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러니까 진실은 단순했다.
원래 오마왕이었단 자들이, 왠지 모르지만 한 명 더 늘어나서 육마왕이 됐고…….
그 새로운 자리를 꿰찬 것이 바로 대사형이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내가 오기에 앞서 대사형이 먼저 이 세상에 온 걸까?
아니면 사실 이곳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라 ‘나의 세상과 아주 흡사한, 또 다른 세상’이었던 걸까.
이 사실과 ‘잊힌 시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무신님도 아까 스승님을 보았습니까?’
[…역시 백노광을 만난 것인가.]
역시?
[나는 보지 못했네. 직전까지 잠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역시라고 하신 겁니까?’
[느껴졌으니까.]
‘네?’
[…….]
무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잠든 건 아니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복잡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고…….
“…이상으로, 가호식을 마치겠습니다.”
새로운 의문을 남겨 둔 채 가호식이 끝났다.
* * *
가호식이 끝난 다음엔 마지막 연회만 남았는데, 1층 홀은 물론이고 장미 정원에까지 테이블이 배치된다.
마지막이니만큼 가장 성대한 규모의 연회가 열리는 것이다.
날이 저물었지만, 정원은 밝다.
딱히 달이 밝은 밤은 아니었고, 단순히 주변에 조명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운 무공의 탓일까.
나는 인공적인 불빛은 좋아하지 않아서, 조명이 거의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 있었다.
생각할 게 많아서 방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이 연회엔 영도들의 참석이 강제된다.
오늘의 주인공들이니 당연한가.
‘그래도 밥은 맛있네.’
대충 먹을 걸 입에 쑤셔 넣고 있자니, 낯익은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루안, 여기 있었구나!”
어머니였다.
양쪽에는 아르잔과 케이안을 대동한 채였는데, 언뜻 봐도 가슴이 든든해지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구석진 곳에 있었느냐? 한참을 찾았잖아.”
평소와 달리 정감 있는 말투가 섞여 있다.
어머니는 평정심이 흐트러졌을 때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고는 했는데, 실제로 조금 흥분한 기색이었다.
“조용해서 좋잖아요. 그보다 무슨 일 있어요?”
“얘는, 당연히 축하해 주러 왔지!”
“축하요?”
“가호를 받았잖아!”
나는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어머니를 보며 웃었다.
“그렇죠.”
“정말 다행이구나!”
“그래 봤자 한 갠데요.”
“단 하나의 가호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어미의 고향에 있는 발터 경이나 최강의 레인저라고 불리는 늪지대의 하이드, 제국 기사단장 중 하나인 강철검 에리히 경도…….”
나는 어머니의 말을 경청하고, 호응하며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조금 진정한 어머니가 물을 한 잔 마시더니 말했다.
“이 어미가 너무 흥분했구나. 그래서 루안, 어떤 가호를 받았느냐?”
“모릅니다.”
“응?”
“아직 잘 모르겠어요.”
“…….”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이 어떤 가호를 받았는지 모른다.
원래는 받는 즉시 스스로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 내게 그런 감각은 없었다.
“그…….”
어머니는 잠깐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였으나,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런 경우는… 처음 듣지만, 음. 너무 엄청난 가호라서 소화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걸 수도…….”
“괜찮아요, 어머니. 어차피 가호는 저한테는 덤이니까요.”
“…그래?”
“아무튼 당분간은 이 사실을 감출 생각입니다.”
딱히 가호를 감추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철혈공만 해도 총 21개의 가호 중에서 확실히 밝혀진 건 10개도 되지 않는다.
물론 숨길 수 없는 가호도 있지만, 딱히 감추는 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란 뜻.
“그래. 그러는 편이 좋겠구나.”
어머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색을 보니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먼저 제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루안, 잠깐 이리 좀 와보렴.”
“왜요. 사과주스라도 있어요?”
참고로 사과주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다.
“저쪽에 대사범들이 모여 있더구나.”
대사범?
나는 힐끗 어머니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다른 곳과 달리 사람이 북적북적한 곳이 있다.
“10명의 대사범 중 8명이 참석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저들도 영도들의 수준이 보고 싶었을 테지.”
어머니가 신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는 게 어떠냐? 너도 이제 가호를 받았으니 어엿한 영웅인데.”
“전 괜찮아요.”
“왜?”
잠깐 대답이 궁색해졌다가, 곧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았다.
“도검선생이 없잖아요. 저는 그분이 아니면 싫습니다.”
“아… 너는 칼자크 경을 가장 좋아했었지.”
어머니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서라도 가볼 요량인 듯하다.
“…….”
나는 케이안과 아르잔을 보며 턱짓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 둘이 있다면 귀찮은 일이 꼬이진 않겠지.
홀로 남은 나는 적당히 정원을 구경하며 간간이 마실 걸로 입만 축였다.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가호식의 공식적인 일정은 오늘로 끝이다.
선택에 따라 배드니커의 본가에 더 머물며, 가호의 사용법 같은 수련을 더 받을 수도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선택이다.
실제로 귀환하는 자와 남는 자의 비율은 정확히 반반으로 나뉜다고 들었다.
즉 나를 죽이려던 주모자가 있다면, 이 시점에서 어떤 식의 행동이라도 보여야 한다.
그놈으로선 내가 본가에 남을 건지, 별가로 귀환할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녀석이 시야에 언뜻 비췄다가 사라졌다.
‘응?’
어쩐지 수상한 기색이라 한동안 정원 너머를 노려봤는데…….
그 순간 다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좀 더 명확히 봤다.
그러니까 푹 눌러쓴 후드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까지.
‘백발…이 아니라.“
은발.
흔하지 않은 머리카락에 후드 아래의 체형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세렌 굿스프링.
‘저 녀석, 몸이 안 좋다며 연회에 불참했었는데.’
한 번에 많은 가호를 받은 경우, 종종 몸과 정신의 부담이 심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방에서 쉬고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마음이 바뀌었다거나, 몸 상태가 호전됐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다시 보니 세렌은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으니까.
어찌나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나도 구석진 곳에서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있었다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저 녀석으로서도 이런 외진 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한 모양인데…….
잠깐 바라보고 있는 순간, 세렌의 모습이 후원 너머의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사실 나의 용의자 중엔 세렌도 포함되어 있다.
저 녀석에게 악의를 느끼지 못한 것과 별개로, 세렌의 가문이 굿스프링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배드니커의 영원한 라이벌 말이다.
아무튼 세렌은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가호식에서 저 녀석보다 많은 가호를 받은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후원에 저 녀석이 갈 일이 없는데.’
그래도 한때 본가에 머물렀던 만큼 이곳의 대략적인 지형은 알고 있다.
결코 출입하면 안 되는 장소도 말이다.
아그작-.
나는 잔에 남은 얼음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배드니커의 후원을 조금 걷다 보면 커다란 담장이 나온다.
장미 덩굴이 지저분하게 둘러싼 담장인데, 이 너머엔 지금은 쓰지 않는 옛 연무장이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출입 금지.
나도 실제로 가본 적은 없다.
아무튼 살금살금 뒤를 쫓고 있자니, 세렌은 그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
어쩐지 점점 의심이 커지기 시작한다.
명망 높은 굿스프링가의 삼녀가, 다른 가문의 담장을 거침없이 넘을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나는 건너편에서 착지하는 소리, 발소리가 조금 멀어지는 걸 확인한 다음 담장을 넘었다.
어느새 주변은 고요해져 있었다.
방금까지 느껴졌던 연회의 소란스러움이 꿈나라 일처럼 느껴질 정도.
담장 너머의 땅은 바스러지기 직전의 낙엽이나 죽은 풀 따위로 덮여 있었다.
‘지금 겨울인데.’
출입 금지라서 아예 관리조차 안 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본가의 땅인데.
나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발걸음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낙엽은 살짝만 밟아도 바스러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리니.
아무튼 미행은 얼마 가지 않아서 끝났다.
허름한 연무장 중심에 세렌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
이럴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게 원칙이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미행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렌의 신경은 쭉 전방을 향해 있었고.
사박-.
예상대로 세렌의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드러났다.
뭐 하는 놈인가 싶었는데, 어째 익숙한 낯짝이었다.
그러니까 저놈은…….
‘어제 그놈이잖아.’
가르쉬아 가문의 하리바.
아무튼 왠지 모르게 음험한 분위기다.
원래도 그렇게 생기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두 배는 더 음험해 보인달까.
음산한 배경도 한몫하는 것 같고.
“왔구나, 세렌.”
“…….”
“미안해.”
하리바가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하나 싶어서 바라보니.
“정말, 정말 미안해…….”
이 뭔.
주저앉은 하리바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괜찮아. 나의 세렌.”
워낙 뜻밖의 상황에 할 말을 잃고 있는데, 이어지는 말엔 내 머리에 물음표가 더욱 증가했다.
“루안 배드니커는 내가 꼭 죽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