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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45화 (45/172)

45화

나는 수 싸움을 좋아한다.

체스처럼 아예 머리만 굴리는 계략이 아닌, 전투 속에서 벌어지는 수 싸움 말이다.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는 것도 흥미롭고, 내 의도를 숨기는 것도 즐겁다.

실시간으로 서로의 수를 교환하고, 결국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는 일종의 강렬한 카타르시스까지 느낀다.

내가 짐승이나 몬스터보다 고수와의 싸움을 선호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한 가지만 먹고 살기 힘들 듯…….

가끔은 다른 방식의 싸움이 당길 때가 있다.

무식하게 싸우고 싶은 순간 말이다.

꽈아앙!

다시금 하리바와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이유다.

물론 하리바는 강하다.

지금의 나보다 힘도, 속도도, 체격도 모두 우위다.

딱히 깊게 의식할 필요는 없는 사실이다.

나는 나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게 익숙하니.

콰가가각!

전면전이라고 해서 무식하게 힘과 힘으로 승부를 보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아무리 나라도 진작 핏덩이가 됐을 거다.

다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뒷걸음질 치지 않고, 나보다 몇 배는 거대한 상대와 초근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거센 돌풍이 눈앞에서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듯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휩쓸려서, 전신의 근육과 뼈가 순식간에 찢겨 나갈 것 같은 느낌.

그러한 압박 속에서 나는 이 괴물과 그럭저럭 접전을 이어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우위인 적을 상대로 교전을 이어 갈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바로 안목과 기술이다.

우지끈!

나를 빗겨 간 주먹은 뒤에 있던 거목을 박살 냈다.

하리바의 주먹에 담긴 파괴력을 알 수 있는 간접적인 지표, 한 대라도 맞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피하기만 해선 이 녀석을 쓰러뜨릴 길이 없다.

그러니 나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며, 하리바의 몸에 둔탁한 통증을 쌓아 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렇긴 해도.’

위험한 상황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제법 여유로운 것처럼 굴고 있지만, 지금의 나는 육체와 정신력의 소모가 상당한 상태.

점점 하리바의 공격을 피하는 게 아슬아슬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건 내가 지치거나, 상대가 빨라졌기 때문은 아니다.

보다 공세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회피 동작을 최소화하고 있다.

핏-.

하리바의 주먹이 볼과 귀를 스쳤다.

그것만으로 피부가 찢어졌다.

이 정도 위력의 공격이라면 회피에 성공하더라도 압박감이 상당하다. 어쩔 수 없이 맞았을 때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공방은 여러모로 정신 건강에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하아아…….”

나는 격전 와중에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지만, 호흡은 여전히 차분하다.

흥분 때문에 머리통이 뜨겁고, 심장은 거칠게 박동했다. 그러한 열기가 기분 좋게 다가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염화제일공을 익히며 내 머리가 살짝 돌아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후웅, 또다시 하리바의 주먹을 피했으나 그 이후엔 좀 다르게 대응해 봤다.

회피한 직후 이놈의 손목을 붙잡은 것.

물론 손목이 무슨 통나무처럼 커다란 상태라서, 붙잡았다기보다 손에 얹은 모양새였으나…….

“가아아아악-!”

내 손길에서부터 피어오른 불꽃이 하리바의 팔을 질주했다.

하리바의 전신이 불길에 뒤덮인 건 순식간이었다.

몸뚱이가 타오르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놈은 기세 좋고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이라기보다는 발악 같지만, 사기적인 육체 성능의 소유자니 우습게 볼 수는 없다.

다만 공격의 궤도는 훨씬 단순해져서 어렵지 않게 피했다.

그리고 이죽거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여기서 여유로운 척 굴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루, 아안-!”

그만 좀 불러라, 이 새끼야.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하리바가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었다.

강물에 몸을 씻은 짐승이 털을 터는 것 같은 모양새다.

얼마나 거칠게 몸을 흔들었는지 불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전신은 화상 때문에 흉측하게 일그러진 상태.

그 꼴로 교전을 몇 분 정도 더 이어 가니… 하리바는 슬슬 의성어라기조차 힘든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휘오오오!

커다란 주먹.

나는 그 공격을 직시하며, 처음 이놈과 마주했을 때처럼 마주 주먹을 내질렀다.

꽈아앙!

이번엔 날아가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반대로 하리바가 당황한 듯 주먹을 움찔 떨었다.

그 동요가 하리바의 진실된 반응인지, 아니면 숲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음험한 놈의 반응인지.

나는 모른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고.

‘기분 죽이네.’

화백 상태에 접어든 건 아니지만, 이제야 컨디션이 돌아온 것 같다.

살짝 주춤하던 하리바가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나는 이를 악문 채로 웃었다.

염화제일공의 최대 강점.

오래 싸울수록 강해진다.

나의 육체 성능은 교전을 오래 지속될수록 점진적인 상승을 거듭했고.

꽈아앙!

마침내 이 순간,

하리바의 힘을 넘어섰다.

* * *

명치에 제대로 주먹이 꽂혔다.

이놈의 비대한 근육을 넘어서서, 내장에까지 충분히 닿았다는 감촉이 들었다.

“거어억…….”

하리바의 입에서 침인지, 핏물인지 모를 게 뚝뚝 떨어졌다.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그대로 발로 차 버렸다.

딱히 비밀이 아닌 사실은, 지금 이 발차기가 아까 세렌의 것을 흉내 냈다는 것이다.

‘제법 괜찮은 무술이었지.’

게다가 단순한 호신술이라기엔 수준이 과했다.

세렌은 어디서 그런 무술을 배운 걸까?

‘다른 생각할 때가 아니고.’

나는 풀썩 쓰러진 하리바를 보았다. 일단 더는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공격엔 발경의 묘리를 더해서, 외부보단 내부를 부수는 데에 주력했다.

결과를 보니 옳은 전략이었던 듯하다.

‘그럼 이제…….’

이 몸의 연기력을 발휘할 때인가!

“커헉…….”

나는 괴로운 기색으로 숨을 토해 낸 다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못할 사람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당했다…….”

감정선 좋은데?

나는 스스로의 연기에 몰입하며, 채점까지 했다.

사실 이런 꾀병 연기는 안색을 보면 곧바로 진위를 가릴 수 있지만, 오늘은 밤의 장막이 짙다.

아무리 밤눈이 좋아도 이 어둠을 뚫고 내 표정을 확인하기는 힘들 터.

아무튼 나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헐떡거리다 풀썩 쓰러졌다.

이게 바로 혼신의 연기!

그런데…….

…….

…….

어째 떡밥을 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 새끼, 설마 그냥 갔나?

만약 그런 거라면 꼴값도 이런 꼴값이 없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이 염병을 떤 거라면,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짙은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다.

설마 내가 잘못 짚은 걸까.

애초에 주모자는 이곳에 없었고,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하리바가 멈칫하던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다면-.

사박-.

“……!”

그 순간 풀밭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워낙 희미한 소리라서 하마터면 나라도 놓칠 뻔했다.

아마 숲에 풀벌레 소리 따위가 들렸더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

드디어 주모자의 낯짝을 볼 수 있게 됐다.

나는 이 녀석이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가, 내 간격으로 들어왔다는 확신이 든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즉시 가까이 다가오던 놈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피해?’

내 손은 공연히 허공만을 스쳤다.

“…….”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놈을 노려봤다.

칙칙한 로브로 전신을 감싼 괴인이라 정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일단 체격으로 봐선 남자일 확률이 높지만, 이러한 성별도 간단한 위장으로 감출 수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

“아직 움직일 기력이 있었나.”

목소리는 일단 남자네.

“누구세요.”

딱히 기대 없이 예의상 물어보니, 이 녀석은 전혀 뜻밖의 소리를 꺼냈다.

“많이 컸구나.”

“누구시냐고.”

“너는 몰라도 돼.”

그럼 시발 아는 척을 말든가.

아무튼 목소리로 봐선 일단 남자였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불시에 일장一掌을 뻗었다.

화륜火輪이다.

내 손바닥 모양의 염풍炎風이 괴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괴인怪人은 덤덤한 기색으로 로브 자락을 펄럭거렸다.

로브 밑은 밤하늘보다 더 캄캄했는데, 놀라운 일은 직후였다.

내가 쏘아낸 화륜이 그 로브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공격이 들어갔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전개는 분명 내 예상을 벗어났으나, 나는 사실 화륜을 날린 직후 이미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촤르륵!

괴인이 다시 한번 로브를 펄럭거리자, 이번엔 그 속에서 쇠사슬 같은 게 쏟아져 나왔다.

‘마법은 아닌데?’

그럼 가호인가? 아니면 저주?

어쨌든 사슬을 사용한 의도는 알기 쉬웠다.

일단은 내 움직임을 봉하려는 것이다.

나는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 상체에 미묘한 흔들림 더했다.

케이안의 암보暗步.

진짜로 익혀 두길 잘했다.

“……!”

사슬이 단 한 줄도 나를 스치지 못하니, 괴인도 비로소 당황한 듯하다. 급히 뒷걸음질을 치는 걸 보니.

나는 스쳐 지나간 사슬 중 하나를 덥석 잡고 힘껏 당겼다.

“윽……!”

괴인의 몸이 나한테 딸려온다.

나는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그놈을 보며 주먹에 힘을 불어넣었다.

범위로 들어오면 그대로 턱주가리를 갈겨 버릴 생각이었는데…….

계획 중단.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촤르륵!

후방에서 사슬이 날아왔다.

깨닫지 못했으면 목이 감겼을지도 모른다.

‘뭐야?’

뒤로 날아갔던 사슬이 어떻게 방향을 튼 것일까.

신의 유물遺物인가?

아니면…….

뒤에서 다시 한번 사슬 무리가 쏟아졌다.

아까보다 빠르다.

나는 괴인을 당기던 것도 멈춘 채 회피에 집중했다.

‘수가 불어났는데?’

그새 사슬의 수가 두 배가 됐는데, 뒤를 돌아본 순간 이유를 알게 됐다.

뒤엔 비슷한 차림의 괴인이 한 명 더 있었다.

“한 명 더 있을 줄은 몰랐나?”

괴인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한 명 생겼다고 금방 의기양양해지는데.”

“그럼 둘은 어때?”

“뭐?”

그 순간 내 아래의 지면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내 양 발목을 붙잡았다.

“미친?”

아무리 나라도 이건 예상 못 했다.

움직임이 짧게 봉쇄된 순간, 전후에서 사슬이 뻗어져 나오더니 내 몸을 과할 정도로 감았다.

나는 순식간에 실타래에 둘러싸인 벌레 같은 꼴이 돼 버렸다.

“…생포 완료.”

괴인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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