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재판의 방] 내부는 전에 봤을 때와 똑같았지만, 오늘은 초장부터 조명이 좀 밝다.
그건 그렇고 여전히 거슬리는 배치다.
어떤 의미에선 악의가 느껴질 정도.
죄질과 관계없이, 아래에 선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죄인의 심정을 느끼게 하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
어쩐지 지난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나는 벽 위를 올려다봤고, 그 이유를 곧바로 깨달았다.
오늘 벽 위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청록색 머리카락을 해초처럼 늘어뜨린 젊은 남자다.
대마법사 아사드.
은둔자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 웬만한 일로는 보기 힘든 남자인데, 저자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왔구나.”
심지어 말투를 보니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멀뚱히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배드니커의-.”
“딱딱한 인사는 됐어.”
“예.”
“앉아.”
아사드의 말에 나는 지난번에 물건을 올려놨던 테이블 위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이쯤 되면 내 전용 좌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아사드를 보며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원로회는 어디 있습니까?”
“눈앞에 있잖아.”
“아사드 님도 원로회였나요?”
“정식은 아니지만, 일단 소속은 되어 있지. 명예 회원 형식이랄까.”
이건 몰랐던 사실이다.
아사드는 심드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은 듯한 낯짝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나에 대한 흥미는 일절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딱히 이상한 반응은 아니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대체로 머리에 나사가 한두 개씩 빠져 있어서, 흥미 없는 건 길바닥의 개똥보다 못한 취급을 한다.
나는 개똥까진 아니고, 대충 도로의 잡초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 루안 배드니커, 우선 몇 가지 사실부터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할까.”
“네.”
“보석 산맥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 송곳니기사단의 배신과 그 정체, 도검선생 칼자크와의 만남, 그리고 델락의 말에 의하면 이후 보석수 토벌에 결정적인 공헌을 올렸다고 들었는데, 이는 모두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이후 해당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로회에게 증명 방식으로 대련을 요구했다. 이 또한 사실이고?”
“맞습니다.”
아사드의 말엔 건조한 진실만이 담겨 있었다. 왜곡되고, 부풀려진 헛소문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진실 말이다.
태도를 보니 딱히 엄한 판정을 내릴 것 같지도 않고.
케이안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일까?
“좋아.”
아사드가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괬다.
“원로회가 억지를 부린 것 같긴 하지만, 대련에 관한 얘기만큼은 네 입으로 직접 꺼냈군. 그리고 배드니커의 핏줄이라면 한번 입에 담은 말엔 응당 책임을 져야 하는 법.”
“…….”
“네 상대는 철혈기사단의 견습 기사가 될 거야. 괜찮겠지?”
견습 기사라니.
틀림없이 단원 중에서도 강한 놈을 보낼 거라 예상했는데.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아사드가 귀찮음이 팍팍 느껴지는 눈빛으로 압박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 대련은 너만 괜찮다면 지금 진행하려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면 하루 이틀 정도는 미룰 수 있다.”
“아뇨. 지금 하죠.”
“그럼 정원에 있는 연무장으로 와라. 지금 당장.”
슉-.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사드는 사라졌다.
마법을 쓴 건가?
‘이왕이면 같이 좀 데려가 주지.’
나는 투덜거리며 재판의 방을 나섰다.
* * *
당연하지만, 더럽게 큰 배드니커의 본가답게 여기 연무장은 한두 개가 아니다.
내가 알기만 최소 7개는 있었는데, 그중 대련이 열리는 곳을 찾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딱 한 연무장에만 사람이 바글거렸기 때문이다.
“뭐야?”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내가 멍청히 서 있는데, 군중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하나 걸어왔다.
아르잔이다.
“아, 도련님.”
“이게 뭔 일이야?”
“못 들으셨습니까? 원로회에서 본가 전 구역에 공지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루안 도련님의 [증명의 대련]이 열린다고.”
증명의 대련은 또 뭔.
멍하니 아르잔을 설명을 들어 보니, 내가 아사드와 대면하고 있을 때 본가 전체에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잔가지를 떼고 설명하자면.
- 본가의 제4연무장에서 대련이 열릴 예정이고, 대련자는 루안 배드니커. 새로운 가호를 손에 넣은 루안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자리가 될 것.
- 여유가 있다면 참관할 것을 권장함.
포장은 잘했지만, 비공개로 진행해도 될 일을 굳이 키우는 의도는 빤히 보였다.
“아예 나를 묻어 버리려고 하네.”
“도련님에겐 좋은 기회입니다.”
아르잔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큼 보는 이가 많다면 경기 결과를 묻거나 조작할 수도 없을 겁니다. 보십시오. 단순히 기사나 사용인만이 아니라, 대사범들까지 참관하고 있습니다.”
아르잔이 가리키는 곳엔 무게 잡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대사범인가.’
저렇게 다 모인 걸 보는 건 나도 처음이다.
“어머니는?”
“케이안 경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 잘 좀 부탁할게.”
“예.”
대충 아르잔의 어깨를 두드린 다음 연무장으로 향하는데.
“루안 도련님.”
한 번 들었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까 [재판의 방]을 방문했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녀석이다.
두 놈 중에서 무뚝뚝하게 생겼던 쪽.
“시간이 다 됐습니다. 연무장에 오르시지요.”
“알았어.”
“갑옷은 착용하지 않으십니까?”
“갑옷? 이거 대련 아니야?”
“예. 하지만 배드니커의 대련은 가혹합니다. 운이 나쁘면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지요.”
나는 잠깐 고민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후회하실 텐데요.”
말투가 뭔가 띠꺼운데.
내가 빤히 바라보니 툭 덧붙인다.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연무장으로 올라섰다.
관절을 비틀며 몸을 풀고 있는데, 반대쪽이 어쩐지 술렁거리는 게 들렸다.
뭔가 싶어서 주목하는데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낯짝이 걸어 나왔다.
“도망치지는 않았군.”
같은 피가 흐르지만, 딱히 나와 닮지는 않은 얼굴.
딱히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내가 말했지. 조만간 교육해 주겠다고.”
“헥토르.”
“헥토르?”
“…형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상대는 철혈기사단의 단원이라고 하던데요.”
“맞다. 나 또한 기사단의 일원이지. 작년에 입단했다.”
“음.”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다.
당연히 이 모든 일이 우연은 아니겠고.
원로회와 헥토르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게 아닐까. 두 쪽 다 내가 개박살 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원로회로선 나를 두들겨 패도 뒷말 안 나오는 인재를 확보한 셈이고…….
헥토르는 내도록 거슬렸던 나를 참교육할 기회.
“지금이라도 갑옷을 착용하시겠습니까?”
옆에 있던 녀석, 아마도 심판임이 분명한 남자가 다시 물었다.
이제 보니 이 징수인은 싸가지가 없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 준 것 같다.
“됐어.”
그래도 딱히 생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깟 방어력 좀 높이고자 기동성을 떨어뜨릴 순 없다.
사람에겐 각자 맞는 전투 방식이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기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음… 검.”
맨몸으로 싸우려다가, 일단은 생각을 바꿨다.
금방 기사 한 명이 적당한 길이의 검 한 자루를 가져왔다.
나는 쥔 검을 뽑은 다음 대충 휘둘러 봤다.
‘검에 수작질을 부리진 않았네.’
아무리 그래도 헥토르나 원로회가 그렇게까지 비열하지는 않겠지.
“오늘 대련의 공증인을 맡은 제인입니다.”
무뚝뚝한 징수인의 이름은 제인이었다.
꼭 여자 같은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이번 대련의 목적은 어쩌고저쩌고, 대련의 형식이므로 언제든지 끼어들 수 있블라블라, 다치는 건 상관없지만 결코 목숨을 뺏어선 안 된다는 뻔한 말이 오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양측, 앞으로.”
나는 검을 칼집에 꽂고 헥토르와 나란히 섰다.
그때까지도 헥토르는 썩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만 웃고 진지하게 붙읍시다.”
“뭐?”
“참교육할 생각에 설레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대련이잖습니까.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야죠.”
이건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스승님조차 교육이 아닌, 대련이라는 틀에서 나를 가르칠 때는 어느 정도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하하.”
내 말에 헥토르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조소는 전염이라도 되는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졌다.
지금 보니 사방을 둘러싼 건 대부분 철혈기사단이었다.
‘들러리 준비까지, 아주 철저하시구만.’
헥토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 상대에겐 매사 최선을 다해야지. 하지만 넌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주제를 알아라.”
“아, 예.”
이런 놈을 상대로는 무슨 말을 하든 소용이 없어서 대충 고개만 까닥거렸다.
헥토르는 그런 태도마저 아니꼬운지, 표정을 굳혔다.
“-대련, 시작.”
탓!
제인의 신호와 동시에 헥토르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그보다 더 빠른 건 발검 속도였는데, 마치 소리를 두고 움직이는 것 같다.
시퍼런 칼날이 눈 깜박할 사이 코앞까지 당도해서, 일단 쳐냈다.
까앙!
헥토르는 살짝 놀란 얼굴이 됐으나, 금방 폭풍처럼 공세를 이어 갔다.
나는 일단 수비에 집중하며 헥토르의 검술을 관찰했다.
‘본가의 비전 검술인가?’
그렇다기엔 특징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마도 본가 검술에 영감을 얻고 창안한, 헥토르의 독자적인 검술이 아닐까?
‘강맹하고 폭발적임, 대체적으로 공격 일변도.’
한번 주도권을 뺏기면 쉽게 가져오기 힘든 종류의 검술이다.
과연 천재라고 불리는 녀석답게 전체적인 검술의 완성도가 무척 높은 편이었다.
짤막한 교전 속에서, 나는 검술로는 헥토르를 당해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까앙!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얼마 안 가 나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면을 나뒹구는 검을 보며 헥토르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일순 공세까지 굼떠졌다.
빙글빙글 웃는 낯짝은 마치 어디를 공격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 잡은 물고기 취급이랄까.
“허.”
내 입장에선 어이가 없어서 조소가 살짝 새어 나왔는데, 그러자 헥토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남 비웃기 좋아하는 놈일수록 자신이 비웃음당하는 건 못 참는 법이다.
나는 헥토르의 입이 열리기 직전 지면을 박찼다.
일순 헥토르의 눈동자가 큼지막하게 떠지더니, 검을 쥔 손이 움찔하는 게 보였으나 내 주먹이 더 빨랐다.
퍼억- 면상을 얻어맞은 헥토르가 휘적이듯 날아가더니, 연무장 위에 엎어졌다.
“…….”
“…….”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쪼개지 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