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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2화 (52/172)

52화

배드니커의 원로회가 한자리에 모일 일은 드물다.

그들 모두가 한가하지 않고, 각자 맡은 소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호식이란 일대 행사는 그들 모두를 집합시키기에 충분한 이유가 됐으나.

행사가 끝난 후엔 맡은바 직무로 복귀한 이들이 대부분.

지금 [재판의 방]에 있는 원로가 다섯 명뿐인 이유였다.

“루안 배드니커가 이겼소.”

오늘 회의를 소집한 아게노르 배드니커가 입을 열었다.

“단순히 이긴 게 아니라 완승이라고 봐야겠지.”

“놀라운 결과입니다만, 헥토르는 원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승패엔 변함이 없소.”

“그래도 저는 루안이 싸우는 방식이, 조금 그렇더군요.”

아게노르는 그 말을 꺼낸 이를 보았다.

“그 말씀은?”

“…헥토르를 의도적으로 도발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엔 수비에 집중하다가, 일부러 평정심을 흩뜨릴 만한 언사를 내뱉었고요. 정정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정정당당이라.”

아게노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보시오, 제논.”

“네.”

“여기가 굿스프링이오?”

제논이라 불린 중년인의 표정이 굳었다.

“승부에선 승패만이 전부요. 물론 대련 전에 독을 탔다거나, 녹이 슨 검을 줬다거나. 그딴 개수작을 부렸다면 그건 비열한 행위가 맞지. 하지만 단순히 도발을 하고, 수세에 집중한 뒤, 상대의 평정심을 흩트린 건 일종의 작전이고, 전법이오.”

“…….”

“그대가 헥토르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소. 하지만 이곳은 배드니커의 원로회요. 공정함을 유지하시오.”

“…죄송합니다.”

제논 아나토스.

배드니커의 조력 가문 중 하나인 아타토스가의 가주이자 헥토르 배드니커의 외조부가 고개를 숙였다.

원로회는 기본적으로 수평적인 관계지만, 단 한 명- 아게노르 배드니커만은 예외다.

전전대 가주의 혈육이기도 한 저 사내는 실질적으로 이 원로회라는 의회의 의장이나 다를 바 없다.

때문에 원로회의 일원은 누구나 아게노르에게 경의를 품고 있다.

명예 회원인 아사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떨떠름한 승부인 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원로회 중 가장 젊은 필리스였다.

“루안 배드니커의 수준은 올해 초만 해도 평기사 이하였습니다. 반면 헥토르의 실력, 그리고 천재성은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제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루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발하며 담대한 심리전을 걸거나, 패배를 인정한 상대를 잔혹하게 짓밟는 행위를 할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맞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게노르는 이 말에 동의한 자들의 얼굴을 흘끗 눈에 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보석 산맥에서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루안 배드니커가 보고했던 사안을 말하는 거요?”

“예. 루안은 그때 말했습니다. 교단에서 보낸 암살자가 송곳니기사단의 기사로 위장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죽을 위기를 넘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일을 의심하는 것이오? 그때 루안의 증명은 가주께서 모두 진실로 판명하지 않았소.”

“예.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가 꺼냈던 말의 진실 여부입니다. 숨겨진 것까지는 알 도리가 없지요.”

그제야 아게노르는 필립스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다.

“루안이 교단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

“가정일 뿐이지만, 확률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의장님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단에는 영혼을 옮길 수 있는 사술도 존재한다는 것을.”

“…….”

“1년은 분명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루안의 변화는 극적입니다. 의심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말하고 싶은 바는 알겠으나 억지스러운 부분이 몇 있군.”

아게노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는다면 루안은 배드니커에 잠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심어둔 부하를 죽였다는 것이지 않소? 아무리 교인이라고 해도 너무 과격한데.”

“꼭 부하란 법은 없지요. 교단 내에 여러 파벌이 있단 건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인지하고 계실 터. 그들은 다른 파벌의 교인이라면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협력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겠지만, 돌아서면 적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아게노르는 필리스의 말을 대놓고 부정할 수 없었다.

필리스는 교단에 있어선 이 자리의 누구보다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때 한마디도 하지 않던 원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주님에게 한번 더 진실의 감별을 요구하는 것은…….”

“어렵겠지. 또한 만약 상대가 [앙신의 저주]를 받았다면 [진위의 가호]가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한다고는 볼 수 없고.”

“음…….”

아게노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오늘 의회에 참가한 이들은 그 자신을 포함해서 총 다섯.

그중에서 루안을 확실히 밀어내려는 자는 셋이고,

아게노르와 또 한 명은 중립이다.

원로회의 가결은 보통 과반수로 결정되니, 원래라면 저들의 의견에 힘이 더욱 실리겠지만…….

‘…….’

아게노르는 어쩐지 껄끄러운 느낌을 받았다.

‘끄나풀이라…….’

아게노르도 알고 잇다.

지금 배드니커에 쥐새끼가 있다는 건.

하지만, 그 인물이 누군지는 200년 이상을 살아온 아게노르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완전히 결백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두 명뿐이다.

철혈공과 대마법사 아사드.

즉…….

눈앞에 있는 원로회의 일원들도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렵군.’

이들의 요구는 의심스러운 동시에 타당하다.

만약 배신자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라면, 적어도 쥐새끼로 치부할 상대가 아니다.

아게노르는 고민을 마치고 눈을 떴다.

“말하는 바는 알겠소. 하지만, 이미 루안은 스스로를 증명했지. 우리에겐 재차 그를 압박할 명분이 없소.”

“일단 겉으로는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안이 우리의 의심을 덜어냈다고 생각하게끔.”

“그리고?”

“지속적으로 압박하면서 지켜보면 될 겁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본가의 교육 과정에 루안도 참가시키는 것이지요.”

배드니커의 교육 과정이라면 그 유명한 [절망의 6주]를 말하는 것이다.

“대사부들이라면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겁니다.”

“…그렇겠지.”

아게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안이 통과된 셈이다.

아게노르는 어린 배드니커에게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들었으나, 아주 잠시였다.

이 교육 과정은 루안에게 있어서 고난이겠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고-.

배드니커의 핏줄이라면 응당 그럴 수 있어야 한다.

* * *

헥토르 배드니커를 대련에서 완전히 박살 내고.

나는 환호도, 갈채도 울리지 않는 대련장을 떠난 뒤 그날 하루는 푹 쉬었다.

대련에서 소모한 심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잔영검 때문에 피를 좀 흘렸기 때문이다.

물론 염화제일공 덕분에 이까짓 출혈쯤은 하루면 모두 회복할 수 있다.

의외로 원로회 놈들은 조용하다.

또 한번 발광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니 반대로 꺼림칙한 느낌.

나를 인정한 걸까.

아니면 철혈공이 개입한 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어쨌든 헥토르를 박살 내니, 본가에서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복도를 거닐다가 사용인을 마주치면 정중히 인사를 해온다거나.

연무장을 지나칠 때 기사들이 경례를 보낸다거나.

본가 숙수가 특히 맛있는 고기 부위를 내준다거나.

내게 있어선 마지막이 가장 맘에 든다.

“요즘 통 부담스럽구나.”

나는 그랬는데 어머니는 아닌가 보다.

“어떤 점이요?”

“그냥, 저택 사람들이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뀌는 게 좀…….”

“속물적이라서요?”

나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놈들 잘못이 아닙니다. 철저한 실력주의가 배드니커의 가풍이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보았다.

“정말 괜찮겠느냐?”

“괜찮다니까요. 이제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겁니다. 어머니도 어제 보셨잖아요.”

“그래. 정말 뛰어난 가호를 받은 모양이더구나.”

어머니는 내가 갑자기 강해진 이유를 가호의 덕분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올해 초만 해도 배드니커의 무능아로 유명했던 놈이 천재라고 불리는 헥토르를 꺾은 셈이니까.

당장 풀 이유가 없는 오해다.

“그래도 굳이 여기 계속 머무를 이유가 있나 싶어서 그렇지.”

이유라면 있다.

아직 철혈공과 나눠야 할 얘기가 남았으니까.

물론 지금 당장 귀가해도 더 이상 징수인을 보낸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지금 내 새로운 목적은 잊힌 시대나 마왕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배드니커의 본가에 많겠지.’

“…그래. 몸조심하거라, 루안.”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어머니의 옆에 선 아르잔을 보았다.

아르잔은 어머니를 안전하게 저택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 이후엔 다시 본가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나를 보필한다는데… 까놓고 말하면 조금 부담스럽다.

딱히 수하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서 그렇다.

물론 아르잔은 여러모로 유능한 녀석이니, 곁에 두면 편한 구석은 많겠지만…….

어쨌든 이번 귀갓길은 산맥을 통하는 것도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릴 터.

일단은 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산맥 하니 떠오르는 인물도 있다.

칼자크.

‘그 양반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물론 상대는 제사장이고, 보석수 토벌 직후라 많이 지쳐 있을 테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칼자크가 살 확률은 높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대사범이지 않나.

철혈공조차 인정한 남자가 그렇게 쉽게 죽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시 뵙겠습니다, 도련님.”

“그래.”

어쨌든 어머니, 아르잔과 짧은 일별을 마치니 내 옆에 남은 건 케이안뿐이었다.

“…음. 케이안 경도 고생이 많았어.”

새삼스레 둘이 있으니 좀 어색하다.

과거에 내 팔 힘줄을 한 번 끊었던 존재라서 그런가.

이런 걸 감추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서, 나는 직설적으로 내 심정을 토로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상황이 좀 당황스럽군.”

“어떤 점이 말입니까?”

“경이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유 말이야.”

그 밖에도 돌연 은퇴한 거나, 내가 없을 때 어머니를 도운 것…….

진작부터 묻고 싶었던 것들이지만, 여태까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야?”

“딱히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내가 가만히 뒷말을 기다리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각에선 저더러 철혈이니, 완벽이니. 과분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지만 사실 전 그리 대단한 인간이 못 됩니다. 징수인 일을 오래 한 것도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지요.”

케이안의 뜻밖의 고백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럼 징수인을 관둔 건, 이제 할 일을 찾아서 그런 거야?”

“그런 셈입니다.”

“그게 뭔데?”

그러자 이 강직한 노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망설임이 피어났다.

“…언젠가 도련님이 백일식을 완성하면 말입니다.”

“응.”

“제 딸을 한번 만나 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말이 튀어나왔다.

“딸이 있었어?”

“수양딸이지만요.”

“아하.”

징수인은 대체적으로 가족을 만들지 않는다. 원한을 살 일이 많아서 그렇다.

아마 케이안에게 수양딸이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거다.

나는 갑자기 뜻밖의 비밀을 접한 상황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딸이 누군데?”

“카엘라라고 합니다. 도련님도 이름쯤은 들어 보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저 이름 석 자를 들은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용병왕 카엘라를 말하는 건 아니지?”

그러자 케이안이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이름으로 불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용병 업계에 관심이 없다면 모르실 텐데…….”

“…….”

이 시점에선 그런가 보다.

그러나 나는 모를 수가 없다.

훗날 가문에서 쫓겨난 내가 용병질을 하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용병왕 카엘라.

그 더럽게 넓고, 험한 업계에서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강자.

아직은 아니지만, 추후 몇 년 이내로 제국 최강을 논할 때도 슬그머니 그 이름이 거론될 만큼의 거물이 된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선 철혈공과 동급인 괴물이라는 뜻이다.

“그 딸분이랑 제가 만나서 뭘 하라고?”

“겨루시고, 가능하시면 꺾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요?”

“예.”

케이안이 말했다.

“배드니커에서 수많은 천재를 보았습니다만, 그들이 그 아이를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가주님이 있잖아.”

“아직 발전 도중의 인재 중에서 말입니다.”

“그럼 경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는데, 케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백일식을 목격했을 때,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를 모르겠군. 딸이 잘나가면 좋은 거 아니야? 왜 패배를 바라는 건데.”

“그 아이의 친부와 한 약속이 있습니다.”

“…….”

이건 더는 묻지 말라는 시그널이지만, 어쩐지 이 기회에 안 물으면 들을 기회를 놓칠 것 같아서 물어봤다.

“무슨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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