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철혈기사단의 단장이자 철혈공의 동생.
루크 배드니커는 절제적인 사내다.
무엇이 절제적이냐면, 모든 게 그렇다.
수면이나 식사는 물론이고, 휴식이나 취미, 심지어 욕구까지 절제되어 있다.
절제를 미덕으로 아는 종교인도 그 앞에선 한 수 접어줄 정도.
물론 태어났을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며,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다.
루크의 절제적인 성향인 스스로 내린 선택이었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최강에 가장 확실히 도달할 방법이라 믿는 것.
또한 절제력이 높다는 건 인내심이 깊다는 말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데…….
강당 밖의 소란을 진작 깨달았음에도 이제야 개입한 이유기도 하다.
“…너희,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성큼 다가온 루크가 헥토르를 보았다.
시선을 받은 헥토르의 몸이 옅게 떨렸다.
“헥토르 배드니커.”
“예.”
“확인차 묻겠다. 본가에서 발검拔劍을 허락받았나?”
“아닙니다.”
“그럼 지금이 규율을 어겨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나.”
“아닙니다.”
“그런데 왜 칼자루에 손을 올렸지.”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다. 이유를 묻는 것이지. 왜, 검을 뽑아서 루안을 베어 버리기라도 하려고 그랬나.”
헥토르가 고개를 푹 숙였으나, 루크는 여전히 스산한 안색을 유지하며 말했다.
“네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본가의 규율을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이르렀다고.”
“그런 생각은 전혀-.”
“명심해라.”
루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가의 법도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분뿐이다. 너 자신을 가주님과 동일시하지 말도록.”
헥토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루크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행동이 철혈공을 모욕했다는 사실이 훨씬 부끄러웠다.
루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엄하게 말한 이유는, 이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다.
사사건건 트집 잡는 원로회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간다면 일이 귀찮아진다.
“방금 건 못 본 걸로 하겠다. 이만 돌아가도록.”
“예?”
“…….”
“…알겠습니다.”
헥토르가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직전 루안을 한번 쏘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으나, 루안은 멍한 얼굴로 무시했다.
“…루안 배드니커.”
“네.”
태평한 대꾸에 루크는 입을 닫았다.
방금 보았던 광경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그러니까, 헥토르의 뒤를 따라간 다음 뒤통수를 후려친 모습 말이다.
“왜 그랬지?”
해야 할 말이 많았지만, 처음 입 밖을 뚫고 나온 건 의문이었는데.
그제야 루안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헥토르를 때렸나.”
“그럴 만했으니까요.”
예상을 벗어난 대꾸에 루크가 눈을 빛냈다.
“그럴 만했다?”
“제 눈앞에서, 제 수하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루크의 시선이 옆에 서 있던 집사, 아르잔에게 향했다.
아르잔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입술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헥토르, 형님이 선을 넘었다 생각했고 그래서 갚아 줬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 이유로 네 형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뺨을 후려쳤단 말이냐?”
이 말에 루안은 뚫어져라 루크를 바라봤다. 그 투명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팔뚝에 살짝 소름이 돋을 지경.
이유는 모르겠다.
“형이란 사실이 중요합니까?”
“뭐?”
“누가 됐건 제 것에 흠집을 낸다면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빚은 세 배로 갚아 줘야지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루안이 맥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은 잘하는군. 너에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나?”
루크는 헥토르에게 보냈던 스산한 눈빛을 했다.
“방금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칼자루를 쥔 헥토르에게선 살기가 넘실거렸다. 규율을 어긴 헥토르는 본가에서 징계를 받았겠지만, 너는 운이 좋아도 불구 꼴이 됐겠지. 그렇다면 둘 중 누가 더 큰 손해일까.”
“…….”
“네겐 절제력이 부족했고, 그 결과 죽을 뻔했다. 그렇다면 네 행동은 용기로 포장할 수가 없다, 루안 배드니커. 너는 방금 미련한 짓을 저지른 것이야.”
“아예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란 뜻이냐.”
루안은 무언으로 긍정한 뒤,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헥토르가 칼을 뽑는 꼴을 제 수하가 좌시했을까요?”
“뭐?”
“방금 상황에서 나와 아르잔은 서로에게 명분이 되어 줄 수 있었습니다. 아르잔을 때린 헥토르에게 내가 보복하고, 거기서 이성을 잃은 헥토르가 검을 뽑은 채 달려들면 다시 아르잔이 가세했겠죠.”
“…….”
“손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까? 방금 제가 인내했다면, 저는 이 친구를 잃었습니다.”
“과장이 심하군. 아무리 헥토르라도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르진 않아. 고작 뺨을 후려친 게 전부이지 않나.”
“목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묻지요. 만약 단장님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큰 치욕을 입었는데, 주인이란 놈은 비굴하게 실실 웃기만 한다……. 단장님께선 그런 인물에게 진정으로 충성을 바칠 수 있습니까?”
“…….”
루크는 입을 닫았지만, 별개로 가슴에 작은 파문이 번지는 걸 느꼈다.
그에게는 드문 종류의 감각이었다.
“…음. 뭐, 별개로 단장님의 염려는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지요.”
이번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쪽의 체면을 세워 주는 듯한 말투가 어이가 없어서.
‘이래선 누가 훈계하는 건지.’
속으로 고개를 젓는데 루안이 말했다.
“더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시다면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래. 가 봐라.”
루크는 더 이상 붙잡을 구실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고, 루안 또한 마주 고개를 꾸벅인 다음 떠났다.
루크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았다.
‘…루안 배드니커.’
철혈공이 직접 루안을 호출했을 때,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긴 했지만 직접 대면하니 예상보다 더 놀랍다.
저놈이 원래 저런 성정이었나?
모른다.
루크는 딱히 루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물론 그 악명에 관해선 자주 듣긴 했지만, 루크는 어떤 이든 직접 마주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관념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이번이 첫 만남이라고 치고, 첫인상으로만 점수를 준다면…….
루안은 10점 만점에 최소 9점 이상이다.
‘여유가 되면 형님의 의견도 듣고 싶군.’
일단 배짱만큼은 마음에 들고, 아랫사람을 다스릴 만한 그릇도 갖췄다.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싹수가 보이는 자식은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물론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가능하다면 당분간 옆에 두고 지켜보고 싶은 녀석이다.
철혈기사단의 수습 기사로서-.
“음.”
너무 앞서간 생각이다.
루크는 고개를 털었다.
마음 같아선 루안과 좀 더 얘기를 나누며 알고 싶었지만 참았다.
좌우명이 절제인 사내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 * *
등이 따갑다.
아마도 루크가 노려보고 있는 모양이다.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은 저택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야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아르잔이 갑자기 물어왔다.
“이유라면 아까 루크 경 앞에서 말했잖아.”
“사람을 잃을 뻔했다고 하셨지요. 그건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도련님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참. 그랬지.”
“…가볍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아르잔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헥토르 도련님이 가문에서 가진 위치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일로 도련님께 앙심을 품고, 보복이라도 결심한다면-.”
“그럼 이번엔 나도 뒤통수나 뺨을 후려치는 걸로는 안 끝내겠지.”
나는 놀란 눈을 한 아르잔을 보았다.
“착각하지 마. 너를 위해 한 일이 아니라 가만히 있기엔 내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그랬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도 알고, 집사가 염려하는 바도 알아. 그리고 이 일의 후폭풍도 대충 예상이 가고.”
“…….”
“걱정 안 해도 돼. 다 생각이 있으니까.”
가만히 듣던 무신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연자여, 정말로 생각이 있는가?]
‘아뇨.’
있을 리가.
그래도 그냥 엿 같아서 한 대 팼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허어.]
‘후회는 안 합니다. 길게 보면 이게 맞는 선택이거든요.’
[무슨 뜻인가?]
‘본가에선 배드니커답게 행동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배드니커의 본가엔 사방으로 눈과 귀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제 것, 제 사람을 간수하지 못하는 꼴을 보였다간 원로회건, 가주건, 윗사람한테 빠르게 보고가 들어갈 테고…….
그것만으로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다는 뜻.
“그래서 집사는 어때?”
“네?”
“내가 헥토르의 뒤통수를 때리고, 뺨을 후려쳤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좋았어, 나빴어?”
아르잔이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도 돼. 여긴 듣는 사람도 없구만.”
“…조금 후련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씨익 웃었다.
“그럼 됐어. 얼굴은? 흉 지지는 않겠지?”
“입안이 살짝 찢어진 게 전부입니다.”
“안경은 좀 깨진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애초에 도수가 없는 물건이라서.”
이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아 아르잔을 보았다.
그러니까, 저 외눈 안경이 패션 안경이었다는 건가.
망설이던 아르잔이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됐어. 간지럽게.”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헥토르 도련님이라면 분명 이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딱히 그놈과의 분쟁을 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바로 직전 나와 갈등을 일으킨 헥토르보다 다른 녀석이 더 신경 쓰였다.
그 직전 나를 음습한 눈으로 보던 가르쉬아의 핏줄 말이다.
그놈 이름이 분명…….
* * *
방으로 돌아온 하리바는 즉시 가까이 있던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콰앙!
탁자는 썩은 나무로 만든 것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하리바는 그것만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죄다 박살 냈다.
그러는 도중에도 머릿속에선 옅은 금발을 가진 애송이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그 애송이가 주제도 모르고 다가섰던, 은발의 소녀 또한.
“…….”
난장판이 된 방 중심.
하리바는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확실히 해야 한다고.”
“확실히? 그럼 정말로 죽이자는 말이냐?”
어느새 문 앞에 와 있던 레이건이 대꾸했다.
“어찌 됐건 오늘은 최종 점검이었고, 진짜 가호식은 내일이다. 내일 루안 배드니커가 참석하지 못하면 되는 것이야.”
하리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죽이는 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 해결 방안이 살인만이 있는 건 아니야.”
레이건이 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아들아, 계략에 있어 살인은 하책 중의 하책이란 걸 왜 모른단 말이냐.”
“…….”
“중요한 건 그놈이 가호식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다. 가령, 스스로의 의지로 불참한다고 해도 상관없지.”
“무슨 뜻입니까?”
레이건의 눈가가 가라앉았다.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레이건은 자리에서 떠났다.
하리바는 레이건이 떠난 방문을 뚫어지게 보았다.
짧은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저자한테 내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어느새 호흡은 안정된 상태에서, 하리바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색 액체가 든 유리병이었다.
“…….”
유리병을 본 하리바의 눈에 망설임이 스쳤으나, 찰나였다.
퐁-.
하리바는 유리병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