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내가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강풍이 휘몰아쳤다.
휘오오오-.
이 바람은 주변의 어둠, 그러니까 내가 단순히 검은색 벽이라고 생각한 공간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는데.
“아…….”
그 직후, 나는 내가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바위산,
기묘하게 주변을 어지럽히는 안개,
뿌연 하늘.
…내가, 10년을 머물렀던 장소.
지금의 내겐 또 하나의 고향과 다름없는 곳.
영산靈山.
그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누각에.
“…스승님?”
스승님이 앉아 있었다.
* * *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심정이 돼서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
“왜 부르냐.”
“…….”
권태로운 목소리에 나는 살짝 주춤했으나.
곧 의심이 들었다.
“정말 스승님이신-.”
따악!
“악!”
나는 머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어느새 스승님의 손에는 비쩍 마른 고목이 쥐어져 있었다.
저것도 익숙하다.
영산에 있을 적, 내 머리를 무수하게 후려쳤던 나무 막대기다.
“막내야.”
“예……?”
“못 본 사이에 멍청해졌구나.”
내가 말문이 막힌 사이, 스승님의 느긋한 어조가 이어졌다.
“정말 스승님이냐고? 당연히 나지. 애초에 이 천하제일인 백노광을 흉내 낼 수 있는 존재는 모든 천하를 통틀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이 오만방자한 말투는 분명히 스승님이 맞다.
사실 정수리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머리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바보 같은 제자 놈에게 조언을 주기 위해서 부득이 이런 방식을 취했다.”
“조언이요?”
“첫째 말이다.”
“…….”
대사형의 얘기에 나는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안 그래도 그 건에 관해선 여쭤볼 말이 많습니다. 대사형을 잡아 오라면서 저를 과거로 보낸 이유가 뭡니까? 어렸을 때부터 착실히 성장하라는 뜻이 맞습니까? 그리고 잊힌 시대는 또 뭐고, 이 세상의 무신이란 존재가 스승님을 아는 것 같던데 이게 대체-.”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서, 나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스승님은 찬찬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옅게 웃었다.
스승님은 누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로 벼랑 끝을 향해 한 발자국씩 걸어갔다.
나는 말을 멈추고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고.
잠시 후 우리는 영산의 꼭대기에서 안개투성이 세상을 바라봤다.
“그래서 요즘 어떠냐.”
“…….”
스승님의 질문은 종종 많은 뜻을 내포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런 것 같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미 전생의 너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을 터.”
“…….”
“고금제일공은 너의 몸에 확실히 자리 잡았으며, 중간에 기연도 만났더구나.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그럭저럭 겪었고.”
분명 잔잔한 어조였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왠지 모르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님- 천하제일인 백노광이 이런 어조로 말할 때가 어떤 때인지.
“지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
스승님은 제자를 책망할 때야말로 오히려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 사실에 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
“알고 있다. 결코 게으르게 보내진 않았지. 하지만 이 스승이 묻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알고 있을 텐데.”
“…….”
“그곳에서 보낸 한 달이 영산에서의 한 달보다 가치가 있었는가. 그 시간이 앞으로의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하는가. 사실 이러한 의문은 답을 내기 난해하지.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순히 할 말을 아끼는 게 아니라, 정말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막내야.”
“…예.”
“궁금한 게 많을 것이야. 지금 네가 품고 있는 의문 중 가벼운 건 하나도 없으니까.”
“…….”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면 내가, 이 순간,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스승님의 투명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방심하지 마라.”
방심한 적 없다.
적어도 이 순간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그리고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고.
…정말로 그런가?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삶이 너무 쉽다고, 모든 게 간단하다고, 가슴속 어딘가엔 그런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나.
물론 나는 몇 번이나 되는 죽을 위기를 겪었고, 과거에서 보낸 한 달의 시간은 충분히 굵직했다.
하지만 스승님이 말하는 건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그 모든 일을 해결하며,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싹튼 안일함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어느새 나를 보고 있는 스승님이 어깨를 두드렸다.
“단순히 너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과거로 보낸 것이 아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역행逆行은 나로서도 귀찮은 일이거든. 네가 속한 천하天下를 좀 더 주의 깊게 주시하도록. 하나 조언하자면, 너는 이미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툭툭, 주름진 손이 어깨에 맞닿은 순간 신기하게 육체의 피로가 희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최소 이틀은 더 지속됐어야 할 근육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이때쯤 주변 풍경이 다시 흐릿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강풍과 함께 사라진 어둠이 다시금 주변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딱히 거북함 없이, 내 스스로의 몸뚱이도 어둠에 잠겨 갔다.
“명심해라, 막내야.”
그 사이로 스승님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이 만남이 없었다면, 너는 한 달 뒤에 죽었다.”
* * *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분명 정신을 한차례 잃었다가 다시 차린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맑았다.
“…….”
“…….”
여전히 나는 단상 위에 서 있었는데, 그 사실을 늦게 깨달은 이유는…….
주변이 침묵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연자여, 방금 설마…….]
무신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술렁-.
주변에서 작은 소란이 파문처럼 번졌다.
앉아 있는 귀족 놈들이 무언가 당황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그제야 이것들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내 뒤쪽을 향하고 있단 걸 깨닫는다.
나도 뒤를 돌아서 거울을 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울 위에 있는 숫자를.
[1]
그렇다.
나는 가호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뭔 가호야?’
딱히 스스로에게서 달라진 점을 느끼지는 못한 상황.
아무튼 아직 가호를 받을 놈들이 남아 있어서, 나는 단상을 내려갔다.
자리로 가서 앉은 다음,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하나씩 떠올렸다.
헛것을 봤거나 꿈을 꿨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방금 내가 목격한 건 정말로 스승님이 맞고, 그 조언은 내가 깊게 새겨들어야 할 것이 맞다.
‘이 세상에 나를 보낸 이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궁금한 게 생겼는데 물어볼 놈이 마땅찮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하나뿐인 친구에게 물어봤다.
“친구야, 뭐 좀 물어보자.”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세렌의 인상이 썩어갔다.
“친구라고? 머리가 어떻게 됐어? [머저리의 가호]라도 받으셨나?”
“그럼 약혼자님이라고 부를까?”
“…….”
빈정거리던 세렌은 이 말에 입을 꾹 닫더니 말했다.
“뭔데.”
“앙신, 아니. 마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누굴 바보로 아나. [위대한 가문]의 혈통이라면 젖먹이 때부터 듣는 놈들이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내가 기억이 좀 긴가민가해서 그런데, 그 마왕 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 좀 해주라.”
“…말해 봐.”
그리고 나는 마왕의 이름을 한 명씩 이름을 담았다.
핏빛 달의 마왕 하덴아이하르.
녹색 혀의 마왕 탕타타.
금빛 뿔의 마왕 킨가로드투스.
흑색 늪의 마왕 아홉.
그리고 최악의 앙신이자 제국 최대의 위협, 동시에 유일한 대악마라고 불리는 마왕.
대재大災 베히모스.
“…….”
나는 마왕의 이름을 모두 나열한 다음 세렌을 보았다.
세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너도 참 희한하다.”
“뭐가.”
“탕타타 같은 마이너한 마왕도 알면서 가장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무채색의 마왕은 왜 몰라?”
세렌의 말을 들으며.
나는 원로회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위화감을 되새기고 있었다.
- 이럴 수가.
- 육마왕의 하수인이 배드니커에 잠입했었단 말인가.
육마왕이란 단어에서 느꼈던 위화감.
- 사실 나도 앙신에 관해서 깊게는 모른다.
- 접점도 없고, 관심도 없다.
- 애초에 육마왕이 아니라 오마왕五魔王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지.
그때 떠올린 생각.
“…무채색의 마왕은 이름이 뭔데.”
내가 물었고.
“하루.”
세렌이 대답했다.
나는 한숨이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하루.
제일무극검第一武極劍 하루何婁.
그건 고금제일인 백노광의 첫 번째 제자, 대사형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