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뜻대로 하거라.”
철혈공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별개로 하나 경고하마. 교단의 암살자가 철저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본가도 너를 완벽히 지킬 수는 없다. 물론 너를 해한 자들은 결코 살아나갈 수 없을 테지만, 애초에 그들도 목숨을 온존할 생각은 없겠지.”
“그 정도는 감수해야 얻을 수 있는 성과 아닐까요.”
“…….”
물론 말을 이렇게 했지만, 나는 죽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암살자 놈들이 습격하더라도 목숨을 지킬 보험을 한두 개쯤은 갖출 생각이다.
그때 철혈공이 말했다.
“너.”
“예.”
“정신이 살짝 나갔구나.”
“…….”
이건 무슨 의미지?
내가 멍청히 두 눈을 깜박이는데,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호식이 끝나고 따로 일정은 있느냐.”
“…딱히 없습니다만.”
“그럼 이후 식사나 한 끼 하지.”
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입은 충실하게 대답했다.
“그, 럴까요?”
“음. 시간과 장소는 따로 사람을 보내 일러 주겠다.”
철혈공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나도 당황스러워서 붙잡았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아. 지도를 매각하고 싶다면 말해라. 값은 다른 곳보다 쳐줄 테니까.”
“아, 예.”
그리고 더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자취를 감췄다.
졸지에 나는 방에 홀로 남은 꼴이 됐다.
“…잘 풀린 거 맞겠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아까보단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일단은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 * *
마침내 가호식의 아침이 밝았다.
내겐 오랜만에 맞이하는 개운한 아침이기도 했다.
“역시 침대가 최고시다.”
나는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날씨 죽이네.
겨울바람이 조금 차긴 하지만, 햇볕도 따스한 편이고 무엇보다 공기가 맑았다.
숲 한가운데에 지어진 저택이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자연의 기도 충만하다.
이런 곳에서 운공한다면 좋은 성과가 있을 터.
그러니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것 자체가 무인에겐 막대한 보상이기도 한 셈이다.
나는 간단한 세면을 마친 다음 방을 나선 뒤,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어제저녁도 부족하게 먹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
‘본가 음식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
오랜만에 근사한 아침 식사를 할 생각에 군침이 싹 돌았다.
곧장 식당에 발을 들이니 아침 일찍부터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가호식이 진행되고 있는 기간엔, 식당에서 언제든 먹을 걸 배급받을 수 있다.
웬만하면 식사 시간에 맞춰 들러야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긴 하지만.
아무튼 음식은 육류, 야채, 어패류, 과일 가릴 것 없이 다양했는데, 나는 식판에 고기 위주로 척척 쌓은 다음 적당한 곳을 찾았다.
‘사람이 제법 많은데?’
슬쩍 둘러보니 대체로 내 또래였는데, 오늘 가호식에 참여할 녀석들이 대부분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최대한 사람이 적은 테이블에 골라 앉았는데.
“그렇게 고기만 먹으면 금방 돼지가 될걸.”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사각형 테이블의 끝자락에 앉은 녀석이었다.
“배드니커의 도련님께선 영양분이란 걸 모르나 봐.”
어제 강당에서 보았던… 은발인지 백발인지 애매한 머리카락을 가졌던 녀석.
피곤함을 덜어내고 보니 은발에 더 가까워 보이기는 하다.
“알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먹어?”
“1주일 동안 풀떼기만 먹었거든. 보충하는 셈이랄까.”
“뭐래.”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홱 돌린다.
나랑은 말 섞기도 싫은 것처럼 보이는데, 왜 말을 먼저 건 거야?
나는 포크로 쿡 찌른 소시지를 베어 먹으며 결론을 냈다.
말을 건 게 아니라 시비를 건 거군.
“있잖아.”
“뭐.”
“넌 왜 밥 먹을 때도 장갑을 끼고 있냐?”
“남이사 장갑을 끼고 먹건 모자를 쓰고 먹건 뭔 상관인데.”
그렇긴 한데 갑자기 시비 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너 있잖아.”
“또 뭐.”
“슬프게도 그 나이에 벌써 흰머리가 좀 많구나.”
“이건 은발이야, 멍청아.”
“내 눈엔 흰색으로 보이니까 앞으로는 널 흰둥이라고 부르겠어.”
“미친놈.”
“흰둥이.”
그러자 기가 찬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만 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내 앞에 털썩 앉더니 정수리를 불쑥 들이댔다.
“똑바로 봐! 이게 진짜 흰머리인지!”
나는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저리 치워. 음식에 머리카락 들어가잖아.”
“뭐? 지금 나한테 탈모가 있다는 거야?”
“탈모가 없어도 사람은 하루에 머리카락이 백 가닥씩은 빠져.”
“지, 진짜?”
실은 모른다.
아무튼 나는 머리카락이 아주 빼곡히 자라나 있는 정수리를 꾸욱 밀어냈다.
“그래서 흰둥이는 왜 어제부터 나한테 시비야?”
“재수 없는 얼굴을 보면 시비 거는 병이 있거든.”
“그래? 난 또 굿스프링 가문의 따님이라서 그런 줄 알았지.”
“……!”
내 대수롭지 않은 대꾸에 흰둥이가 움찔 놀랐다.
그러더니 눈빛을 바꾸며 말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그래.”
“설마 처음부터 모른 척한 건…….”
“그럴 리가 있나. 오는 길에 주워들은 거야.”
애초에 인상착의만으론 깨닫기 힘들겠다.
일반적으로 굿스프링의 자제는 봄날의 햇볕처럼 따뜻한 머리카락 색을 지니고 있는데, 이 녀석은 북풍한설이 쌩쌩 휘날리는 것처럼 차가운 인상이니.
“아무튼 이제 밥 먹을 거니까 말 걸지 마라.”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으니, 흰둥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솔직히 말하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은 무슨 생각에선지, 그 이후에 실제로 입을 닫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떠나지도 않았다.
밥은 다 먹은 것 같은데,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 앞에 계속 앉아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나는 밥을 계속 먹어 댔다.
두 그릇까지는 그러려니 하던 녀석이, 세 그릇부턴 당황, 네 그릇이 돼선 놀라움, 다섯 그릇째부턴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거기서 한 그릇을 더 먹은 다음 식사를 마쳤다.
“배에 거지라도 들었어?”
“거지면 이런 음식 구경도 못 하지.”
배드니커 본가의 음식은 아주 훌륭했다.
입맛이 까다로운 나도 과식을 할 정도.
나는 시원한 물을 들이켠 다음에야 흰둥이를 보았다.
“그래서 흰둥이는 할 말이 뭐야?”
“…나는 세렌 굿스프링이야.”
흰둥이는 갑작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굳이 마주 소개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라서 그렇다.
“세렌?”
“이제야 내가 누군 줄 알겠어? 전 약혼자님아.”
약혼자란 단어를 저런 얼굴로도 내뱉을 수 있구나.
그야 사랑과 애정을 담은 눈빛 같은 건 이쪽에서도 사양이긴 한데.
세렌은 한동안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야.”
“뭔데?”
“너, 오늘 가호식에 진짜로 참가하는 거야?”
내 가호식에 관심 가지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웬 한숨이셔. 너랑은 상관없잖아.”
“상관이 있으니까 이러고 있지. 만약 네가 이번에 가호를 받으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최악의 상황? 아.”
나는 세렌이 말하는 바를 쉽게 이해했다.
“우리 둘의 혼담이 부활할 수도 있다?”
“아예 머리가 굳은 건 아닌 것 같네.”
“으음.”
내 기억으로 과거 이 혼담은, 나의 무능이 탄로 난 이후에 확실히 엎어졌던 것 같다.
즉 내가 오늘 가호를 받는다면, 혼담 얘기가 부활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단 얘기.
“빌어먹을…….”
세렌은 세상의 종말을 엿들은 사람처럼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욕지거리까지 내뱉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잘 어울린다.
굿스프링이라면 제국 최고의 명문가에, 품위와 교양을 목숨보다 중히 여긴다는데…….
세렌에겐 딱히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랑 혼약하기 싫어?”
“그걸 말이라고… 아니.”
쏘아붙이려던 세렌이 나를 보더니 말했다.
“딱히 너라서 싫은 게 아냐. 그냥 혼약 자체가 싫은 거지.”
“왜.”
“그것까지 내가 말해 줘야 하나?”
이랬다가, 저랬다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나는 대충 그러려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 마. 만에 하나 가호가 생겨도 너랑 다시 혼약할 일은 없을 테니까.”
“왜.”
“그야…….”
그때 누군가 식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익숙한 낯짝이었는데, 다름 아닌 우리 배드니커의 차남 헥토르였다.
헥토르는 누군가를 찾는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를 찾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눈이 마주쳤고, 입가를 비튼 헥토르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여기 있었군, 루안 배드니커.”
“뭔 일이래요.”
“일? 있지. 내가 아무런 볼일도 없이 너 같은 쓰레기를 찾아올 것 같나?”
주변이 술렁거렸다.
안 그래도 헥토르는 배드니커의 차남으로서 이목을 끄는데, 발언의 수위까지 강하다.
그래도 어제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기다린 것 같은데, 지금의 헥토르는 사람이 많은 식당에서도 나를 모욕하고 있었다.
‘어제 일이 제법 충격적이기는 했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 아버지는 이 길로 작은 소문을 하나 퍼뜨려 주십시오.
- 루안 배드니커가 산맥에서 교단의 암살자를 죽이고, 보석수를 토벌했다고.
아직 하루도 안 됐는데.
아무래도 철혈공이 내 요구를 과하게 잘 들어준 것 같다.
“…….”
갑작스레 사이에 낀 세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난감한 얼굴이 됐다.
오히려 좋다.
나는 시선은 헥토르한테 고정한 채로 주변을 확인했다.
사람이 많은 식당,
교단의 끄나풀이 있다면, 어딘가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지 않을까.
“아침 댓바람부터 말이 심하시다.”
“심한 건 너지. 그래도 나는 너를 동생이라 여겼다. 한심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몇몇 부분은 동정할 부분이 있다고 여겼다고.”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동생으로 여겨?
다른 말은 몰라도 이건 개지랄이 맞다.
만약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놈의 머리가 돌아 버린 거고.
“하지만 너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도를 넘었다.”
헥토르가 손을 뻗어서 내 멱살을 낚아챘다.
앗, 하고 세렌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보석수를 토벌했다고? 네까짓 게?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헥토르는 어제 뺨을 맞았을 때보다 몇 배는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녀석이 자기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짜로 토벌했다니까요.”
“하. 증거는 있나? 보석수의 사체에서 건진 것 말이다.”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
“…나와 지금 농담하자는 거냐?”
그 순간 헥토르가 밀어내듯 멱살을 놓더니, 발을 세게 차올렸다.
제법 커다란 식탁이 뒤집히며, 얹어져 있던 그릇이나 컵 따위도 비산한다.
맞으면 좀 아플 것 같기는 하다.
꽈앙!
그러나 하늘을 날던 테이블은 다음 순간 수직으로 꺾이듯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물론 내가 한 게 아니다.
테이블 위에 장갑에 감싸진 여리여리한 손이 얹어져 있었다.
“집안싸움에 끼어들기는 싫은데, 좀 과하시군요.”
세렌이 짜증 섞인 얼굴로 헥토르를 보았다.
헥토르는 세렌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대로 무시한 채 다시 나를 노려봤다.
“어제는 집사였고, 오늘은 약혼자냐? 한심하군. 다음엔 누구냐. 네 어미한테 지켜 달라고 할 테냐?”
헥토르가 싸늘한 얼굴로 비웃은 순간이다.
“곧 가호식이 시작합니다! 어린 영웅들께선 모두 장미 정원으로 모여 주십시오!”
“…….”
헥토르가 진정하려는 듯 호흡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호식이 끝난 다음에, 네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겠다. 거절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죽는 것보단 팔다리가 죄다 박살이 나는 게 나을 테니까.”
“…….”
헥토르는 재수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그리 말한 다음 순식간에 식당을 떠났다.
“배드니커의 형제싸움이 정신 나간 수준이라고 듣긴 했는데.”
세렌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나와 헥토르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군. 형제간의 우애가 아주 돈독하잖아.”
“눈 삐었니?”
“비꼬는 거잖아, 멍청아!”
세렌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더니 입을 닫았다.
“…아무튼 너도 진짜 한심하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코앞에서 저런 모욕을 받았는데 찍소리도 못 하고.”
“…….”
“약자의 처세술이라고 치면 이해는 가지만, 도저히 그 철혈공의 자식이라고는 보이지 않네.”
세렌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힐긋 보더니 그대로 떠났다.
나는 그 둘의 뒷모습을 보다가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방금 테이블이 뒤집혔을 때 묻은 듯하다.
‘모욕.’
세렌의 말이 맞다.
헥토르가 내게 준 건 모욕이다.
하지만 화가 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물론 저놈이 어머니를 함부로 거론했을 때는 나라도 짜증이 났지만…….
‘…….’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식당이라는 개방된 장소.
수많은 명문가의 자제가 보는 앞에서… 형제에게 대놓고 모욕당하다가, 전 약혼자의 등 뒤에 숨어 보호받았다.
그야말로 등신, 머저리, 얼뜨기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꼬락서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궁금한 건…….
가문의 쥐새끼가 이 모습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슬슬 식당의 인파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함께 움직였다.
우선은 가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