지 못한다, 그 정도 보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쩌자고.”
“확실히 해야겠지요. 루안이 혹 살아 있거나, 늦지 않게 본가에 도착하더라도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조성한다거나.”
레이건은 가만히 아들의 눈동자를 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지금 본가에 루안 배드니커의 친모가 있지 않습니까?”
“있지.”
“죽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