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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33화 (33/172)

33화

내가 못 할 말이라도 꺼낸 줄 알았다.

사방이 냉수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오히려 나 스스로가 꺼낸 말을 되짚어 볼 지경이었는데.

나, 이 집, 막낸데.

주어, 목적어, 동사까지.

다시 한번 떠올려도 이상한 건 없다.

“배드니커의 루안?”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단상 위에 서 있는 남자였는데, 본가에 있을 때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다.

‘루크잖아.’

철혈기사단의 단장인 루크.

가주의 이복동생이기도 한 사내.

“네.”

루크는 지그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됐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

웬 존댓말?

‘것보다 앉으라니…….’

애초에 여긴 뭐 하는 자리야.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 강당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떠올렸다.

아르잔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본가에 도착한 나는, 우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뒤 호화스러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택 입구 근처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징수인 케이안.

- 오! 케이안 경, 오랜만…….

- 도련님, 빨리 강당으로 가십시오.

- 뭐?

케이안의 호들갑에 반쯤 떠밀리듯 강당으로 오게 됐고……. 상황은 지금에 이르게 된다.

아무튼 계속 서 있는 것도 좀 그래서 비틀비틀 걸어가서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지체됐군요. 이어서 하겠습니다. 페리스가의 토니오…….”

단상 위의 루크는 다시금 호명하는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가호식이었나?’

그제야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알게 됐으나, 확인차 옆에 앉은 녀석한테도 물어봤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친한 척 굴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헉.”

나는 깜짝 놀라며 물러났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였는데, 흰색인지 은색인지 애매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표정이다.

내가 뭔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무슨 벌레라도 보듯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린다.

[호오… 특이한 내력의 소유자로다.]

‘깜짝이야.’

나는 갑자기 등장한 무신을 힐난했다.

‘깨어나셨습니까? 그렇게 부를 때는 한마디도 안 하시더니.’

[말했잖은가. 특별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한, 내가 깨어날 일은 없다고.]

‘말 안 하셨는데요.’

[그런가?]

무신이 살짝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 모인 전원이 영웅의 혈통을 이은 듯한데, 맞나?]

‘그런 셈이죠?’

[그야말로 옥의 집합이로다. 특히 눈앞의 소녀는 그대와 견줄 만큼 뛰어난 혈통의 후계자 같군. 혹 연자와 아는 사이인가?]

‘그럴 리가요.’

칼자크와 달리 생긴 것도, 목소리도 익숙하지 않다.

애초에 이런 인상적인 외견의 소유자라면 잊을 리도 없다.

그래도 단순히 성격이 까칠하다기엔 뭔가 이상한…….

아.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거지꼴이기는 하다. 고약한 냄새도 풍기고 있을 테고.

‘아무튼 상황을 좀 지켜보고 싶으니까 조용히 있어 주십쇼.’

[그리 말하지 않아도… 슬슬 다시 자야 할 것 같구먼…….]

무신의 목소리가 점차 흐릿해지고.

나는 잠자코 루크의 호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음…….’

어째 눈꺼풀이 무겁다.

본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몸에 슬슬 긴장이 풀리는 느낌.

“…루안.”

“…….”

“루안 배드니커.”

“…….”

“일어나라.”

“…스읍.”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느낌에 살짝 눈을 떴다.

어느새 졸았나 보다.

고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드니 루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끝났다. 강당을 정리해야 하니 이제 돌아가도록.”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강당엔 나밖에 없었다.

“예에…….”

나는 늘어지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직 내 몸이 정상은 아니라서 그렇다.

화백의 후유증.

산맥에서 보석수를 쓰러뜨린 게 약 나흘 전이니, 몸 상태가 완전히 돌아오려면 사흘은 더 걸릴 거다.

‘어머니도 봬야 하는데.’

당장이라도 찾아뵙고 싶었지만, 간만에 보는 아들내미가 거지꼴을 한 걸 반길 리는 없다.

나는 몸부터 씻기로 하고 강당을 나섰는데, 강당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꼭 입구를 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냥 지나가려는 순간, 그놈이 내게 말을 걸었다.

“루안 배드니커.”

“누구세요.”

“하리바 가르쉬아다.”

“가르쉬아?”

배드니커의 분가 중 하나가 그런 성을 지니고 있는 걸로 기억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

하리바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놈이지.’

아마도 이 녀석은 나와 초면일 텐데.

쉴 새 없이 꼼지락대는 손가락, 흐트러진 호흡, 살짝 충혈된 눈동자.

이 모든 요소가 덤덤한 얼굴 밑에 가려진 감정을 가르쳐 줬다.

이 새끼는 지금 나한테 살의를 품고 있다.

하리바라는 놈은 그렇게 한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별말 없이 그대로 떠났다.

찝찝해서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쫓아가기도 힘들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씻는 게 우선인 상황.

다시 한번 발걸음을 뗀 순간.

“오랜만이군.”

‘시발.’

좀 씻자.

무슨 지역 명물도 아니고,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말을 걸어오니 짜증이 난다.

또 어떤 놈인가 싶어 바라봤는데, 이번엔 다행히 익숙한 낯짝이었다.

“헥토르?”

“뭐?”

“…형님.”

“…….”

내가 덧붙이자 헥토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진짜 웃겨서 웃는 얼굴은 아니다.

“설마 여기서 너를 보게 될 줄이야.”

배드니커의 본가에, 배드니커의 핏줄이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일까.

표정만 보고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동생이 반갑다거나,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고 싶다거나…….

그런 따뜻한 이유로 말을 건 것은 아닐 거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도 이복형제.

게다가 나의 무재능이 판별이 난 이후로는 취급도 하지 않았던 선두주자가 바로 헥토르다.

“정말 질렸다.”

역시라고 해야 하나.

나를 빤히 바라보던 헥토르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네놈의 뻔뻔함엔 정말로 질렸다고.”

“…….”

“대체 무슨 낯짝으로 본가까지 온 거지?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게 1차 가호식만으로는 부족했단 말이냐?”

헥토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기세였는데, 이 녀석이 화가 난 이유에 대해선 쉽게 짐작이 간다.

철혈공의 자식들 전원이 그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지만, 이 헥토르란 놈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가주의 ‘잘했다’라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선 열이건, 백이건 망설임 없이 주검으로 만들 수 있는 게 헥토르다.

“가주님께서 직접 불렀는데요.”

“그 얘기는 나도 들었다. 도저히 믿기 힘들더군.”

헥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원로회, 그 약아빠진 늙은이들이 헛소리한 거겠지.”

“…….”

“아버지는 공사다망한 몸이시다. 가문의 대소사를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단 말이다.”

헥토르의 표정과 목소리엔 철혈공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면처럼 한순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문제는 네놈이다. 아버지가 불렀다고 쫄래쫄래 진짜 기어 오는 꼴이라니. 생각이라는 게 있긴 한 거냐? 1차 가호식 때와는 달라. 그때는 황가도, 그리고 빌어먹을 굿스프링가도 참석하지 않았으니까. …이번엔 4황자와 굿스프링의 자제 또한 있다.”

“…….”

“너에게, 최소한의, 눈치란 게 있었다면. 오지 말았어야지.”

나는 헥토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뭐요.”

“뭐요?”

“사족이 긴데, 나더러 뭐 어쩌라고.”

몸도 지저분해서 찝찝해 뒤지겠는데, 별 같잖은 걸로 시비가 걸리니 짜증이 났다.

“아버지 말을 안 따랐으면 안 따랐다고 지랄했을 거면서, 잔소리는.”

순간 헥토르의 표정이 무섭게 굳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동작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피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화백의 부작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입방정을 떨었나.’

그냥 여기 서서 쭉 얘기를 듣는 것보단 한 대 맞고 빨리 씻으러 가는 게 나아 보인다.

팍!

그러나 주먹이 꽂히기 직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헥토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뭐야?”

아르잔이다.

강당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적절한 순간 끼어든 듯하다.

“죄송합니다, 형제간 다툼의 범위를 넘은 듯 보였기에.”

“저놈 집사냐?”

“…….”

“놔.”

아르잔은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짜악!

헥토르가 아르잔의 뺨을 후려쳤다. 아르잔의 외눈 안경이 시원하게 날아갔다.

주륵.

입안이 찢어진 걸까?

손등으로 후려쳤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았다.

방금 아르잔은 피할 수 있었는데도 일부러 맞았다.

내게로 향하던 공격은 막았던 것과 대조적인 일이었다.

“…….”

이상하다.

왜 내가 처맞는 것보다 기분이 더러운 것 같지?

“가문 원로회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징수란 이런 쓰레기 때문에 만든 시스템이 아니었나.”

“…….”

“내일 가호를 하나라도 받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다. 또다시 무가호 판정이 떨어진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헥토르가 재수 없는 얼굴을 하며 뒤를 돈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놈에게 성큼 다가간 다음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

헥토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이 녀석 실력이라면 내가 뒤에서 다가온다는 사실은 충분히 깨달았을 터.

그러니 헥토르에게 있어서 예상 밖이었던 건, 접근한 내가 뒤통수를 때린 부분이다.

“이 새-.”

휘청거리던 헥토르가 즉시 균형을 잡더니 나를 돌아봤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감정이 잔뜩 담긴 주먹이 날아왔다.

아무리 빨라도 공격 타이밍만 안다면 피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직선적인 주먹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어렵지 않게 헥토르의 주먹을 피한 다음, 이번엔 뺨을 후려쳤다.

짜악-!

“…….”

헥토르의 눈동자가 멍하니 풀렸다.

아파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꼭 인지를 벗어난 현상을 목격한 학자 같은 낯짝이다.

얼이 완전히 빠졌다는 뜻.

나는 휘둘렀던 손을 역으로 움직여서, 이번엔 헥토르의 반대쪽 뺨을 손등으로 후려쳤다.

퍼억!

뺨을 두 대나 처맞으니 헥토르도 정신을 차렸다.

이번엔 가타부타 입도 열지 않은 채 주먹을 내질렀는데, 그사이 냉정을 되찾았는지 방금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후웅-.

그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또 피하니, 이놈이 으득 이를 갈았다.

“너…….”

그리고 열이 뻗쳤는지 허리춤에 있는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설마 뽑으려고?’

나도 칠죄검이 있기는 한데, 이거 지금 상태가 겉모습은 그냥 날 빠진 식칼보다 못하다.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하는 순간…….

“멈춰라-!”

사자 같은 포효가 우리 사이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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