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지금의 하리바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단 사실은 이제 안다.
내 이름을 부르짖는 것도.
나를 향한 증오 때문이라기보단, 억지로 명령어를 주입받은 부작용에 가까운 게 아닐까.
아마 지금의 저놈에겐 이성이란 게 거의 존재하지 않겠지.
문제는 숨어 있는 놈이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더 멀리 있는 건가?’
있을 법한 가능성이지만, 나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 형식의 지배라면 흑마법 쪽일 테고, 방식은 의식에 개입하는 쪽일 터.
그렇다면 장애물에 가려졌을 때 멈칫거릴 이유가 없다.
‘동화가 아닌 공유, 지배가 아닌 조종.’
나는 그 차이를 확실히 되새긴 다음 생각을 이어갔다.
하리바를 조종하는 놈은 이 근처에 있고, 내 감각을 피할 만큼 수준 높은 은신술을 보유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까다로운데…….’
아마도 조종자가 주모자겠지.
배드니커에 암살자를 잠입시키고, 나를 죽이려고 했던 놈 말이다.
지금 하리바를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꼴을 본 주모자는 어떻게 할까?
직접 처리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까?
‘그럴 리가.’
여태까지의 행보로 봐선 기분 나쁠 만큼 신중하고, 철두철미한 녀석이다.
오히려 더욱 몸을 웅크리고, 확실한 기회를 기다리겠지.
나로선 가장 귀찮은 전개다.
‘그렇다면…….’
내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순간이었다.
“……!”
하리바의 뒤에서 세렌이 갑자기 나타났다.
문자 그대로 ‘갑자기’였다.
마치 수면 아래서 부상하듯, 혹은 장막을 걷어내듯이.
‘가호!’
그 순간 세렌의 발꿈치가 하리바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목이 약점이니, 경추를 아예 찌그러뜨릴 생각인 걸까?
아니었다.
하리바의 머리가 직각으로 꺾인 순간, 세렌이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그 순간 손톱이 비정상적으로 자라났는데, 달빛을 받은 그것은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섬뜩하게 번뜩였다.
저 가호는 나도 알고 있다.
세렌이 [실버문]이란 이명을 얻게 만든 가호.
[은월銀月의 가호]다.
스걱!
고깃덩이를 자른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세렌의 손톱, 발톱… 하여간 그 끝에 맺힌 핏물도 보였다.
제대로 들어간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나조차 그렇게 생각했으나- 직후 하리바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회전하는 게 보였다.
“피해!”
곧바로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하리바는 살짝 웅크려진 자세 그대로 뒷발을 찼다.
투박한 동작은 말이 뒷발을 차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렌은 순간적으로 양팔을 교차시키며 막았다.
훌륭한 방어였으나, 대미지를 줄였을 뿐 아예 흘린 건 아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지금 이 기회도 놓칠 수는 없다.
나는 꽈득 주먹을 말아 쥔 다음, 빈틈투성이인 하리바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리바의 체격은 이미 내 두 배를 가뿐히 넘을 정도라서, 위를 보니 근육덩어리와 함께 하리바의 얼굴이 보였다.
이럴 때 딱 쓰기 좋은 기술이 있다.
배드니커의 가전검술인 아이언하트의 제7식 하늘 찌르기를 참고한 기술.
한때 케이안에게 보여 줬던 초식이다.
백일식白日式 제삼초식第三招式.
승화昇火.
빠아악!
첫 공격과 달리 이번엔 손맛이 너무 좋았다. 내 기대 이상으로 말이다.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게 하리바의 목 근육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내 주먹만으로 이 정도 성과를 거두기엔 힘들고, 세렌의 발톱이 이놈의 뒷목을 절반쯤은 잘라 냈나 보다.
하리바의 목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덜렁거렸다.
속 불편하게 하는 광경이었으나, 더 황당한 건 이 꼴이 되고서도 이놈은 아직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어, 어……?”
하리바가 멍청한 목소리를 내며 고정하듯 머리를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더 터프하다.
조종당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목이 잘렸다고 죽을 거라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나는 일단 세렌에게 달려갔다.
스승님이 몸뚱이를 완전히 회복시킨 건 아닌 걸까.
불현듯 현기증이 나서, 하마터면 뛰다가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다.
겨우 세렌이 앞까지 다다르니, 이 녀석은 반쯤 부서진 나무에 처박혀 있었다.
딱 봐도 멀쩡한 꼴은 아니다.
“괜찮냐?”
뼈만 안 부러졌으면 좋겠는데.
“뼈가 부러졌어.”
“어느 쪽?”
그래도 양쪽 모두 부러진 게 아니면-.
“양쪽 다.”
염병.
무기도 없는 녀석이 양팔까지 부서졌다면 사실상 끝장난 거나 다를 바 없다.
교란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게 딱히 의미 있는 상대도 아니고.
세렌도 그걸 아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는데, 지금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다.
이 녀석과 오래 지낸 건 아니지만.
어쩐지 남한테 짐짝이 되는 걸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할 것 같은 성격 같다.
“우어어…….”
하리바의 목소리가 들려서 봤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 저거…….”
“나도 보여.”
찢긴 목 근육이 달라붙고 있다.
트롤의 피라도 섞었나?
어쩐지 보석 산맥부터, 트롤 이 새끼들이랑 연관돼서 좋은 일은 없는 듯하다.
‘시간도 많이 끌렸고.’
슬슬 본가에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다.
만약 싸움이 길어져서 이 모습을 본가의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솔직히 나야 어떻게든 살 자신이 있다.
가문엔 아직 철혈공도 있으니.
하지만, 세렌은?
눈엣가시인 굿스프링의 핏줄이, 배드니커의 금지에 멋대로 발을 들였다.
배드니커로선 절호의 기회일 터.
죽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고.
그렇지 않더라도 단물이 빠질 때까지 이 건을 우려먹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 자존심 높은 녀석이, 자기 잘못으로 가문이 손해 보는 꼴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다고 여기서 혼자 도망치라고 해도 순순히 물러날 녀석도 아니다.
‘…….’
나는 잠깐 세렌의 여러 특징을 떠올렸다.
자존심이 대단히 높고, 머리 회전은 빠른 편.
말투에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선량한 성격.
그리고 의외로 오해를 많이 한다…….
“세렌.”
“뭔데.”
“왔던 길이 어느 쪽인지는 기억나냐?”
“이런 상황에서… 누굴 바보로 알아?”
“다행이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먼저 가라.”
내 말에 세렌이 멈칫했다.
“뭐?”
“너무 잘라서 말했나?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까 먼저 가라고.”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당연히 제정신이지.
세렌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나 다리는 멀쩡하거든? 그리고 갈 거면 같이 가면 되지, 뭘 나 혼자 가라 마라야. 어차피 저 굼벵이 새끼 느려 터져서 따라잡지도 못할 텐데.”
글쎄.
여태껏 하리바가 전력으로 추적하지 않은 건, 우리가 배드니커의 본가 저택과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자발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쥐새끼를 급히 추격할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아직 숨어 있는 놈도 찾지 못했고.’
그놈이 어떤 순간에 나올지는 나도 잘 예측이 안 간다.
쓸 수 있는 수단이 하리바가 전부라는 보장도 없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그놈의 목표가 나라는 것.
그러니 세렌이 여기서 도망쳐도 추적하지는 않을 거다.
물론 이러한 사정을 모두 설명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내가 입을 닫고 침묵하고 있자니, 세렌이 말했다.
“…너, 설마 다리를 다친 거야?”
이건 또 뭔 오해야?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달려오는 길에 현기증 때문에 다리를 헛디뎠지.
그걸 보고 오해한 건가 보다.
나는 이 착각 소녀의 말에 다시 한번 당황했지만, 일단 입을 닫고 무거운 표정을 지어 봤다.
“…역시 그랬나.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세렌이 다시 말했다.
“그럼 더더욱 같이 도망쳐야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지금 네 팔로는 부축도 못 해.”
“그럼 너 혼자서 저놈을 상대하는 건 말이 되고?”
“너랑 달리 팔은 멀쩡해. 다리도 아예 부러진 건 아니고. 그리고 말했잖아. 미래를 봤다고.”
“…미래.”
세렌이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약, 이게 원래 너의 미래가 아니라면?”
“뭐?”
“내가 괜히 개입해서 꼬인 거고, 원래의 너는 여기서 죽지 않았다면- 너는 내가 죽인 셈이 되는 거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나는 세렌의 코앞에서 손바닥을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이 녀석의 풀린 초점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뺨을 한 대 때렸다.
찰싹.
“…시발, 뭐 하냐?”
얜 진짜 귀족이 맞나?
나는 하리바보다 먼저 날 죽일 것 같은 세렌의 눈빛을 흘리며 말했다.
“됐으니까 그냥 가라. 진짜로 금방 뒤쫓아 갈 테니까.”
세렌이 입을 꾹 닫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사람을 데리고 올 테니까.”
“넌 내 말을 제대로 들었냐? 우리가 여기 들어온 건 숨겨야 한다니까. 이건 널 위해 하는 말이기도 해.”
괜히 사방팔방 퍼뜨리는 건 나로서도 귀찮은 일이다.
금지에 출입했다는 사실은 웬만하면 숨기고 싶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세렌은 따르지 않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럴 바엔 나도 그냥 같이 싸울 거야.”
“…그럼 말해도 될 사람을 말해 줄게.”
“누군데.”
“케이안이랑 아르잔.”
“그러니까 누군데.”
“내 수하. 믿을 만한 녀석들이야.”
“너희 어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이 심하신 분이라.”
“…….”
세렌이 입술을 꽉 깨물더니,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러자 세렌은 어쩐지 한 방 얻어맞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바보 같기는.”
병신이니, 새끼니.
험한 말만 일삼더니, 어째 마지막 욕설은 힘이 없다.
“루안 배드니커.”
“어.”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세렌이 표정을 굳힌 채로 말했다.
“내 비밀을 하나 알려 줄게.”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진…….
그렇게 대꾸하려는 순간, 세렌의 신형이 사라졌다.
하리바를 기습했을 때처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꼭 단거리 순간이동을 연속으로 쓰는 것 같다.
아마 저것도 가호의 힘이겠지.
‘동행자가 있으면 쓸 수 없나 보네.’
다행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꼼짝없이 세렌과 도망쳐야 했을 테니까.
당연하지만 나는 도망칠 생각이 없다.
아직 하리바한테 볼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뭔가 또 착각하는 것 같긴 한데.’
오해는 나중에 풀면 되고, 우선은 눈앞에 있는 하리바에게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우어, 어…….”
하리바는 상처의 수복을 모두 마친 다음 나를 향해 걸어왔다.
“자. 그럼…….”
방해꾼 없이 2회전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