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원로회라고 하니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그들이 말하기를 도련님께서…….”
“내가 뭐?”
“…산맥에서 교단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보석수를 홀로 토벌한 뒤 그 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니 이리 말씀하셨다고.”
“뭐라고.”
어째 불안하다.
“[원로회 따위는 나 혼자서 전원 때려눕힐 수 있다]”
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10배 정도 과장된 것 같은데?”
“역시 그랬군요.”
케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헛소리를 배드니커의 대부분이 믿고 있습니다.”
“믿으라지. 어차피 밑바닥 평판인데, 더 떨어질 데도 없어.”
“지금 도련님의 평이 보검을 판매한 직후보다 더 안 좋다고 해도 말입니까?”
“…그건 좀.”
밑바닥에도 밑바닥이 있다더니.
그때보다 평판이 더 곤두박질친 거면 심각하다.
“그래서 뭐, 원로님들이 직접 날 교육이라도 해주시겠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철혈기사단, 혹은 송곳니기사단의 일원이 도련님을 상대할 겁니다.”
케이안이 내 눈치를 한번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도련님, 기사단원의 실력은 천차만별입니다.”
“알아.”
“갓 입단한 기사와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기사, 같은 기사단원이라고 해도 그 둘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겠지요.”
“안다니까.”
“…중요한 건, 그들 중 어떤 자가 상대가 될지는 원로회가 정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슬슬 케이안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조급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도련님의 재능이라면 따라잡기까지 2년, 아니 1년만 있어도-.”
“그러니까 지금은 싸우지 말라고?”
빙 돌려 말하지만, 본론은 이거다.
케이안이 입을 닫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는 케이안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어머니가 이 사내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건 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케이안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살갑게 구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행 전엔 내 힘줄을 끊은 양반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케이안은 제법 뼈아픈 조언을 하고 있었다.
‘싸워 봤자 망신만 당할 테니 참아.’라는 말은 밑 사람 입장에서 꺼내기 힘든 말이 맞다.
“괜찮아.”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있음에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기사단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다.
나도 잘 안다.
기사단의 일원 중에선 철혈공의 자식들과 버금가는 괴물 같은 놈들도 있단 걸.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 싸워야 한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케이안은 더 관여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이때 아르잔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굿스프링가의 삼녀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렌?
“뭔데?”
“우선 사흘 전의 상황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세렌 아가씨는 연회에 돌아온 직후 도련님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를 바랐으나, 내가 목격한 세렌의 성정을 떠올리면 이뤄지기 힘든 바람이었다.
“저와 케이안 경은 그 얘기를 듣고 곧바로 수색에 나섰습니다만, 중간에 아사드 님에게 가로막혔지요.”
“아사드?”
대마법사 양반이 막았다고?
철혈공의 부탁을 받은 걸까.
케이안도 아르잔도 만만찮은 인재는 아니지만, 아사드에 비하면 신통찮은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다른 수단을 강구하려던 찰나 도련님이 돌아오셨지요. 문제는 다음 날에 벌어졌습니다. 세렌 아가씨께선 그날 밤새도록 도련님의 행방을 쫓았다고 합니다.”
나는 세렌의 행태에 놀라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왜? 그냥 나 잘 돌아왔다고 말해 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원로회에선 도련님의 행방에 대해 확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무사하다고 말해도, 제 말은 믿지 않으시는 듯했고요.”
“직접 보여 주는 건… 음.”
나는 말을 하다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세렌은 굿스프링이다.
나야 그 녀석의 본성을 이제 알게 됐으니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지만, 케이안이나 아르잔의 입장은 다르다.
혼절한 내 모습을 굿스프링의 인간에게 보여 주는 건 탐탁찮은 일이겠지.
이거 일이 좀 꼬였는데.
꾸르륵…….
이때 사흘을 굶주린 위장이 밥을 달라고 요동쳤다.
“금방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르잔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 * *
밥을 먹고, 씻고, 옷을 갈아입으니 이번엔 어머니가 찾아왔다.
“몸은 괜찮으냐?”
“네. 이제 멀쩡합니다.”
“그래.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어머니는 내가 사흘 밤낮을 잤는데도 딱히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케이안에게 들어 보니, 대충 가호를 받은 사람이 종종 이러한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설마 나도?’
사흘간 뻗어 있던 이유가 몸에 피로가 축적돼서가 아닌, 가호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딱히 자기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고, 가호가 무엇인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상관없다.
내 주력은 어디까지나 염화제일공이며, 백일식이다.
만약 엄청난 가호를 받았어도 수단 중 하나로써 이용할 생각이지, 그걸 주력으로 단련할 생각은 없다.
“…청문이 진행될 동안엔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어머니가 케이안과 비슷한 말을 꺼냈다.
어쩐지 표정도 비슷했다.
“보호자가 한 명 동참할 수 있다더구나. 얘기는 내가 할 테니 이 어미에게 맡기면 돼.”
“괜찮겠어요?”
“당연히 괜찮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어머니가 입가를 삐뚜름하게 울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은 세가 많이 약해졌다지만, 어머니는 콜랜드라는 영지의 귀족이셨다.
정치적인 처세술은 나보다 뛰어나겠지.
“물론 원로회가 쉽지 않은 자들이란 건 안다. 나도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음. 일단 알겠습니다.”
“일단……?”
내 말에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으나, 더는 따지지는 않는다.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케이안이 회중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시간이 됐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안의 뒤를 따랐다.
유난히 조용한 저택 복도를 거닐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조용한 이유가 있었네. 가호식이 끝났으니 귀찮은 손님들도 다 갔겠어.”
“전부 돌아간 건 아닙니다. 배드니커의 커리큘럼을 수행하고 싶은 분들은 남으셨지요. 인원이 제법 됩니다.”
“그래? 그놈들은 지금 본가에 없나?”
“본가 저택은 아니고, 조금 떨어진 별채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흐음.”
배드니커의 커리큘럼은 악명 높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말만 교육이지, 실제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스갯소리로 수료 기간을 [절망의 6주]라는 이름으로 부를 정도니.
‘그래도 수료만 한다면 실력 향상은 확실하다고 하니.’
이토록 많은 영웅에게 수업받을 일이 흔하지도 않고, 야망이 큰 녀석이라면 받는 걸 선택할 거다.
‘세렌도 있다면 오해 풀기 좋을 텐데.’
물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세렌의 성격 때문은 아니고, 단순히 녀석의 가문이 굿스프링이라서.
자기 가문에서도 배드니커 못지않은 수업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굳이 남의 가문에서 눈칫밥 먹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1주일도 안 돼서 [재판의 방]을 두 번 방문한 건 도련님이 처음일 겁니다.”
분위기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해서일까, 케이안이 짐짓 농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나는 픽 웃으며 지난번에 보았던 [재판의 방]의 풍경을 떠올렸다.
오늘도 철혈공이 있을까?
그보다 철혈공은 원로회가 나를 소환해서, 따져 묻는 것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은 걸까.
그럴 확률이 높다.
나한테 호기심을 가진 것과 별개로, 자식의 위기에 따뜻한 도움을 주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도착했습니다.”
[재판의 방] 특유의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때와 다른 점은, 방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점이었다.
두 명이었다.
나는 그들의 차림새를 보고 한눈에 정체를 깨달았다.
‘징수인?’
그것도 둘 모두 상당한 실력자다.
앞서가던 케이안이 멈칫했으나, 그들에게 딱히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왼쪽 남자가 우리를 보았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었는데, 입가엔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재판의 방]엔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오후에 이 아이의 청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루안 도련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선 순간이다.
두 남자가 한 발자국씩 움직여 서로의 간격을 좁혔다.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입장을 가로막는 모양이 됐다.
“무슨…….”
“실례지만, 부인. 오늘 출입을 허락받은 건 루안 도련님뿐입니다.”
“하지만 원로회의 청문엔 보호자 한 명의 동참이 허락된다고…….”
“일반적으로는 그렇지요. 이번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렇게 두루뭉술 말하면 납득할 수 없습니다.”
“…….”
왼쪽의 남자가 난처한 듯 웃으니, 오른쪽 녀석이 말했다.
“물론 배드니커의 가법은 엄격하며, 어떤 순간에서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쪽은 훨씬 무뚝뚝한 인상이다.
“단 한 명을 제하고는요.”
“……!”
그러자 어머니가 흠칫했다.
당연하지만, 배드니커에서 그런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혈공의 명령인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석연찮다.
앞서 생각했듯이, 철혈공은 내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딱히 방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로선 어머니의 동참을 막을 이유가 없을 텐데.
“루안 도련님, 들어가시지요.”
“…….”
시간이 얼마 없는 듯하다.
나는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그냥 저 혼자 다녀올게요.”
“괜찮겠느냐?”
“물론이죠.”
애초에 나로선 이쪽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내가 다가서니 징수인 둘도 길을 터 줬다. 뿐만 아니라 직접 문까지 열어 줬다.
저벅-.
그리고 나는 다시금 [재판의 방]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