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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47화 (47/172)

47화

나는 체력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라 그 자리에 엎어지듯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렸다는 증거기도 했는데, 일단 나를 둘러싼 두 녀석이 잔뜩 굳어 있는 게 보였다.

‘깨소금이다, 이것들아.’

동료가 당했을 때도 눈 깜짝도 하지 않던 놈들이, 철혈공의 등장엔 얼어붙었다.

이해는 간다.

나조차도 저 남자가 내뿜는 기백에 살짝 위축됐다.

“젠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괴인이었다.

붙잡힌다면 승산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리고 도망갔다.

풀썩-.

그리고 세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쓰러졌다.

주륵…….

쓰러진 괴인에게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밤눈은 제법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는데,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철혈공은 쓰러진 괴인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네가 고르게 하고 싶었는데.”

무슨 말인가 싶었더니, 내 허세 섞인 말에 대한 대꾸엔 것 같다.

그러니까, 셋 중에 한 명만 살려 준다고 외쳤던 그 헛소리 말이다.

나는 대답할 여유조차 없이 헛웃음을 터뜨렸으나, 애초부터 한 명만 생포한다면 여자보단 괴인이 나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다.

“카아앗!”

그때 여자가 돌발 행동을 감행했다.

여전히 식은땀을 빗물처럼 쏟아내고 있으나, 철혈공의 압력에서 벗어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다.

여자의 로브가 거칠게 펄럭인 순간, 그곳에서 강력한 힘의 파동을 느꼈다.

직후 자락 아래서 녹색 촉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저주?’

저걸 여태껏 어떻게 감추고 있었던 걸까?

단순히 크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촉수에 담긴 기운이 심상치 않다.

온전한 상태의 나라도 저기에 담긴 힘을 정면에서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즉…….

저 촉수엔 [마왕]의 힘이 담겨 있다.

‘역시 비장의 수단은 감추고 있었구만.’

그렇다고 해도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긍정하듯, 철혈공의 무심한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고.

철혈공은 여자를 올려다보다가 칼을 뽑았다. 칼자루에서 스산한 날이 모습을 드러내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찰나지만, 숲속은 소리가 배제된 세상이 된 것 같았다.

철컥-.

그러나 다시 칼날에 꽂힐 때의 소리는 선명했다.

철혈공은 공격을 끝낸 사람처럼 검을 칼자루에 넣었다.

‘저런 짓을 해도 허세처럼 안 보이는 게 대단하네.’

나는 또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공격은 나조차 온전히 인지하지 못했고, 아마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일 거다.

“허억…….”

여자의 몸에서 핏물이 튀어 오르더니, 실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진다.

‘…….’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놈들이 모두 사라졌으나, 나는 몸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직 주변에 적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고, 단순히 내 눈앞에 있는 한 사내 때문이다.

“긴장할 것 없다. 적은 이제 더 없어.”

“…어떻게 아십니까?”

“느껴지니까.”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걸리는 점도 있었고.

나는 의문을 참을까 하다가, 여기서 묻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했다.

“이들의 기척을 계속 인지하고 있었습니까?”

“그래.”

“그럼 어째서 처음부터 나서지 않으셨죠.”

철혈공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나는 이 순간 왜 철혈공의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숨기는 게 아니라 애초에 없는 것이다.

‘희한하네.’

혈연에 집착한다는 점은 언뜻 보면 대단히 감성적으로 보이는 요소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속언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철혈공이 품고 있는 모순은 이상하다.

“모기는 어떠냐.”

“…예?”

“한밤중에, 내 방에, 모기가 있단 게 느껴져도 잡기 어려울 때가 있지. 그것과 비슷해. 느낄 수는 있어도 잡는 건 어려웠다. 이렇게 확실히 기어 나오기 전까지는.”

“…….”

이게 과연 올바른 비유인가.

어쩐지 난해한 기분이 됐으나, 당장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은 모기가 아니잖아요.’라는 말 따위를 해봤자 철혈공이 설득될 것 같지도 않다.

결국 나는 말을 돌렸다.

“사슬 좀 풀어 주실 수… 아. 감사.”

촤르륵.

철혈공은 내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사슬을 풀어줬다.

그저 손을 뻗었을 뿐인데, 사슬이 마치 의지라도 깃든 것처럼 저절로 풀린 것.

나는 갑갑함에서 벗어나 시원한 숨을 내쉬었다.

“전부 죽이신 겁니까?”

“그건 왜 묻지.”

“저놈 있잖습니까.”

나는 괴인을 가리켰다.

“절 아는 것 같던데, 만약 죽었다면 아쉬워서요.”

“…….”

“혹시 가주님은 저놈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네가 몰라도 될 존재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안 보여 준다는 뜻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네가 성장하는 데에 있어 쓸데없는 잡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음. 실례지만, 그건 괜한 걱정인데요.”

내 말에 철혈공은 더 이상 막지 않고 고개를 차분히 끄덕였다.

“직접 보아라.”

나는 괴인의 시체로 접근한 다음 후드를 내렸다.

“──.”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표정이 굳고 말았다.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루드빅 배드니커.

실종되었다던 철혈공의 자식의 얼굴이 후드 아래 있었다.

* * *

“…살아 있군요.”

나는 일단 루드빅의 상태를 보고 말했다.

삽시간에 쓰러졌던 이 괴인은 놀랍게도 아직 명줄을 유지하고 있었다.

철혈공이 이런 실수를 범했을 리는 없으니.

이 녀석을 살린 게 그의 의도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놀라지는 않는군.”

철혈공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이 남자는 내가 루드빅의 얼굴을 확인하는 그 순간까지, 내 얼굴을 낱낱이 분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뭘까?

‘나를 의심하고 있어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철혈공.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눈앞의 남자는,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모든 걸 의심한다.

설령 그게 자식일지라도,

세간에 망나니로 알려진 나 같은 무능아라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루드빅인 걸 말이냐.”

“아뇨. 가문의 관계자일지도 모른다고.”

“무얼 근거로.”

“배드니커에 대해 잘 알고 있던데요. 가주님에 대해서도.”

철혈공이 나를 보았다.

무심한 눈동자에 언뜻 흥미의 빛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 했지?”

“…철혈공은 한번 눈 밖에 난 인물이라면, 그게 혈연일지라도 내치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더군요.”

“흠.”

철혈공은 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은 다시 가려라. 괜히 다른 이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을 테니.”

“여기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철혈공이 묘한 대꾸를 했으나, 나는 군말 없이 후드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꼭 관을 덮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일단 이놈은 살아 있다.

“루드빅과 친했나?”

“그다지요. 다른 형제들만큼 안 좋은 건 아니었지만…….”

루드빅은 내 가호식 전에 실종됐다.

가호 하나 받지 못한 나를 보았다면, 다른 형제들처럼 시비를 걸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일이란 뜻.

“루드빅이 왜 우리 가문을 공격한 겁니까?”

“알고 싶은가 보군.”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목숨을 걸었으니.”

“타당한 주장이다.”

철혈공이 손을 뻗었다.

나를 공격할 의사는 없다. 스으으……. 지면에 파묻혀 있던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 따위가 뭉치더니 잠시 후.

화륵-.

희미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철혈공은 적당한 곳에 앉은 다음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어쩐지 앉으라는 의사 표현 같아서,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인다.

“루드빅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어… 거의 모릅니다. 그냥 2년 전 본가에서 실종됐다는 것밖엔.”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지.”

대외적으로는?

“루드빅은 자신의 발로 가문을 나갔다. 그리고 암흑교단에 합류해서, 마왕의 하수인이 됐지.”

“…….”

나는 살짝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루드빅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왜 진실을 감췄는지 알겠나.”

“배드니커의 혈통이 마왕의 하수인이 된 게 불명예스러운 일이니까…….”

나는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철혈공의 표정을 지켜보다가, 어조를 달리했다.

“…는 아니겠죠.”

“…….”

“다른 어떤 사정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근거는.”

“그게 아니라면 가주님께서 루드빅을 살려 둘 이유가 없습니다.”

“살려 둘 이유라면 있지. 이자에게서 정보를 캘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방금 루드빅의 동료 또한 살려 뒀어야 합니다.”

“왜.”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그럴 리는 없지.

철혈공은 다시금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열불이 나기는 한다.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시험받는 건 늘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도 강자의 권리 중 하나니까.

“이런 놈들을 상대로 확실한 정보를 얻으려면 교차 검증이 필수입니다. 한 명이라면 알 수 있는 게 제한적이죠. 그리고 가주님이라면 하나를 생포하나 둘을 생포하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내 추측은 여기까지다.

심문 이외에 루드빅을 살려 둔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의 나로선 짐작할 수가 없다.

자식이라서, 혈연의 정 때문에?

이딴 건 고려할 가치도 없는 가능성이고.

이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철혈공이 아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루드빅을 보았다.

이 미친놈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이놈 재밌는데요.”

철혈공은 대꾸하지 않았다.

공격할 의사도 없다.

그리고 자연스레, 루드빅은 철혈공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

나는 이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어떤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루드빅은…….”

“내가 심어 둔 첩자다.”

역시나.

“…가주님이 내린 명령입니까?”

그러자 루드빅이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 판단이었다. 교단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거든.”

내 기억 속과 비슷한 태도다.

이것이 이 남자의 진짜 모습인 걸까?

“그렇다고 교단의 첩자가 되다니…….”

“두려운 곳이니만큼 더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네가 말했다시피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나는 가주님과 상담 이후 실종 처리시키기로 이야기가 마무리됐지.”

실로 오랜만에 사람을 보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감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놈은, 단순히 흥미만을 위해 자신의 신분을 말살시킨 것이었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요?”

“나와 가주님, 이제 너. 그리고 아마도 아사드 님?”

“아.”

그렇다면 방금.

철혈공이 루드빅의 얼굴을 가리라고 한 건 다른 적 때문이 아닌, 배드니커를 의식한 명령이다.

“루드빅, 제사장은 어떻게 됐나?”

철혈공의 말에 루드빅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가호식이 끝난 직후 떠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소재를 끝까지 감추었던 터라…….”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놈들이라면 진작 내 손에 죽었겠지.”

철혈공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한 다음 나를 보았다.

“루안 배드니커.”

“예.”

“왜 너에게 루드빅에 대한 걸 가르쳐 준 것 같나.”

짚이는 게 전혀 없는데.

“감수한 것이다. 비밀을 공유하기 위해선 이쪽이 먼저 솔직해져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케이안은 네가 무술을 창안했다고 말하더군. 아예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내가 본 게 정확하다면, 그 과정에서 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입을 닫았다.

철혈공이 내 시선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누구에게 무술을 배웠느냐.”

“…….”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다.

지금 시점에서 망설임은 명백한 악수다.

지금 철혈공은 나를 의심하는 상황이니.

‘위기를 넘긴 게 아니었구만.’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내겐 완벽한 핑곗거리가 있다.

“잊힌 신입니다.”

“잊힌 신?”

“예. 사실 전에 말씀드린 보석 산맥에서 일이 더 있었습니다.”

나는 제단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그곳에서 만난 무신에 대해서도.

“오호. 잊힌 신이라…….”

루드빅이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놈 굉장한 성과를 거둔 셈이군요. 잊힌 신의 확보는 교단의 최중요 목표 중 하나인데, 그 계획을 엎은 셈이니까요.”

거짓말이 나쁜 건 알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잊힌 신을 만났다는 건 사실이군.”

철혈공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쩐지 그 눈동자가 평소보다 스산하게 빛나는 듯하다.

“하지만, 아니잖나.”

“네?”

“그 무술을 배운 건 잊힌 신에게서가 아니야.”

“왜 그런 말씀을-.”

“진위를 가리는 것.”

“…….”

“많은 이가 [재판의 방] 고유의 능력이라 여기고 있지만, 실은 곡해된 사실이다. 내가 자주 그 방에서 재판이나 심판을 담당했기 때문에 생긴 헛소문이지.”

“네?”

“[진위眞僞의 가호] 내가 가진 가호 중 하나다.”

“……!”

나는 입을 닫았다.

블러핑을 치는 걸까? 아니다.

그런 어설픈 수를 쓸 작자가 아니다.

‘…이거 안 좋은데.’

생각지도 못한 위기다.

한밤중의 숲속에서, 나는 침음을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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