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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35화 (35/172)

35화

그리고 나의 목욕 계획은 또 좌절됐다.

“루안……!”

본가 저택에 발을 들인 직후 어머니, 루시아와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금발을 찬란하게 휘날리며 달려왔다.

“자, 잠깐만요, 저 지금 거지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어머니 품에 안겼다.

깨끗한 드레스가 내 몸에 묻은 흙과 먼지로 더럽혀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정말.”

어머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아.’

어머니.

나의 하나뿐인 가족.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밤이 없다.

준비해 둔 말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어머니의 등을 두드리며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 * *

어머니와 재회하고, 드디어 염원하던 목욕까지 끝마친 뒤…….

나는 하인이 준비한 새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좀 살 만하네.’

묘하게 편한 옷의 감촉에 만족하며, 나는 어머니가 머무는 객실로 향했다.

어머니의 객실은 상당히 구석진 곳에 있었고, 문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두 명 서 있었다.

케이안과 아르잔이었다.

둘은 덤덤한 얼굴로 어떤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내가 오니 대화 소리가 툭 끊겼다.

“뭔 얘기 하고 있었어?”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서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정보 공유랄까요.”

“그래? 둘이 아는 사이였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으니 케이안이 대답했다.

“아르잔이 본가에 오고 얼마 안 됐을 무렵, 몇 번 수련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아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오랜만의 회포나 좀 풀고 있어. 난 어머니랑 얘기 좀 하게.”

“예.”

케이안과도 할 말이 좀 있지만 일단 미루고.

나는 둘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선 은은한 홍차 향이 났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기억 속 향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왔구나. 이리 앉으렴.”

“네.”

나는 허름한 방을 둘러보다가 어머니의 앞에 앉았다.

“홍차밖에 준비하지 못했는데 괜찮겠느냐?”

“물론이죠.”

다과와 어울리는 차가 있고, 그렇지 않은 차가 있는데 어머니의 차는 후자였다.

좋은 향과 은은한 온기, 깊은 맛까지.

차 한 잔만으로도 이미 완성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진짜 돌아왔구나.’

우습지만 찻잔을 입에 머금은 뒤 삼킨 다음에야, 나는 내가 회귀했다는 실감이 났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도 하다.

케이안이나 아르잔을 보았을 때나 산맥에서 기사 놈들의 본색을 목격했을 때, 마침내 보석수와 조우한 순간까지-.

나는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는 뜻이니.

“별일 없었느냐?”

“별일이요?”

“케이안 경에게 대략적인 사정은 들었다. 가주님의 부름으로 본가까지 오게 됐다지. 그 때문에 보석 산맥을 경유했고…….”

뜻밖에도 어머니는 내 행적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건 케이안의 정보력이 뛰어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소재 자체가 알기 쉬운 정보였던 걸까?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어머니는 보석 산맥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걱정하는 거겠지.

여기선 거짓말을 해서 안심시키는 것도 괜찮겠지만.

“일은 많았죠. 솔직히 위험한 상황도 많았고요.”

나는 그냥 솔직하게 털어놨다.

두 가지 근거가 있었는데, 첫째로는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는 이 정도 사실쯤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큼 강인한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

내 말을 듣고도 어머니는 딱히 반응 없이 홍차를 마셨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네가 고생이 많았다.”

“네.”

“못 본 사이에 부쩍 차분해졌는데?”

어머니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죽을 위기를 겪고 나면 정신적인 성장을 이룬다고들 말하지. 산맥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적지는 않았죠.”

“그래. 아르잔이 고생했겠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가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아르잔에 대해서도 알게 됐니?”

“평범한 집사는 아니던데요.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특별한 힘을 쓰는 모습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네가 씻을 동안 아르잔과 조금 얘기를 나눴는데, 그 아이는 당분간 너를 보좌하게 될 것이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어머니가 억지로 시킨 거예요?”

“내가 부탁한 건 맞지만, 억지로 시킨 건 아니다. 사실 본가에 있을 때부터 자주 이 얘길 꺼냈었는데, 그때마다 완고한 태도로 거절했었으니까.”

“…….”

“마침 네게 목숨의 빚도 졌다더구나. 그 빚을 갚을 때까지만이라도 섬기고 싶다던데.”

갑작스러운 말에 놀랐다.

“목숨의 빚이라니…….”

“틀리냐?”

“틀리진 않지만… 이쪽도 마찬가지라서요. 아르잔이 없었다면 저도 죽었을 겁니다. 서로를 구한 상황이랄까요.”

그러자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말하고 나서 아차 싶긴 했다.

이때의 루안이 할 말치고는 너무 성숙했기 때문이다.

“…….”

어머니는 한동안 가만히 시선만 보냈다.

여러모로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내가 변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는 사실이다. 어머니한텐 더욱 그렇고.

여러 핑계를 댄다면 지금 이 상황은 넘길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언제까지고 머저리 루안을 연기할 수는 없다.

그럴 바에 차라리 ‘죽을 고비를 넘기더니, 아들내미가 많이 바뀌었다.’ 정도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입에 담았다.

“어릴 때로 돌아왔구나.”

“…네?”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한번 더 물었다.

“어릴 때요?”

“그래. 자신감 넘치고 용감했던, 내가 가장 좋아하던 아들의 모습으로.”

“…….”

“가호식 전의 너는 항상 이랬는데, 기억이 나지 않느냐?”

이 말엔 나도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산에서의 일로 스스로가 성장하거나, 변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그저 내가 본성을 되찾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건…….”

나도 모르게 부정할 뻔했지만 참았다.

사람이 가장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게 ‘나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렸을 적부터 나를 쭉 지켜본 어머니의 말씀이다.

콩깍지가 좀 씐 걸 감안해도, 이쪽이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루안.”

“네.”

“가호가 전부는 아니다.”

회귀 전부터 자주 하셨던 말.

그러나 그때의 루안 배드니커에겐 결코 닿지 않았던 말.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네.”

어머니의 말은 진실이다.

가호 같은 게 없어도 얼마든지,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목표로 하는 데에 신의 가호 따위는 필요 없다.

“…진실로, 그러하다. 그것 때문에 네가 삶을 포기할 이유는 없어.”

하지만 어머니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진실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나는 곧 그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2차 가호식을 염려하시는 거구나.’

이번 가호식에서, 내가 또 하나의 가호도 받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내가 다시 한번 겪게 될 절망을 염려하시는 것이다.

“걱정 마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가호 없이도 가주님의 자식 중 누구보다 강해지겠습니다.”

“하하. 그러면 좋겠구나.”

물론 나의 최종 목표는 아버지인 철혈공마저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 말을 하면 아무리 어머니라도 나를 미친놈 취급할 게 뻔했다.

내가 씨익 웃으며 찻잔을 든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거라.”

어머니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케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어쩐지 평소와 달리 조급한 기색이 느껴졌다.

“말씀 나누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급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 무슨 일인데?”

케이안은 그답지 않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원로회에서 도련님을 호출하였습니다.”

* * *

배드니커의 본가 저택은 5층으로 이뤄져 있다.

1, 2층은 손님에게도 개방되어 있어서 사람이 북적북적하지만, 3층부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여기서부턴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예 낯선 곳은 아니다.

이 층엔 본가 주요 인물들의 방과 교실, 도서관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무가호 판정을 받기 전엔 몇 번 들렀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장소는, 그곳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장소다.

뚜벅-.

4층엔 나와 케이안의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3층에서도 사람과 마주칠 일은 드물었지만, 4층은 거기서 한 숟가락 더 뜬 느낌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쥐새끼 한 마리도 없는 느낌.

모종의 방음 설비까지 완비했는지, 아주 작은 소음조차 포착하기가 힘들었다.

꼭 별세계를 걷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누구와 마주치지도 않고, 말없이 케이안의 뒤를 얼마나 따랐을까.

문득 걸음을 멈춘 케이안이 말했다.

“이곳입니다.”

“…….”

나는 물끄러미 방문을 보았다.

문 한번 더럽게 크다.

무슨 무도회장의 입구라 해도 그러려니 할 정도.

아마 내부도 문만큼이나 넓을 거다.

‘오는 길에 방문을 거의 못 봤으니.’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방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엄청 크다는 것.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자중하며 문을 열었다.

벌컥-.

“…….”

문은 크기에 비해 수월하게 열렸다.

다만 열리는 그 순간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둡구만.’

전체적으로 캄캄한 장소다.

아마 커튼을 쳤거나 애초부터 창문이 없을 수도 있겠다.

저벅.

나는 대략 일고여덟 발자국 정도를 걷고서 멈췄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고, 그 벽의 위에 일단의 무리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왔는가.”

“루안 배드니커.”

마치 재판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벽 위에 앉아 있는 놈들.

방의 어둠이 너무 짙어서 얼굴은커녕 형체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

저자들이 바로 악명 높은 배드니커의 원로회다.

전체 인원은 11명이라고 들었는데, 수를 세어 보니 모두 출석하지는 않은 듯하다.

“무슨 일로 호출하셨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바는 있지만 모른 척 물어봤다.

가능성은 적지만, 방금 헥토르와 있었던 분쟁 때문일 수도 있고.

“네게 몇 가지 질문할 게 있어서다.”

“보석 산맥에서 있었던 일 말이다.”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고.

“너를 호위하는 데에 송곳니기사단 다섯을 보냈을 터.”

“그들은 어디 갔지?”

“왜 너만 복귀하게 됐나.”

“낱낱이 고하라.”

“산맥에서 있었던 일, 전부를.”

원로회란 놈들은 한 번에 말해도 될 걸 저들끼리 나눠 가며 지껄이는 특징이 있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들의 정체를 특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

이 음험한 놈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는 걸 누구보다 좋아했는데, 어쨌든 듣는 입장으로선 상당히 괴롭다.

얼굴도 잘 안 보이는 것들이, 모호한 목소리로 계속 말해 대는 상황이니.

“루안 배드니커.”

“왜 대답하지 않지?”

“…….”

언뜻 보면 위기로 보이는 이 상황에서, 나는 입술을 한번 가볍게 핥았다.

4층에 있는 이 방의 이름은 [재판의 방].

그리고 난 이 방의 비밀을 한 가지 알고 있다.

‘진위를 가리는 방.’

달리 말하면, 진실을 확정시킬 수 있는 방.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송곳니기사단의 단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원로회 늙은이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몇 명은 제 손으로 죽였죠.”

지금 이 상황은 내게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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