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갑자기 이런 소리를 내뱉은 이유란 별것 없다.
충격적인 발언일수록 상대의 호흡을 망가뜨리기 쉽고, 주도권을 가져오는 건 더 쉽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분위기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내게는 딱히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다.
잠시 멀뚱히 서 있자니, 원로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그들 전원이 암살자였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원로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늙은이들이 나의 무례를 지적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원래 기사단이었던 자들을 죽이고 그 흉내를 낸 건지, 애초부터 불온한 목적을 품고 배드니커에 입성한 건지, 도중에 변모한 건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놈들은 암살자 중에서도 특히 질이 나쁜 부류였죠.”
“…증거는 있나?”
“증거.”
나는 이 발언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들이 모든 참과 거짓을 간파할 수 있다면, ‘증거’ 같은 건 필요가 없을 테니까.
즉…….
- 재판의 방에 들어갔다고 쫄 필요는 없어! 어차피 그자들이 참과 거짓을 모두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 그것 말고도 제약이 더 있지.
- 오직 배드니커의 혈통에게만 적용하고, 그리 자주 쓸 수 있지도 않아.
전생에서, 내 떠버리 형제가 말한 내용은 일단 사실이란 뜻이다.
처음부터 믿기엔 워낙 허세를 많이 부렸던 놈이라서, 일단 내 식으로 한번 더 확인해 본 건데…….
“물론 있죠.”
“지금 갖고 있는가.”
“네.”
“보여라.”
말투 진짜 띠껍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그 말대로 했다.
품에서 단검 한 자루와 쪽지를 꺼낸 다음, 앞에 있는 탁자에 놓은 것이다.
그러자 천장에서 빛 한 줄기가 내려오더니 탁자 위를 비췄다.
“저 문양은 설마……!”
“하덴아이하르의 문양…….”
내 말에 원로회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이럴 수가.”
“육마왕六魔王의 하수인이 배드니커에 잠입했었단 말인가.”
“교단의 끄나풀이 어찌 여기까지-.”
마왕과 앙신은 같은 말이다.
그런데도 교단 놈들은 그들을 신이라 부르고, 위대한 가문은 마왕이라 부르기를 고집한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보수주의자일수록 그 끔찍한 존재들에게 신神이란 호칭을 붙이는 걸 과분하다 여기기 때문.
내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고…….
사실 나도 앙신에 관해서 깊게는 모른다.
접점도 없고, 관심도 없다.
애초에 육마왕이 아니라 오마왕五魔王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지.
“그 단검은 정말로 송곳니기사단에게서 회수한 것이냐?”
“그렇다니까요.”
“…….”
원로들이 침묵했다.
이번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의외로, 이들이 배신- 그 자체에는 크게 놀라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예 당황하지 않은 건 아니고.
‘그렇다면…….’
배신자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배후까지는 확실히 몰랐다-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 아닐까.
“…그게 전부인가?”
“암살자에게서 회수한 물건 말이다.”
“아뇨.”
그렇게 물어올 거라 생각했다.
“쪽지와 지도도 있습니다. 지도엔 산맥에 숨은 놈들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적혀 있고요.”
“지도라고?”
“보여 봐라.”
허?
‘이 새끼들이…….’
사람을 호구로 봐도 유분수지.
“제가 왜요?”
“뭐?”
“이건 제 물건입니다. 위대한 가문의 혈통으로서, 암흑 교단 놈들을 죽이고, 제 손으로 손에 넣은 전리품이요. 단검은 증거품으로서 제출한 거니 그렇다 쳐도 지도까지 공유할 의무는 없는데요.”
교단 거점에 관련된 정보가 얼마나 귀한데, 이걸 공짜로 먹으려 들어?
모르긴 몰라도 위대한 가문의 영웅 놈들에게 경매로 붙이면 어마어마한 값이 책정될 거다.
영웅이란 놈들은 대체적으로 실적에 미쳤거든.
“감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이곳이 어떤 자리인 줄 알고.”
“해명하는 자리요. 해명하는 중이고.”
나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제 해명은 끝났습니다만,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
잠깐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조금 의외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이렇게 나오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말이다.
‘역시 그렇게까지 쉽지는 않나.’
원로회.
대외적으로 바쁜 철혈공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배드니커를 이끄는 늙은 괴물들.
언뜻 권위적으로 보이는 저 모습 또한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명은 아직이다.”
“루안 배드니커, 너는 아직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을 해명하지 못했어.”
“뭡니까.”
“하덴아이하르의 하수인을 어떻게 처리한 거지?”
“네 실력으로는 불가능할 텐데.”
가장 껄끄러운 질문이 왔다.
물론 나로선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기도 하다.
재판의 방.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곳.
그렇다면…….
“수련하는 도중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쓰러뜨린 거죠.”
거짓말은 아니다.
물론 이 수련으로 얻은 진전이란 당연히 영산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지만…….
어찌 됐든 수련했다는 말도, 그 진전을 바탕으로 오셀을 죽인 것도 사실이다.
“…….”
아까와 같은 침묵.
그러나 나는 원로회 놈들이 묘하게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원했다.
이 방에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지금 내 말도 사실이란 걸 알 터.
만약 그냥 이딴 소리를 내뱉었다면 얼마나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밀건 이 꼰대들을 쉽게 납득시킬 수 없었을 거다.
“흥미롭군.”
그 순간 처음 듣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비교적 젊은 목소리다.
“하덴아이하르의 암살자들은 교단의 버러지 중에서도 특히 귀찮은 놈들이지. 현역 영웅이라고 해도 장소와 상황에 따라선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놈 몇몇을 네가 죽였다고?”
“예.”
그러자 희미한 조소가 들려왔다.
“나머지는 어떻게 됐나? 송곳니기사단은 모두 죽었다고 했잖나.”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같이 있던 동료가 처리했습니다.”
“역시 동행자가 있었군. 누구지?”
“아르잔입니다.”
“아르잔.”
본가의 원로라면 아르잔에 대해 알아도 이상할 건 없다.
어쩌면 나 이상으로 그 정체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 새끼는 누구야?’
갑자기 끼어든 녀석.
여태까지 상대한 원로와는 느낌이 다르다.
성가시다고 말해도 좋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군. 영악하구나, 루안 배드니커.”
“…….”
“아니. 그걸 넘어서, 너는 간악하다. 루안 배드니커.”
“왜죠.”
“우리가 가호식 전날에 급히 너를 호출한 이유를 알고 있나.”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이 대목이라면…….
“가호식 직전의 마지막 증명입니까?”
“그렇다. 그 때문에 너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겠지.”
“허세라뇨.”
“하덴아이하르의 수하를 죽였다는 그 헛소리 말이다.”
“…….”
원로들이 말을 이었다.
“산맥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잘 알겠다.”
“확실히 많은 위기를 겪었어.”
“하지만, 너는 꼭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타파한 것처럼 말하고 있군.”
“혼자 다 해먹은 건 아니지만, 제 몫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너는 그저 목숨만을 연명한 것뿐이다.”
“위기 상황을 해결한 건 모두 아르잔이었겠지.”
이것들 봐라?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아르잔한테 직접 물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웃기는 소리.”
“그녀는 과거 본가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재판의 방]의 효과를 아르잔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몰라도…….
이 방의 효능은 오직 배드니커의 혈통에게만 발휘한다.
이들에겐 아르잔이 하는 말의 진위를 확실히 판별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역겨운 점은, 너 스스로는 정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는 점이지.”
“가호 하나 받지 못한 배드니커의 무능아 주제에 말이다.”
그렇구만.
이제 대충 재판의 방이 어떤 시스템으로 발동하는지 알겠다.
이 방의 판별 시스템은 절대적이지 않다.
가령 거짓된 사실이라도, 입에 담는 놈이 진실이라고 믿으면 발동 안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원로회 놈들은 지금 나를 과대망상에 빠진 철부지로 생각하고 있다.
‘이해는 가는데.’
이 시점의 루안은 이 정도 취급을 받아도 싼 놈이었다.
나라도 안 믿을 거다.
그래. 이해는 가는데…….
속 긁는 소리를 연이어 들으니 슬슬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이럴 때면 이상하게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럼 뭐 어떡하라고요.”
“증명해라.”
“증명?”
“네가 정말 하덴아이하르의 암살자를 상대했다는 것을.”
“그러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싸워서 증명하면 될 일이지.”
“음.”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예상대로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상대는 우리가 준비하겠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교단의 암살자보다 강하진 않을 테니.”
“상관은 없는데, 지금은 제가 몸 상태가 좀 별로라서요.”
“몸 상태라…….”
어쩐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언제쯤을 원하지?”
“…넉넉하게 사흘 후쯤?”
아마 그때쯤이면 화백의 부작용이 완전히 사라졌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인데.
이제는 확실한 조소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당연히 농담 따먹기를 한 기억은 없어서 원로 놈들을 바라봤다.
“마지막까지 알량한 생각을 품는구나.”
“너는 지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도박하고 있다.”
도박?
“사흘 후라고? 아니겠지.”
“네가 노리는 건 내일 있을 가호식일 터.”
“그리고 생각했겠지.”
“그곳에서 새로운 가호를 받는다면, 우리가 준비한 자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허어.”
이 순간 나는 띠꺼운 것도 잊고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끼워 맞추기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었기 때문이다.
“넌 가호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배드니커를 능멸한 것에 대한 징계를 받게 되겠지.”
“제가 언제 배드니커를 능멸했습니까?”
“허위적 사실을 고하지 않았나.”
“적어도 배드니커의 혈통을 이었다면 거짓이라도 꺼내선 안 될 말이었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명심해라.”
“암흑 교단 토벌은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는 일이다.”
“이곳이 배드니커라서 다행이지, 바깥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면 가주님의 명예가 깎였을 터.”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고작 제 말 몇 마디로 깎일 만큼 가주님의 명예가 하잘것없습니까?”
“루안 배드니커, 지금 네가 가주님을…….”
나는 으르렁거리는 원로의 말을 끊었다.
“제가 가호식을 이용해서 상황을 반전시키려 꾀하고 있다. 재밌는 추측이네요. 그럼 그걸 뒤엎을 정도의 상대면 되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냐.”
“제가 아무리 좋은 가호를 받아도 이기기 힘든 상대를 준비하라고요.”
나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령 원로님들이 직접 상대해 주시든가.”
“…….”
삽시간에 주변이 침묵으로 잠겼다.
당연하지만 이들이 내 제안에 ‘그거 좋네!’ 하고 감탄했기 때문은 아니다.
저릿저릿, 피부가 따갑다.
늙은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살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어코 네놈이 선을 넘는구나.”
“이제 됐다. 증명하고 말 것도 없었군.”
“지금 이 자리에서, 너는 모든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징계를 내리시겠다? 가주님 허락도 없이, 철혈공의 직계 혈족에게 말입니까?”
“그래. 가주님이 계시지 않을 땐 우리가 그 대행을-.”
“재밌는 거짓말이군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주님은 지금 본가에 계시지 않습니까?”
“…….”
나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원로회, 그들 대부분이 돌처럼 굳었단 사실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가주님은 지금 본가를 비우셨다.”
“그 반대겠지요.”
철혈공의 권능을 알고 있다.
가령 어느 복도의 끝자락, 아무도 쓰지 않는 객실, 사람이 북적대는 식당, 연회가 열렸던 중앙 홀, 오는 길에 보았던 장미 정원,
‘아니…….’
마지막으로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나를 둘러싼 원로회, 그 너머였다.
처음부터 들었던 생각.
“가주님.”
나를 호출한 게, 정말로 원로회일까.
“여기 계시죠?”
“…….”
정적.
그리고.
“훌륭하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목소리만으로 전율했다.
움찔하던 원로회가 좌우로 갈라지고, 그 사이의 어둠이 일렁거렸다.
보이지 않는 선상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암막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존재가 서서히 그 꺼풀을 벗는 것 같은 광경이다.
그리고 나는 목격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붉은 눈동자.
“오랜만이구나.”
“…….”
배드니커의 가주이자 철혈공.
그리고 나의 아버지.
델락 C. 배드니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