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그 가능성 중 하나를 세렌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일축했다.
“너지? 여기 온 이후부터 계속 음습하게 편지 보낸 놈이. 게다가 마지막엔 협박까지 늘어놓고.”
일단 둘이 공범은 아니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세렌이 정말로 본색을 숨긴 채 멍청한 모습을 연기했고, 나는 꼼짝없이 그 모습에 속은 것이었다면…….
‘넷째 사형을 볼 낯이 없을 뻔.’
세렌의 말이 이어졌다.
“누군진 모르겠는데, 피곤하면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내가 누군지 몰라?”
“어.”
“왜? 나는 그날부터 쭉 너만을 생각하며, 너만을 위해서 움직였는데.”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루안 배드니커가 보검을 팔도록 만든 것도 나였어.”
‘뭐?’
하리바의 말엔 나도 멈칫하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나는 저딴 놈한테 보검을 넘겨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놈 옆에 있던 시종을 매수하고, 보검에 대한 정보가 그 녀석 귀에 들어가도록 유도했지. 기껏해야 훔쳐서 도망이나 칠까 싶었는데, 설마 팔아 버릴 건 예상 못 했지만.”
‘허어…….’
전생에 있었던 일의 진상을 이렇게 알게 될 줄이야.
어쨌든.
대충 구경하고 있자니 슬슬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이 간다.
그러니까 저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나를 몰아넣고, 그걸로 세렌에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 뭐라고 해야 하나.
“변태냐?”
적절한 말씀.
“나의 세렌. 그런 말 하지 마. 나 덕분에 그 열등아와의 약혼도 깨졌잖아, 응?”
“뭐라는 거야, 미친 새-.”
“왜!”
깜짝이야.
“왜 나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
이쯤에서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세상을 살며 상종하지 말아야 할 부류가 몇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정신에 이상이 있는 놈이다.
바로 저놈처럼.
“알 바세요? 난 너 같은 새끼 보면 항상 이런 표정 지어.”
“그런 말 하지 마.”
“싫은데.”
어쩐지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좀 더 사태를 두고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분명 그런 생각이었는데.
‘…….’
아무리 그래도 여긴 배드니커의 영역이다.
내가 이 가문에 무슨 소속감을 가진 건 아니지만, 굿스프링의 인간이 배드니커의 일에 휘말린 꼴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모습을 드러냈다.
“……!”
“너는!”
심각한 대화를 하던 두 놈이 동시에 나를 봤다.
이목이 쏠리는 게 부담스러웠으나, 나는 우선 인사부터 했다.
“그래, 나야.”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 아니냐? 여긴 외부인한테 개방된 구역이 아냐.”
물론 외부인만이 아니라, 아마 내 출입까지 금지돼 있을 테지만…….
그 사실까지 이 녀석이 알 리는 없고.
예상대로 세렌은 나의 대꾸에 딱히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닫았다.
나는 하리바를 보았다.
“얘기 잘 들었다, 이 개새끼야. 나 죽이고 싶어서 눈깔이 아주 뒤집혔더라?”
“…루안.”
“어.”
“루안 배드니커.”
“왜요.”
어쩐지 비슷한 대화를 극히 최근에 반복한 것 같은데.
“루아아안-!”
갑자기 왜 저래?
하리바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전신을 기괴하게 꺾었다.
우드득, 우득.
하리바의 몸뚱이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문자 그대로 근골이 뒤틀리는 소리였는데.
“루아아아안-!”
왜 저래, 시발.
나한테 뭔 감정 있나?
‘있구나.’
직후 하리바의 육체가 무슨 팽창하는 고무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나는 황당한 심정이 됐다.
‘저주는 아닌데?’
이토록 기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리바의 몸뚱이에서 부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긴. 애초에 저놈이 마인이었다면 배드니커의 본가에 출입조차 불가능했을 터.
그럼 지금 하리바의 육체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뭘까?
“칫!”
그 순간 세렌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돌진하는 몸뚱이에 돌풍이 휘감겼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힘이다.
세렌은 지금 가호를 발휘한 것이다.
콰아아!
지면에 깔려 있던 낙엽이 세차게 흩날렸다.
하리바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으나, 코앞까지 치달은 세렌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사이 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부풀어 오른 주먹을 세렌에게 휘둘렀다.
제대로 맞으면 좀 다치는 정도론 안 끝난다.
세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정면에서 맞붙지 않고 흘리듯 공격을 피했다.
격한 움직임에 후드가 벗겨지고, 은색의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휘릭, 하리바의 주먹을 빙글 돌며 피한 세렌은 그 품까지 순식간에 파고든 다음 멋들어진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빠악!
“…….”
공격 자체는 깔끔했다.
소리만 들어도 어느 정도의 위력이 담겼는지 알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세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 녀석은 순식간에 물러나더니, 갑자기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응?”
“이리 와!”
그리고 우리는 하리바를 내버려 둔 채 그대로 숲을 내달렸다.
“루아아안-!”
뒤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끈질기게 들려왔다.
* * *
배드니커의 본가의 넓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가주와 원로회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지만, 가끔 먼 건물을 향할 때는 마차를 탈 만큼 더럽게 크다는 건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가 정확히 본가의 어느 장소인지 알 수 없었다.
‘북쪽 지역엔 아마도 외벽이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걷다 보면 그대로 본가 지역을 벗어나서 [나비의 숲]과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변엔 초목이 아무렇게나 자라나 있어서, 도무지 정원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새끼는?”
“몰라. 일단은 안 보여.”
“그래? 후우…….”
그제야 세렌이 한숨을 내쉬며 내 손목을 놓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자국이 남았다.
나는 뻐근한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근데 왜 도망친 거야?”
“뭔 병신 같은 질문이야. 그럼 그 괴물 같은 놈이랑 싸우려고?”
“일단 가늠은 해봐야지. 도망치는 건 그다음 해도 안 늦어.”
“아니. 늦어.”
그리고 세렌은 나를 보았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이 녀석이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나를 짐짝으로 보고 있네?’
황당하다가도, 세렌의 입장에선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 앞에선 헥토르한테 굴욕을 당하는 등 한심한 모습만 보여 줬으니까.
그 자리에서 나를 지키면서, 하리바와 싸우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야, 뭔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나 그렇게 약골 아니야. 사실 강하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
“가호 하나 받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냐? 저놈 몸 뒤틀리는 거 못 봤어? 오우거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더라.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잠자코 내 말 들어.”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는 게 슬펐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힘을 보여 준답시고 세렌과 싸울 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말하는 것도 애매하다.
전부터 어렴풋이 느꼈는데, 이 세렌이라는 녀석.
‘착하잖아.’
입이 좀, 아니. 엄청 험하긴 하지만.
어쨌든 근본적으로 나쁜 녀석은 아니란 게 내 생각이다.
방금도 그렇다.
혼자만 도망치면 될 걸 굳이 나라는 짐짝을 달고 같이 도주했으니.
심지어 굿스프링의 사람으로선 증오할 수밖에 없는 배드니커를 상대로.
‘여러모로 특이한 녀석이란 말이지.’
굿스프링 가문의 자제들은 하나같이 품위, 교양을 지키는 데에 목숨을 건다던데, 이 녀석의 태도에선 그런 기색이 거의 없다.
애초에 생긴 것도 굿스프링 특유의 느낌이 거의 없고, 말투는 용병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걸까?
‘사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아무튼 일단은 세렌의 말을 듣기로 했다.
단순히 고마움 때문만은 아니고…….
세렌 굿스프링.
훗날 [실버문]이라고 불리게 될 영웅.
그 영웅이 아직 개화하기 전. 이러한 위기 사태를 어떻게 대처할지가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본가를 완전히 벗어난 것 같은데.”
“그건 아냐. 아마도 북쪽 구역이겠지.”
“북쪽 구역이 뭔데.”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장소. 시종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여긴 마녀가 산다더라.”
“하.”
세렌이 입가를 비틀었다.
“본가 부지에 마녀? 음울한 배드니커 아니랄까 봐 별의별 소문이 다 도네. 철혈공께서 그 꼴을 잘도 두고 봤겠다.”
물론 나도 이 소문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북쪽 구역을 이렇게 방치한 이유에 관해선 딱히 짚이는 바가 없다.
차라리 담장 너머 숲이라면 이해는 가는데, 일단은 본가 부지에 속하는 곳이니.
세렌은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혼잣말을 웅얼웅얼 중얼거리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는 건… 애매하지. 그 변태랑 또 마주칠 수도 있어.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기다리는 것도…….”
나는 잠깐 그 모습을 보다가 물어봤다.
“그런데 너 말이야.”
“…뭔데?”
“저 녀석 진짜 누군지 기억 안 나?”
그 말에 세렌이 멈칫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억이 안 나지는 않고.”
“그럼 왜 모른 척했는데?”
“아는 척하기 싫었으니까. 기분 나빠.”
뭔 일이 있길래.
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압박하니, 세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2년 전이었나? 황실에서 제1황자 탄신 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났어. 그게 전부야.”
“진짜로?”
“…사내새끼가 우물쭈물하는 꼴이 짜증 나서 뭐라 잔소리한 것 같기는 한데, 사실 잘 기억 안 나. 저놈이 왜 저러는지는 짚이는 게 없다고.”
“흠.”
첫눈에 반한 건가?
얼토당토않은 말은 아니다.
일단 세렌은 예쁘장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상황에서…….”
나는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잠깐, 조용해 봐.”
“뭔데.”
“무슨 소리가 나는데.”
“뭔 헛소리야?”
“잘 들어 봐.”
그러자 세렌이 불만스런 얼굴로 입을 꾹 닫더니 귀를 기울였다.
철컥… 철컥…….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불쾌하게 울렸다.
그제야 눈치챈 세렌이 깜짝 놀랐다.
우리는 뭐라 할 것 없이 재빨리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고…….
잠시 후 불쾌한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철컥…….
기사였다.
검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가 기괴한 걸음걸이로 숲을 거닐고 있었다.
‘뭐야. 저건.’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기사를 보고 있자니, 세렌이 속삭였다.
“야, 저거…….”
“알아.”
기사가 입고 있는 갑주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근골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형태가 될 수 없다.
실제로 갑주의 관절 부분에선 불길한 검은색 연기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데드인가?
아무리 그래도 배드니커의 영지인데?
게다가 질 낮은 놈도 아니다.
‘들키면… 위험하겠는데.’
다행히 감각이 그렇게 예리한 놈은 아니었는지, 삐걱거리던 기사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졌다.
“…어떻게 들었냐? 난 못 들었는데.”
세렌이 복잡한 눈으로 말했다.
“내가 귀가 좀 좋아. 그보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다. 여기 진짜 위험한 곳 같아.”
“으음.”
잠깐 고민하던 세렌이 말했다.
“…그래도 여기 죽치고 버티다 보면 너희 가문 쪽 사람들이 구하러 오지 않을까?”
“왜.”
“왜라니. 그래도 굿스프링이랑 배드니커의 자제가 실종된 상황이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너, 오늘 연회에 불참했잖아.”
그러자 세렌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아니면 나오기 전에 사용인한테 말하고 나왔어? 잠깐 외출한다고 말이야.”
“…아니.”
“자기 전에 방에 들르는 사람은 있고?”
“…그런 건 싫어해서.”
“그럼 네가 사라진 건 내일 아침에나 알겠네?”
“나는 그런데, 넌-.”
“내 꼴 못 봤냐? 배드니커의 무능아, 찬밥, 보검을 판 미친놈이 바로 나야. 사라진 것도 모를걸.”
“…….”
엄밀히 말하면 이건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나 아르잔, 케이안은 내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을 테니까.
“그냥 우리 힘으로 여기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반대야. 내 예상엔 우리가 여기 들어온 걸 들키는 게 훨씬 위험해.”
“왜?”
“…….”
나는 입을 닫았다.
외부인은 물론, 가문에 속한 인물에게도 절대적으로 출입이 금지된 장소.
묘하게 칙칙한 분위기, 관리된 흔적이 전혀 없는 땅.
결정적으로 가문 내부를 거닐고 있던 언데드.
이런 상황을 배드니커가 깨닫지 못했을까?
그보단 알고 있는데도 방치하고 있단 게 더 높은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터무니없는 생각은…….
이 장소에 멋대로 들어온 게 발각된다면.
세렌은 물론이고, 어쩌면 나까지 입막음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