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37화 (37/172)

37화

델락 C. 배드니커.

배드니커 가문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이자, 제국 최강을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이름.

이 남자가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세운 업적이란 한마디로 어마무시하다.

무슨 생후 수십 일 만에 걸음마를 떼고, 1살이 되기 전에 철검을 쥐었으며, 4살엔 맨손으로 오우거를 때려잡고…….

7살에 가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서적을 완독, 비전 검술을 익힌 다음, 10살의 나이에 독자적인 검술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12살엔 특례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 1년 동안 모든 커리큘럼을 마친 다음 졸업.

이후에도 델락은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 가다가 1차 가호식에서 무려 12개의 가호를 받는다.

다시 말하지만 12개다.

보통 3개의 가호를 받으면 유망주 소리를 듣고, 5개를 넘으면 천재란 소리를 듣는다. 7~8개부터는 역사를 거슬러도 손에 꼽을 정도다.

머리가 굼뜨거나, 애써 델락의 재능을 부정하던 자들도…….

바로 이 순간, 격이 다르단 걸 실감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건 2차 가호식 때 9개의 가호를 더 받았다는 것이다.

델락이 받은 가호가 무엇인지, 그 전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2차 가호식 이후 델락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았다.

적어도 외관은 그 나이대의 모습, 소년의 모습으로 멈춘 것이다.

하지만 강함의 추구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델락은 이듬해 가주 자리를 정식으로 계승 받고, 당시만 해도 굿스프링에 비하면 떨어지던 가문의 위치를 20년 만에 동등, 그 이상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델락이 특히 활약한 건 교단 토벌이었다.

설령 작은 단서라고 해도, 그것이 교단과 관련된 것이라면 끝까지 추적해서 그 뿌리를 뽑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건, 어떤 희생이 필요하건 개의치 않았다.

철혈공은 가주라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최선두에서 이교도를 척살했다.

황제가 그 공을 직접 치하하여 미들 네임을 하사했고, 가문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마침내 델락은 대공의 자리에 서게 됐고, 제국 대공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고 비정하다 하여…….

철혈공鐵血公이라 불리게 됐다.

* * *

[이 사내가 쿠세트의 후인인가…….]

웬만한 일이 아니면 딱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무신이, 철혈공을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대단한 무인이로군……. 아쉽구나. 육체만 있었다면 직접 무위를 겨뤄 봤을 텐데.]

직접 겨루고 싶다니?

무의 신이 무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가만히 철혈공을 보았다.

어쩐지 이 사내라면 그 정도 자격쯤은 갖춰야지 하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전생에서, 문자 그대로 내게 애증을 품게 만들었던 존재.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 끝내 그러지 못했던 사람.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기분이 들었는데… 여러모로 친부에게 느낄 감정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위화감은 저 작자의 단순히 어려 보이는 외견 때문만은 아니다.

나와 큰 나이 차이가 없어 보이는 외견.

저 모습 때문에 일각에선 그를 소년 공작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아마 철혈공의 모습이 노인이었어도, 괴물이었어도, 혹은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고 해도.

나는 저 사람에게서 부성을 느낄 수 없었을 것 같다.

“가주님.”

“지금 모습을 드러내시면…….”

원로들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는 게 보였다.

철혈공의 출현이 그들에게 있어도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괜찮네.”

철혈공은 그들의 호들갑을 한마디로 일축한 뒤 나를 보았다.

“루안.”

“예.”

“루안 배드니커.”

왜요, 라고. 습관처럼 대꾸할 뻔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 남자 앞에선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상태가 된다.

“말씀하시지요.”

“왜 내가 저택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 말투만 보면 아예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가호식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가주님께서 바쁘셔도 쉽게 외면할 수 없는 국가적 행사요.”

“…….”

“2주일 동안 쭉 머물지는 않더라도 실제 가호식 당일, 혹은 그 전날엔 저택에 머물지 않을까 예상했습니다.”

그러자 철혈공은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동자를 하며 물었다.

“그 말은 모두 진실인가?”

“실은 아닙니다.”

나는 철혈공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으로선 더 말씀드릴 게 없네요.”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철혈공은 대단히 눈치가 빨랐다.

“모두 나가 보게.”

“예? 하지만-.”

“…….”

철혈공은 재촉하지 않고 침묵했다.

원로회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살짝 숙인 다음 퇴장했다.

어쩐지 불만스러운 기색이 느껴지기는 했다.

애초에 전생에서도 철혈공과 원로회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철혈공에게 반박할 원로는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원로회의 기척은 방 안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때쯤 방 내부를 감싼 어둠도 많이 희미해졌는데, 은은한 조명을 켠 것처럼 주변이 밝아졌다.

“앉거라.”

어디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아까 단검과 쪽지를 올려 뒀던 탁자 위에 앉았다.

이러고 보니 턱이 낮았던 테이블은 그럭저럭 원형 의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진실은?”

“…….”

나는 대답에 앞서 철혈공을 눈에 담았다.

새삼스레 대단한 존재감이기는 하다.

전생의 내가 왜 철혈공 앞에선 찍소리도 못 했는지 잘 알겠다.

하지만 그때와는 좀 다른 점도 보였는데, 과거의 나는 이러한 분위기를 철혈공이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일부러 위압감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이건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레 발산하는 분위기다.

즉 철혈공에게 상대를 압박할 의도는 없다.

고작 그 사실만 깨달았을 뿐인데, 전생보단 마음이 가벼워졌다.

“혹시 저와 원로회 사이에 오갔던 대화는 모두 들으셨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암살자에 관한 얘기도 들으셨겠네요.”

“그렇다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

정정하겠다.

이자는 딱히 압박할 의도가 없어도, 자신의 심정에 따라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경지로 치면 의념意念의 극極에 다다른 것이었는데, 이건 영산에서 10년을 수행한 나조차 밟지 못한 단계다.

나는 괜히 뒷목을 주물럭거리며 긴장을 풀었다.

“배드니커에 쥐새끼가 있단 사실 말인데, 가주님께선 일전부터 알고 계셨던 게 아닙니까?”

“…….”

“하지만 그 사실을 공표하진 않으셨겠죠. 가문에서도 알고 있는 건 아마도 극소수일 테고, 그 상황에서 가주님은 스스로의 소재를 감췄을 겁니다. 종종 그러셨으니 딱히 의심을 사지도 않았을 테고요.”

사실 절반은 추측의 영역이었지만…….

그런 기색을 내비쳐 봤자 점수만 깎일 것 같아서 일부러 확신하는 투로 떠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본가에 쭉 머무시면서 쥐새끼의 행방을 찾으셨겠죠. 가호식은 본가를 외부에 개방하는 몇 안 되는 기회 중 하나입니다. 쥐새끼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침입할 가치가 있단 뜻인데-.”

“…….”

철혈공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얘기하는 도중에 턱을 괴는 자세로 바꾸기는 했다.

하지만 표정엔 희로애락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좋으니 반응 좀 해라.’

사실 이 추측은 모두 틀렸고, 그냥 재밌어 보여서 원로회 사이에 숨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나도 진실은 모르겠다.

이런 상대는 처음이라서 솔직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때 철혈공이 불쑥 말했다.

“대부분이 추측이군.”

“…그렇습니다만.”

“그래.”

철혈공이 나를 보며 다른 말을 꺼냈다.

“보석 산맥에 들렀다면.”

“예.”

“혹시 칼자크도 만났나?”

나는 살짝 놀랐다.

철혈공은 칼자크의 소재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감이다.”

“…….”

“정확히 말하면 육감六感이지.”

아. 가호인가.

“칼자크는 잘 지내더냐.”

나는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무슨 뜻이냐.”

“…어떻게 된 거냐면요.”

나는 보석 산맥에서 겪었던 일 대부분을 말했다.

암살자 놈들에게 쫓기고, 그 와중에 진입한 거대 동굴, 위기의 순간 나타난 칼자크와 이어지는 보석수 토벌… 그리고 마지막 순간 모습을 드러낸 제사장까지.

숨긴 건 하나.

무신에 관한 얘기뿐이다.

“…….”

얘기를 모두 들은 철혈공이 침묵했다.

“보석수를 토벌했다고.”

“네.”

철혈공이 잠깐 침묵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잘 알겠다. 이만 가보도록.”

“네?”

철혈공은 할 말이 끝난 사람처럼 입을 닫았다.

내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건지, 정말로 징계를 받게 되는 건지, 가호식 참석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내게서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

‘…….’

이걸 위기 상황을 넘겼다고 봐도 되는 걸까?

모른다.

우스운 점은, 철혈공의 시선이 거둬진 순간 나는 안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자리를 떠날 수 있단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그러한 안심이나 기쁨 이상으로…….

‘…….’

내 자존심은 진흙탕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어쩐지 이 자리에서, 지금 이대로 떠난다면 전생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케이안에게 징수당하지 않았고, 염화제일공을 익혔으며, 보석수까지 토벌했다.

무신과 만나고, 칠죄검을 손에 넣었고, 예전부터 재수 없던 헥토르 놈의 뒤통수까지 후려쳤다.

전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과다.

하지만…….

철혈공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지?

“아버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철혈공의 눈동자가 다시 내게로 향한다.

살기 한 점 담겨 있지 않은데 스산한 느낌이 든다.

내가 알기로 철혈공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수많은 자식 중에서도 오직 셋뿐이다.

실제로 나는 과거에, 단 한 번도 이 남자를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구태여 철혈공을 아버지라 불렀다.

“저랑 거래 하나 하시죠.”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철혈공이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해선,

문자 그대로 털끝만큼 남은 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으니까.

* * *

철혈공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 침묵을 유지할 동안 시선은 쭉 내게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압박감이 심상치 않았지만, 스승님을 떠올리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리고 철혈공이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자고.”

“예.”

“흠.”

사람에 따라 충분히 무례하다고 지적할 수 있는 발언이었으나…….

철혈공은 예의범절에 집착하는 유형은 아니다.

그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무슨 거래.”

내심 한숨이 나온다.

저 한마디를 듣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우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요. 배신자인 송곳니기사단, 그놈들 중에서 오셀은 나름 거물이었습니다.”

“거물?”

“네. 그놈한테서 손에 넣은 지도. 이걸 해석하면 산맥에 있는 교단의 근거지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철혈공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당연하다.

이 사내에게 가장 중요한 건 교단의 척살이다. 처형인이라는 살벌한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것.

“산맥에서 보았던 암살자의 수, 그리고 제사장의 존재. 이놈들이 산맥에 세운 근거지는 결코 작지 않을 겁니다. 주요 거점이라고 봐도 되겠죠.”

“음.”

나는 일단 지도를 다시 품속으로 넣었다.

“아버지는 이 길로 작은 소문을 하나 퍼뜨려 주십시오.”

“소문?”

“‘루안 배드니커’가 산맥에서 교단 암살자를 죽이고, 보석수를 토벌했다고.”

나는 손을 주억거리며 말했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

“아직 가문엔 교단의 끄나풀이 남아 있습니다. 놈들은 오셀 일행의 정체도 알고 있겠죠. 어쩌면 이 지도의 존재도요. 지도를 회수하기 위해서, 혹은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제게 접근할 겁니다.”

“글쎄. 주모자의 담이 아무리 커도, 감히 배드니커의 본가에서 허튼짓을 부릴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러지 않겠죠. 하지만 저는 루안 배드니커지 않습니까. 실질적으로 가문에서도 방생시켰다고 알려진, 망나니 막내아들.”

잠깐 우리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의외로 먼저 시선을 거둔 건 철혈공이었다.

“과연. 쓸 만한 함정이 되겠군. 그럼 너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나.”

나는 방에 있는 칠죄검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요”

“질문이라.”

잠깐 고민하던 철혈공이 말했다.

“좋아. 어떤 질문이건 내가 아는 것이라면 반드시 대답하마.”

“…….”

“별개로 가호식에 참가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물론 그 반대도 상관없고. 어떤 선택을 내리건, 가문에서 귀찮은 잡음은 나오지 않을 거다.”

한번 말한 건 반드시 지키는 사내다.

아마 앞으로 징수인 같은 가문의 관계자가 나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다.

원로회도 마찬가지고.

“가호식엔 참가할 생각입니다.”

이건 진심이다.

까놓고 말하면 궁금하다.

과연 회귀를 한 지금의 나도…….

여전히 한 개의 가호도 받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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