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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39화 (39/172)

39화

가호식은 어제 잠깐 들렀던 강당에서 열린다고 한다.

본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지어진 건물인데, 행사에 쓰기에 딱 적합한 곳이다.

거대한 무대에, 무수한 좌석까지 준비된 장소니까.

1층은 물론이고 2층이나 3층, 4층에서도 무대를 구경할 수 있는 구조라서 마치 커다란 극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도帝都엔 이런 건물이 많다던데.’

아무튼 어제보단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둑해서,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영도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사로 보이는 자가 직접 안내를 해줬다.

참고로 영도英徒는 어린 영웅을 이르는 말이다.

단순히 가호를 많이 받거나, 성년에 이르렀다고 이 칭호를 뗄 수 있는 건 아니다.

위대한 가문에서 한 명의 영웅으로 인정받는 건 또 전혀 다른 문제니.

기사의 안내에 따라 단상 뒤쪽으로 이동했다.

단순히 대기를 위해 기다리는 장소치고는 지나치게 넓은 공간이 있었다.

탁자와 의자는 물론이고, 간단한 요깃거리까지 준비돼 있다.

‘벌써 무리 지은 놈들이 있네.’

영도 놈들은 친한 자들끼리 앉아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배드니커의 본가에서 최소 2주가량을 머물렀을 테니.

어쨌든 가장 큰 무리는 황자의 무리와 헥토르의 무리였다.

이놈들 주위엔 개새끼들이 바글바글했는데, 물론 진짜 짐승을 말하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대귀족과 안면을 트기 위해 아첨하는 기회주의자들.

귀나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분명 살랑살랑 흔들렸을 게 분명하다.

의외로 세렌은 혼자 앉아 있었다.

“우선 영도 전원이 단상에 오르신 다음 개회식을 진행할 것입니다. 이후엔 배드니커 가주 대리의 개회식 선언과 황자 전하의 축사, 가주님들의 말씀 이후에…….”

국가적 행사라 그런지 귀찮은 의례가 많다.

가장 끔찍한 건 꼼짝없이 그 모든 일정에 참석해야 하는 나고.

운공으로 시간이라도 때우고 싶지만…….

암살자 놈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선 좀 그렇지.

영도들이 모두 모이자, 기사의 안내에 따라 단상 위로 올라섰다.

어느새 꽉 채워져 있던 좌석에선 절제된 갈채가 울렸다.

‘저기 앉은 놈들이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이란 건가.’

그때 우리가 걸어 올라온 곳과 반대 방향에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 대리인 아사드입니다. 우선 오늘 이 자리를 채워 주신 귀빈들께…….”

갑작스러운 거물의 등장이다.

아사드.

은둔자, 배드니커의 수호자, 잠룡.

그러나 세간엔 대마법사라는 이름으로 가장 유명한 사내다.

겉모습은 말쑥한 인상의 청년이지만 수백 년 전부터 쭉 배드니커를 지킨 전설적, 역사적인 인물이며 그 원로회조차 아사드 앞에선 존중과 경의를 표한다.

아사드는 대외적으로 철혈공의 오른팔로 널리 알려졌으나.

딱히 그 점이 아니더라도 가주 대리란 신분을 행사하는 데 아무도 불만을 낼 수 없는 존재다.

[호오… 저 사내도 제법…….]

무신이 또 관심을 드러냈다.

무인이건 마법사이건, 강하기만 하면 호승심이 들끓나 보다.

아무튼 아사드의 대략적인 개회식 선언이 끝나니, 황자란 놈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또 뭐라 지껄여댔다.

그 이후 가주 놈들이 준비한 지루한 말까지 들은 다음에야, 아사드가 선언했다.

“그럼 지금부터 가호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영도들은 뒷무대로 다시 돌아와서 대기했는데, 방금과 달리 대화 소리는 거의 사라졌다.

긴장, 흥분, 기대, 초조함, 약간의 두려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한데 섞이는 게 느껴졌다.

풋풋한 반응이다.

‘오늘이 바로 내 인생의 분기점이다!’

아마 여기 있는 놈들 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지 않을까?

“트라이온가의 랜돌프. 단상으로.”

“예, 옙!”

기합이 잔뜩 든 녀석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기념할 만한 첫 순서라서, 대기실에 있던 녀석들의 시선도 죄다 쏠렸다.

랜돌프는 삐뚤삐뚤한 걸음으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트라이온의 랜돌프입니다.”

짤막한 자기소개와 함께 고개를 숙이니, 짧은 갈채가 울렸다.

랜돌프는 심호흡하며, 단상 위에 있는 거울을 노려봤다.

[바알의 거울]이다.

제국이 떠받드는 72신.

그 필두의 이름을 딴 거울이니만큼, 평범한 거울은 당연히 아니다.

“…….”

거울 앞에 선 랜돌프가 그곳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거울에 호수처럼 파문이 번지더니, 랜돌프의 몸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아…….”

아마 이 광경을 처음 본 듯한 어느 귀족이 탄성을 내뱉었다.

바알의 거울은 신기神器다.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신의 힘을 빌리거나, 직접 대면하여 소통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일시적으로 신들과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위대한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붙긴 하지만.’

지금 랜돌프는 어떤 곳을 걷고 있고, 어떤 신을 만났을까.

모른다.

나도 랜돌프처럼 거울 내부로 진입하기는 했지만, 신은커녕 그 그림자도 보지 못했으니까.

쭉 캄캄한 공간만을 걷다가 그대로 바깥으로 나왔다.

듣기로 사람에 따라 마주하는 풍경도 천차만별이라는 듯하다.

스으-.

랜돌프가 거울 속으로 사라진 직후…….

거울 주변에서 빛줄기 같은 게 흘러나오더니, 그 위쪽에서 형체를 이뤘다.

[1]

저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는 다 알 거다.

부여받은 가호의 수.

그때쯤 랜돌프가 거울에서 빠져나왔다.

“-아.”

랜돌프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거울 위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약간 미묘한 표정을 했는데, 아무래도 아쉬움이 큰 것 같다.

물론 가호가 하나인 건 아쉬운 일이 맞지만, 가호의 종류에 따라선 모르는 일이다.

단 한 개의 가호로 명성을 떨친 영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단 구경하던 놈들도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는 분위기다.

‘그래도 진행이 빠르긴 하네.’

느릿느릿하게 진행하면 날이 샐 테니 당연한가?

슬쩍 둘러보니, 오늘 가호식에 참석하는 영도만 50명은 되는 듯했다.

[2]

[1]

[1]

[3]

아무튼 거울 위의 숫자는 거의 1에서 2 사이를 오갔다.

1이 보이면 건조한 갈채가,

2가 보이면 조금 격양된 갈채가 울렸고,

3이 보이면 여기저기서 감탄이 나온다.

“굿스프링가의 세렌, 단상으로.”

그때쯤 내 전 약혼자의 이름이 불렸다.

세렌은 고상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상 위로 향하던 도중, 왠지 모르겠지만 나를 힐끗 눈에 담기도 했다.

‘저 녀석은 이번이 첫 가호식인가?’

아마도 그럴 거다.

올해 초에 있던 가호식에선 못 봤으니.

세렌이 단상 위에 오르니, 그것만으로도 좌석에선 작은 속삭임이 파문처럼 번졌다.

이번 가호식에 참가한 유일한 굿스프링의 혈통이니 당연하다.

세렌은 그들의 시선을 흘리며 도도하게 거울 앞에 섰고, 짤막한 자기소개를 마친 뒤 곧바로 거울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직후, 거울에서 빛줄기가 방출됐다.

구경하던 놈들이 감탄했다.

거울에서 폭사되는 빛무리의 수, 기세, 밝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6]

“와……!”

누군가 탄성을 내질렀다.

점잖은 척하던 귀족들도 이번엔 소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만하다.

여태껏 제일 많이 받았던 녀석의 가호가 네 개였으니까.

“흠.”

세렌은 도도한 기세로 허리에 손을 얹었지만, 아직 애송이라 그런지 표정 연기가 어설펐다.

뿌듯해하는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것.

잠시 후, 뒷무대로 돌아온 세렌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잘해 봐. 내 기록은 못 넘겠지만.”

싸가지 하고는.

세렌은 나 빼고도 주변의 주목을 독차지했는데, 그 시선엔 헥토르는 물론이고 황자까지 있었다.

헥토르는 이번이 2차 가호식이다.

그리고 내 기억대로라면, 저놈이 1차 가호식 때 받은 가호는 5개.

‘졌구만.’

그리 생각하며 혼자 낄낄 웃는데, 헥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헥토르의 입가에 차가운 호선이 그려진 순간, 기사가 말했다.

“헥토르 도련님, 올라가시면 됩니다.”

헥토르가 내게서 시선을 떼고 올라갔다.

나는 무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일반적으로 2차 가호식은 1차보다 받는 가호의 수가 적다.

아마도 헥토르는 한두 개쯤 되는 가호를 더 받게 될 거다.

헥토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에 섰다. 방금 내게 보인 미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

확실히 몇 년 더 헛산 건 아닌지, 세렌보다는 속을 감추는 게 능숙해 보였다.

‘설마?’

나는 순간적으로 헥토르를 의심해 봤지만, 철혈공을 거의 광적으로 숭배하는 녀석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

낮지만, 없지는 않다.

짝짝짝-.

그때쯤 박수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헥토르의 가호식이 끝난 모양이다.

이 녀석이 받은 가호는 총 세 개.

2차 가호식임을 감안하면 좋은 성적이다.

“배드니커가의 루안, 단상으로.”

나는 내 이름을 부른 기사를 보았다.

분명 배드니커의 기사일 텐데 누구는 헥토르 도련님이고, 누구는 배드니커가의 루안이다.

게다가 헥토르 바로 다음이 하필 나라니, 딱히 순서를 가문끼리 묶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를 악의가 느껴진다.

나는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

단상을 향하는 내게 여러 시선이 꽂혔다.

호기심, 조소, 경멸, 혐오, 약간의 동정?

그나마 영도들의 시선엔 약간의 자제심이 있었는데, 단상 위로 올라가니 노골적인 비웃음이 훨씬 더 심해졌다.

‘헥토르도 헥토르지만…….’

진짜 주모자가 있다면 아마 저 귀족들 사이에 숨어 있지 않을까?

“…….”

거울 앞에 서니, 이것은 내가 아닌 전혀 다른 광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이 휘몰아치는 것 같다.

무언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는 있긴 한데, 형상이 뚜렷하게 없는.

어쨌든 나는 망설임 없이 거울로 손을 집어넣었다. 맞닿은 부분에서 왠지 모를 상쾌한 감촉이 들었고…….

쑤욱!

다음 순간, 나는 완전히 거울 내부로 발을 들였다.

“음.”

지독할 만큼 캄캄한 장소다.

빛 한 점 없는 장소였지만, 왠지 모르게 나 자신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어둠이 아니라, 검은색 벽면 사이에 둘러싸인 느낌이랄까?

‘지난번이랑 비슷한데?’

그럼 이번에도 내 가호는 제로일까?

의문과 함께 계속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깨달은 점.

‘저번보단 확실히 길구만.’

몇 분을 걸었는데도 어둠이 끝나지 않았던 것.

시간의 흐름도 바깥과는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의문이 든 순간이었다.

[72위位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

이건가?

거울 속에서 들을 수 있다는 ‘신의 목소리’.

얼떨떨한 기분이다.

이 무기질적인 목소리를, 전생에선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위位가 흥미를 가집니다.]

[대다수의 위位가 당신에게 가호를 하사할 것을 원합니다.]

게다가 상황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72위位는 제국이 떠받드는 신들이며.

[위대한 가문]의 후예에게 집적적인 가호를 내려다 주는 존재기도 하다.

[1위位 바알이 당신에게 흥미를 가집니다.]

바알?

72신의 필두인 바알이 내게 흥미를 가졌다고?

그때였다.

[후견좌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후견좌는 또 뭐야?

[천하제일인 백노광이 1위位 바알을 노려봅니다.]

헉.

[네놈은 뭐 하는 개새끼인데 내 제자한테 껄떡대냐고 물어봅니다.]

[바알이 분노를 터뜨립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스승님을 화나게 해선 안 되는데.

[백노광이 살기를 발산합니다.]

[그 눈깔을 뽑아다 아가리에다 장식하기 전에 내리깔 것을 권합니다.]

[…….]

[…….]

[바알이 눈을 깝니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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