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레이건은 두 눈가를 꾹 눌렀다.
동요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팔뚝에는 소름이 우수수 돋아나 있었다.
피가 이어진 혈육이라지만, 하리바가 때때로 괴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쩐지 인간으로서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여러 요소가 결여된 듯한 느낌.
하리바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아들이 처음 이상한 모습을 보인 건 2년 전 있었던 제2황자의 탄신 연회였고.
그 이후 공부할 게 생겼다며 돌연 [울크아]로 떠났다.
‘보내는 게 아니었어.’
[울크아]는 연금술의 성지로서 이름 높은 곳이지만, 세간에 평이 좋은 곳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는 도시였다.
연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연금술사란 놈들이 무더기로 모인 장소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몇몇 이들은 울크아를 [사상 최악의 도시]라고 부를 정도였다.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치안 따위를 생각하면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다.
어쨌든 그 연금술사의 땅에서 돌아온 이후, 하리바는 자신의 충동을 더는 숨기지 않게 됐다.
조금 위험한 이들과 어울린다는 소문도 들었다.
잠시 후 레이건이 입을 열었다.
“그녀를 죽이는 것과 가호식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루시아가 죽어도 가호식엔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 장례라면 가호식이 끝난 이후에 주관하면 되는 것이고.”
“제가 들은 루안 배드니커는 그렇게 정신이 굳건한 놈이 아니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발각될 확률이 너무 높아. 너는 여기가 어느 곳인지 잊은 것이냐?”
비록 철혈공이 부재중이라고 해도 이곳이 배드니커의 본가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가문의 원로, 기사단은 물론이고 대사범들까지 대기하고 있는 상황.
여자 하나를 암살할 방법이야 셀 수도 없겠지만, 꼬리를 밟히지 않을 자신은 없다.
레이건은 아들을 보며 말했다.
“하리바.”
“예.”
“자제하거라.”
“…….”
진심 어린 충고다.
레이건은 최고가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잔학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리바는 그 정도가 과하다.
하리바는 잠깐 입을 닫고 침묵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루안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들은 정보에 이미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고, 죽이는 것도 시간문제라 적혀 있었으니까.”
레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제야 커튼을 거뒀다.
촤르륵.
화사한 햇볕이 내리쬈다.
레이건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말했다.
“가호 하나 없는 애송이가 보석 산맥을 벗어날 확률은 없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마라.”
“…알겠습니다.”
“가봐라.”
하리바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다음 조용히 방을 떠났다.
레이건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 그 너머로 보이는 우거진 숲.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배드니커의 본가.
지금은 가호식의 덕으로 객실을 대접받고, 잠깐 머무는 것에 불과하지만…….
하리바가 배드니커의 일원이 된다면, 이 아름다운 풍경 또한 매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가호식까지, 앞으로 나흘.’
레이건은 느긋한 심정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 * *
가호식에 참여하는 건 당연히 배드니커의 혈통만이 아니다.
이번 가호식에는 시골 촌뜨기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제국 귀족들이 모두 모였다.
물론 그들 중에서 배드니커와 견줄 수 있는 가문은 거의 없다.
…‘거의’ 없다.
굿스프링.
이름의 무게로만 치면 배드니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 유일의 가문.
“…따분해서 돌아가시겠네.”
굿스프링가의 삼녀인 세렌 굿스프링은 팍 구겨진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이 엿 같은 저택에 온 지도 벌써 2주일이 다 돼 간다.
소문 자자한 배드니커의 본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처음엔 놀랐다.
몽환적인 숲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저택은, 세렌으로 하여금 참으로 오랜만에 동화적인 감성을 느끼게 해줬다.
이틀째도, 사흘째도 그 풍경은 질리지 않았다.
한계가 찾아온 건 1주일이 흘렀을 때.
아름다운 경관에 익숙해지니 이곳의 단점만이 부각됐는데.
‘도시가 너무 멀잖아.’
도시는커녕 숲에도 함부로 나갈 수 없다.
세렌도 [나비의 숲]에 대해선 알고 있다. 배드니커의 핏줄이 아니라면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장소.
그뿐만 아니라 숲 깊숙한 곳엔 위험한 마물들도 잔뜩 서식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때쯤 세렌은 이곳이 감옥과 뭐가 다른지 잘 알 수 없게 됐다.
게다가 그놈의 연회도 뭐 그리 많이 여는지, 이제는 음악 소리만 들어도 구역질이 날 지경.
“…내가 왜 이런 데에 와서.”
굿스프링에서 가호식이 열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렌의 가문은 배드니커, 황가를 포함해서 가호식을 주관할 수 있는, 단 셋뿐인 가문이다.
운만 좋았다면, 세렌은 자기 가문에서 열리는 가호식에 참가할 수 있었다.
…물론 굳이 이 시기에, 직접 배드니커에서 가호식을 치르게 된 건 세렌의 선택이었다.
가호식만이 아니다.
이 이후에 있는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참가하는 것이 세렌의 진짜 목적이다.
[절망의 6주]라고 불리는, 그 악명 높은 배드니커의 수련회 말이다.
그 기간을 거쳐서 수료하는 데에 성공하면, 어지간한 병신이라도 제 몫이 가능한 인재로 거듭난다던데…….
사실 주변에선 세렌이 수련회에 참가하는 걸 이해하지 못할 거다.
세렌은 굿스프링이니까.
가호를 하사받은 영웅이라면 굿스프링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있고, 그곳에서의 수업 또한 배드니커에 밀리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어째서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참가하려는 것인가?
그 이유는-.
‘…음.’
세렌은 힐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강당에는 다양한 나이대의 소년소녀들이 북적대고 있다.
오늘은 최종 점검일.
그러니까 내일, 가호식에 참여하는 인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과정 말이다.
그 짓거리를 위해 아침 댓바람부터 가호식 참여자 전원이 집합했다.
‘2주 동안 방에만 처박혀 있던 새끼들도 다 참가는 했군.’
가호식에는 항상 ‘주인공’이란 게 있다.
이 주인공이란 당연히 몇 개의 가호를 받느냐로 결정이 되는데…….
당연히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일수록 많은 가호를 받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세렌은 이번 가호식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별개로 눈여겨봐야 할 놈들이 몇몇 있다는 건 인정하고 있었지만.
‘도스레타가의 장남, 헬빈가의 삼남, 루비에타가의 막내딸…….’
그 밖에도 제국 최강의 레인저인 하이드 우드잭의 독남도 있다던데.
어쨌든 이놈들도 나름대로 명성 있는 놈들이지만, 지금 가장 견제되는 건 따로 있다.
세렌의 시선이 흘끗 그쪽으로 향했다.
재수 없을 만큼 잘생긴 두 남자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빨간 머리카락.
제국에서도 찾기 힘든 희귀한 색.
그러니 그 색은 그들의 가문을 대표하기도 한다.
칙칙하고 기분 나쁜 흑발은 [배드니커].
찬란하게 타오르는 듯한 적발은 [황가].
그렇다.
저 두 놈이 배드니커의 차남, 그리고 제국의 제4황자가 되시겠다.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들…….’
세렌은 속으로 두 남자를 질겅질겅 씹었지만, 사방의 시선 대부분이 저쪽에 쏠려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저 귀하신 낯짝을, 가호식 동안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을 테니.
두 놈 다 종일 방에만 처박혀 있었으니까.
‘신비주의, 뭐 그런 거?’
그때 흑발 남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더니 재수 없게 픽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굿스프링의 영애가 아니신가.”
“…….”
세렌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입을 열었다.
“소문 자자한 헥토르 도련님께서 알아봐 주시니 영광이네요.”
“하하. 딱딱한 말은 됐으니 이리로 오시게. 랜터스와 인사는 했나?”
자연스레 윗사람처럼 꺼드럭대는 말투가 눈꼴시다.
솔직히 가까이 가기도 싫었지만, 황자까지 들먹이니 핑계도 마땅치 않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친한 친구처럼 황자를 부르는 건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고…….
마침 황자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세렌이 딱딱한 미소로 응대하며 대꾸하려는 순간.
벌컥-.
강당 문이 다소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체형과 얼굴, 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나 강당 안의 어린 영웅들은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그 사이 단상 위에 올라선 남자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렇게 어린 영웅분들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루크라고 합니다.”
이름까지 평범했으나, 남자의 신분만큼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배드니커를 대표하는 두 기사단 중 하나인 [철혈기사단]의 단장.
기사단장 루크.
혈연상으로는 철혈공의 동생이기도 한데…….
“아침 일찍부터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일정은 간단한 신원 확인뿐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대부분이 평범한 남자였으나 목소리만큼은 특색이 강했다.
듣는 것만으로 우울해진다고 해야 하나.
그에 더해 세렌은 왠지 모르게 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긴장이 됐다.
‘…대단하긴 해.’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굿스프링을 쳐다도 못 봤던 가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철혈공이 가주가 되기 전만 하더라도, 배드니커의 위세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명문가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굿스프링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길가는 행인을 붙잡고 배드니커와 굿스프링을 비교했을 때,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정은 사흘 전부터 공지했으니, 오늘의 불참자가 곧 가호식의 불참자입니다.”
그사이 루크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절차는 간단합니다. 제가 호명하면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만약 세 번 호명할 때까지 대답이 없다면 불참자로 간주되니 주의해 주십시오. 또한 경칭을 생략하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텐필드가의 코먼.”
“예.”
당연히 이 자리에 불참하는 얼간이는 없을 것이다.
가호식이 어떤 기회인데?
세상 대부분의 문제는 돈이나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예외도 있는 법이다.
“트마론가의 리오니스.”
“예.”
가호식이 그랬다.
이곳에 참가할 수 있는 건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항마降魔의 적성을 가진 자들뿐이다.
그리고 가호야말로 영웅의 피를 완전히 개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굿스프링가의 세렌.”
“예.”
때마침 호명돼서 대답했다.
그러자 사방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몇몇 가문의 자제들은 교양 없는 태도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저게 그 굿스프링가의 삼녀?’라거나.
‘머리 색이 특이하네’부터.
‘겉은 멀쩡한데 속은 맛이 갔다더라…….’라는 말까지.
세렌은 이러한 반응이 익숙해서 덤덤했지만.
‘배드니커와의 혼담이 깨진 이후엔 성깔이 더 나빠졌다.’라는 수군거림엔 평정심이 깨질 뻔했다.
‘혼담은 개뿔.’
애초에 억지로 시작된 얘기였고, 상대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사실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문의 보검을 갖다 판 미친놈이었나?’
사실 명문가끼리 혼담이 오가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심지어 배드니커와 굿스프링은 제국을 대표하는 두 가문인데, 그럼에도 둘의 혼약은 성사 직전까지 갔다.
이런 경우 의외로 이유는 단순한데, 혼담이 오간 자들에게 어딘가 하자가 있는 것.
가문의 골칫덩이를 해결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랄까.
그러나 결국 혼담 이유가 쏙 들어간 이유는, 배드니커 쪽 도련님의 악명이 심각할 수준이 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머저리 놈의 머저리 짓 때문에 세렌은 겨우 한시름 놓은 상황이 됐다.
가문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근데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들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루…….
“배드니커가의 루안.”
맞아. 루안 배드니커.
‘응?’
세렌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놈도 이번 가호식에 참가했나?
잘 모르겠다.
애초에 ‘세렌 굿스프링’이 가호식에 참가한 순간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듣기로, 그놈은 올해 초에 있던 1차 가호식에 참가했다고 했는데.’
거기서 가호를 하나도 못 받았고.
위대한 가문의 일원이 단 한 개의 가호도 못 받은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연히 세렌도 알고 있다.
그야 혼담이 엎어진 결정적 이유였으니.
“배드니커가의 루안.”
루크의 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강당을 울렸다.
그러고 보니 세 번 호명할 때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불참으로 간주한다고 했나?
아무래도 그 겁쟁이 놈은 가문을 통해 선별됐음에도 참석하지 않은 듯한데…….
‘그야 그렇겠지.’
그런 망신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세렌으로선 오히려 루안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 배드니커의 선택이 이해 가지 않았다.
“배드니커가의 루-.”
벌컥!
그때 강당 문이 벌컥 열렸다.
강당의 모든 시선, 세렌은 물론이고 단상에 있던 루크의 시선까지 그쪽으로 확 쏠렸는데…….
직후 대부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
웬 거지 놈이었다.
멀리서 봐도 꼬질꼬질한 차림새에 코를 틀어막게 만드는 악취까지.
“저게 뭔…….”
세렌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배드니커를 촌구석이라 욕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진실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다.
특히 이 본가가 세워진 땅은 황가만큼이나 안전한 장소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말했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 상황에도 존댓말을 유지하는 기사들이 대단했지만, 정중한 말투와 달리 태도는 위협적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건 거지의 태도였다.
“그래? 집사가 여기로 가라고 하던데.”
그제야 기사들도 무언가 이상한 걸 느낀 듯하다.
“실례지만 귀하의 신분이…….”
그러자 꼬질꼬질한 녀석이 주변을 둘러본 뒤 말했다.
“나 이 집 막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