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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1화 (51/172)

51화

헥토르가 얼빠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주륵 코피가 흘렀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잘생긴 놈이라도 쌍코피를 흘리면 저렇게 우스워진다.

“너-.”

벌떡 일어난 헥토르가 다시 공격해 왔다.

기세 자체는 더 강맹해졌지만, 감정적인 공세라 읽기가 쉬웠다.

나는 어렵지 않게 회피하며 물었다.

“이 검술은 이름이 뭐야?”

“닥쳐!”

“아하. 닥쳐 검술.”

헥토르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무리 철혈공의 자식에, 재능이 특출난 놈이라도 실전 경험이 떨어지면 이 꼴이 된다.

간단한 도발에도 이성을 상실하는 것.

사실 상대가 나만 아니었어도 헥토르가 이 꼴이 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할 거냐!”

“내가 피하기만 했으면 네 코도 멀쩡했겠지?”

“닥쳐!”

“이름은 이제 알겠다니까.”

헥토르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진 순간.

“헥토르-!”

어딘가에서 호통을 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힐끗 구경꾼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알게 모르게 헥토르와 닮은 장년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헥토르의 외가 쪽 사람인가.’

아무튼 저 외침 때문에 헥토르는 냉정을 되찾은 듯하다.

여전히 화가 난 표정이었으나, 잠깐 공격을 중단한 채 호흡을 가라앉히는 게 보였다.

사실 승부를 빨리 끝내기 위해선 이 틈에 공세를 잇는 게 좋지만, 나는 불현듯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나저나 형님은 왜 날 그렇게 싫어합니까?”

“뭐?”

“이 악물고 귀찮게 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헥토르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보이는 그 버릇 없는 태도가 내 분노에 부채질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나?”

“지랄 마시고. 내가 비굴하게 굴었을 때도 날 싫어했잖아요.”

“…….”

“헥토르 형님, 댁은 누가 좀 재수 없게 군다고 이렇게 정성 들여 엿 먹일 위인이 못 됩니다.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헥토르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검을 잡은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잠시간의 침묵 후,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위대한 가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뜬금없는 화두였으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2,000년 전에 암흑 교단을 몰아낸 영웅들, 그 후손이요.”

“축약해서 말하면 그렇지. 황가는 물론이고 굿스프링과 배드니커, 이외에도 가호식에 참가한 모든 가문이… 진하건, 옅건. 위대한 선조의 피를 잇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호란, 그 어떤 혈통서보다 확실한 증거지.”

“증거?”

헥토르는 돌연 검을 바닥에 꽂았다.

쿠구국…….

그 순간 지면이 출렁거렸다.

“위대한 영웅들의 피를 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 말이다.”

마치 여진이라도 일어난 듯하다.

다행히 이곳에 있는 자들은 이게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모두 알고 있기에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쩌적, 저적!

연무장이 가뭄이라도 온 땅처럼 갈라졌다.

나는 흔들리는 지면 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과거 2,000년의 세월 동안, 그 많은 이들 중에서 무가호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루안 배드니커. 네가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말이야.”

까드득.

헥토르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일렁였다.

“아버지가 그 일로 [위대한 가문] 사이에서 얼마나 치욕을 당하셨는지 알고 있나.”

“치욕?”

“저급한 것들이 아버지의 혈통을 폄하하고, 모욕했다. 선조의 피가 옅다느니, 영웅이 아니라느니, 실은 잡종이라느니……. 그딴 개소리를 지껄여 댔지.”

그제야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말했다시피 헥토르에게 있어 철혈공은 신이고, 이놈은 광신도다.

내 개인적인 관점으론 앙신을 모시는 숭배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인데, 아무튼 난 이놈의 유일신을 욕보이게 만든 존재다.

과할 만큼 나한테 지랄을 떨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네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너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참았지. 아버지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하지만 너는 그 더러운 발로 본가에 다시 발을 들였다.”

“그래서 가호를 받는 데에 성공했잖아요.”

“오늘 네가 죽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겠지.”

헥토르는 바닥에 꽂았던 검을 다시 뽑은 뒤 나를 겨냥하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칼날의 궤적.

이번엔 뭔가 다르다.

푸슛!

피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닿지도 않은 어깨에서 갑자기 핏물이 솟구쳤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헥토르의 검을 보았다.

아까 봤던 검술과 달리, 이건 뭔지 확실히 알겠다.

‘이게 잔영검殘影劍인가?’

이놈이 아마 열네 살쯤에 창안한 검법이다.

칼날에 주입한 마나에 독특한 간격으로 변화를 줘서, 검기에 불규칙적인 변형을 주는 것.

즉 이 검법을 상대할 때는 실제 칼날은 물론이고, 마나로 만들어진 검기까지 경계해야 한다는 뜻인데.

쐐액!

가호를 두르기라도 했는지 헥토르의 움직임은 전보다 빨라졌다.

칼날에 담긴 살기도 점점 강해지고 있어서 도무지 대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까다로운 검술이긴 한데.’

위협적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처음엔 내 몸에 작은 상흔들이 하나둘씩 생겨났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상처가 늘지 않았다.

공격이 눈에 익은 시점부터 그렇게 됐다.

짤막하게 감평하자면, 발상은 좋은데 숙련도가 아쉬운 느낌.

기껏 불규칙적인 검술을 창안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용하는 놈의 심리가 단순해서 다 예측이 갔다.

여러모로 지금의 헥토르에겐 이른 검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차라리 처음의 강맹한 검술을 고집하는 게 더 나았을 수도.

물론 친절하게 조언할 의리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영검의 구경이 끝난 시점부터, 나는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러자 헥토르의 표정이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잔영검을 전력으로 펼치는데 오히려 거리를 좁혀 오는 상대는 처음인 모양이다.

곧 헥토르의 검엔 초조함과 짜증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까득.

그리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순간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옆구리에 빈틈을 만들었다.

타이밍도 환상적이라서, 헥토르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검을 뻗었다.

내가 파놓은 함정에 전력으로 투신한 셈.

나는 즉시 상체를 비틀어 검을 피했으나, 이번엔 단순히 회피하는 걸로 끝내지 않았다.

콱!

즉시 팔뚝을 닫아 헥토르의 검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다.

“뭣!”

헥토르는 진심으로 놀란 것 같다.

아무리 검면을 잡은 셈이라지만 위험한 행위인 건 변함없다.

도끼로 면도를 하겠다고 굴면 누구나 말리려는 것과 같은 느낌.

게다가 헥토르는 여전히 잔영검을 발현하고 있는 상태라서, 나도 겨드랑이가 좀 쑤셔왔다.

오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헥토르가 당황할 동안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빠악!

턱뼈가 작살났나? 감촉으로는 그렇다.

주춤하던 헥토르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으나,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게 그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흔히 병장기를 다루는 자들의 싸움을 근접전이라고 말하지만, 맨손을 쓰는 내게 있어선 검도 중거리 무기다.

즉 나는 대련이 시작하고 처음으로 내 간격에 헥토르를 뒀다.

“……!”

헥토르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지면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이 상황에서도 검을 놓지 않은 근성만큼은 높이 사줄 만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너진 구도를 뒤집을 수 없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헥토르가 거칠게 검을 놓은 다음 내게 손을 뻗었으나, 나는 다른 손으로 쳐내며 입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줬다.

뿌드득.

“──!”

헥토르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게 느껴졌다.

“살짝만 더 힘주면 턱뼈가 아예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한 달 동안 죽만 먹은 적 있어?”

“──!”

딱 한 번 정도는 해볼 만한 경험이다.

이때 헥토르의 눈동자에 샛노랗게 빛나더니, 엄청난 힘으로 나를 밀쳐냈다.

‘가호인가?’

육체 능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는 종류 같은데, 이제야 쓰는 이유가 뭘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나 같은 놈한테 쓰기 싫어서.’

아마 둘 다겠지.

맹렬하게 달려오는 헥토르를 보자니 어쩐지 하리바가 떠올랐다.

힘은 용솟음치는데, 그걸 어떻게 제어하는지 모르는 느낌?

전체적인 육체 성능은 한두 단계 올랐지만, 나로선 이쪽이 더 상대하기 쉽다.

‘맨몸 무술도 어느 정도 익힌 것 같은데.’

움직임을 보니 아예 막 싸우는 건 아니다.

그래도 검술에 비하면 수련 시간도, 깊이도 형편없다.

퍼퍼퍽, 나는 헥토르의 어설픈 공세를 피하며 사이사이에 한 대씩 주먹을 꽂았다.

특히 얼굴을 중점적으로 때렸는데, 헥토르는 몇 대 처맞더니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된 모양이다.

그나마 최소한의 틀은 잡혀 있던 동작에선 날카로움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볼썽사나운 허우적거림으로 바뀌었다.

“명치, 허리, 허벅지, 이마, 다시 허리. 뭐 하냐? 전신이 빈틈투성인데, 주먹질을 누구한테 배웠길래 이렇게 어설퍼?”

내 태도가 많이 유치하고 감정적인 게 스스로도 느껴졌지만 딱히 자제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이왕 어려졌으니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한두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느새 헥토르의 꼬락서니는 차마 두 눈 뜨고 못 볼 만큼 처참해져 있었는데.

잔뜩 부어오른 얼굴에선 핏물이 뚝뚝 떨어졌고, 아마도 철혈기사단의 것으로 보였던 철갑은 고물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그 상태로 주둥이에서 괴상한 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도 말할 수는 있는지 입이 열린다.

“너, 누구, 냐…….”

한숨이 나왔다.

암살자 놈들도 그렇고, 나한테 처맞은 놈들의 반응은 왜 이렇게 죄다 같은지.

짜악!

나는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로 헥토르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리고 멱살을 잡은 다음 흔들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배드니커의 귀여운 막둥이잖아. 댁이 개무시했던 막내.”

“네가, 루안일 리, 없다…….”

얼굴이 퉁퉁 불어 터진 와중에도 제법 발음이 좋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아니꼬워서 뺨을 한 대 더 쳤다.

짜악!

그래도 눈빛이 살아 있어서 한 대 더.

생긴 게 띠꺼워서 한 대 더.

검은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 대 더 쳤다.

나는 미운 놈 빵 한 덩이 더 준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헥토르를 챙겨 줬다.

그러자 헥토르가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뭔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뭐라고?”

나는 때리는 걸 중단하고 그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여봤다.

“미, 미힌넘… 미힌넘…….”

발음이 샜으나 뭐라는지는 알겠다.

욕을 먹었다면 응대해 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한 번 더 헥토르의 뺨을 후려쳤고, 이 녀석은 그대로 까무룩 기절했다.

“수고했어, 헥토르.”

“…….”

“…형님.”

쓰러진 헥토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공증인 제인을 보았다.

제인이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

“-승자, 루안 배드니커.”

“…….”

“…….”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환호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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