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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3화 (53/172)

53화

“죄송합니다. 그건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설마 대놓고 거절할 줄이야.

이럼 아무리 얼굴 두꺼운 나라도 더 파고들기 힘들다.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중얼거렸다.

“너무 어려운 임무잖아.”

“승리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언젠가 그 아이와 한번 겨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대련의 형식일 테니 목숨을 잃을 일도 없겠지요.”

“음…….”

그렇다면 싸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인데, 대체 케이안의 의도가 뭘까?

딱히 예상 가는 바는 없지만, 별개로 케이안에게 안 좋은 꿍꿍이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함정이라기엔 너무 비효율적이고 해괴하니까.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속으로 계산을 때려 보았으나 결정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단순했다.

호승심.

언젠가 제국 최강으로 거론될 거물과 싸울 기회라면,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언제 싸우면 되는데?”

“되도록 스무 살 이전에 결판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앞으로 여유 기간은 5년, 아니. 올해는 이제 다 갔으니 4년 남은 셈인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려다가, 눈앞에 케이안이 서 있는 걸 보며 멈췄다.

“참. 가르쳐 준 암보는 잘 쓰고 있어. 내 식으로 좀 변형하긴 했지만.”

“그것은 흥미가 생기는군요.”

“나중에 보여 줄 테니 가감 없이 감평해 달라고. 그리고 이것과 별개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주인님.”

“…….”

도련님이 아닌 주인님.

단순히 호칭만 바뀐 게 아니다.

케이안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내게 예우를 갖췄다.

어쩐지 방금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 케이안이 날 배신할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쩐지 오묘하다.

배드니커의 인물 중 케이안을 직속 수하로 삼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은 이는 없을 거다.

비록 케이안은 스스로를 폄하했으나, 한 가문에 수십 년 동안 충성하며 맡은 바 직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건 대단한 일이 맞다.

심지어 그 일이 배드니커의 업무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징수인이라면 말하는 것도 입 아픈 수준.

그래서 나는 내 목적을 거리낌 없이 밝힐 수 있었다.

“앙신에 관한 정보가 필요해.”

“마왕 말입니까?”

“응.”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케이안이 잠간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본가의 도서관을 이용하시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본관 1층에 있는 도서관 말이지?”

“예.”

“그런 데서 얻을 수 있는 건 일반적인 정보뿐이잖아. 내가 말하는 건 좀 더 심층적인 것들이야. 앙신의 정확한 생김새나 강함, 특징, 실제 제국에 끼친 피해, 여태까지의 행적,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금의 소재까지.”

“…….”

그제야 케이안의 표정이 바뀌었다.

“…말씀하신 것들은 기밀 중의 기밀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알아내려고 노력해도 그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정보지요.”

나도 안다.

그래서 묻는 거고.

“도련님이라면 언젠가 분명 재능을 인정받고, 본가의 지하도서관에도 출입할 수 있을 테지만…….”

배드니커의 지하도서관에는 제국에서도 몇 권 없는 귀중한 서책이나 무술 참고서가 잔뜩 있다.

물론 그런 만큼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지금 시점에선 철혈공의 자식 중에서도 열람을 허락받은 게 한 명도 없을 거다.

케이안도 그걸 아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너무 먼 미래군요. 제 예상이 맞다면 최대한 빨리 정보를 얻고 싶으신 듯한데.”

“정확해.”

“제 생각엔 일단 영웅 자격을 획득하시는 게 가장 빠른 길 같습니다. 단순히 명함뿐인 영웅이 아닌, 정식으로 [헤로스]에 소속된 영웅 말입니다.”

“음.”

대단히 정석적인 대답이 나왔다.

[헤로스]는 제국 최대의 영웅기관이다.

엄격한 시험을 거친다면 누구든 입관할 수 있는 곳.

이곳엔 위대한 가문은 물론이고, 황족, 귀족, 평민, 심지어 노예에 이종족까지 다양하게 소속되어 있다.

그야말로 제국 최대 규모의 기관인 것.

헤로스가 가진 영향력은 엄청나다.

제국 황실은 물론이고 제국 4대 종교조차 헤로스의 의사에 대놓고 거부할 수 없을 정도.

“정식 영웅이 되려면 시험에 수습 기간까지, 합쳐서 최소 1년은 필요하잖아.”

아무리 내가 어려졌대도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다.

영웅이 되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는 건 나로선 꺼려지는 일이란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도련님에겐 그 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습니다.”

“뭔데?”

“수련회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수련회?”

예상 밖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6주 동안 치러지는 배드니커의 교육 과정 말이야?”

“그렇습니다. 배드니커에겐 영도 교육기관의 자격이 있습니다. 별도의 시험을 거쳐서, 임의대로 영웅의 자격을 줄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게 가능해?”

“배드니커니까요.”

재수 없기는 해도 사실이다.

제국을 수호하는 두 가문 중 하나.

“수료만 하면 되는 거야?”

“수료 성적 상위 3인에게만 주어지는 자격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잘 알겠어.”

6주라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다.

게다가 수련회는 배드니커의 본가에서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자연의 기운이 충만한 땅에 머물 수 있다면 내게도 나쁠 게 아니다.

어쨌든 이곳은 보기 드문 수련의 명소인 것이다.

“그리고 가주님에게 직접 여쭤보는 방법도 있겠군요.”

“가주님에게?”

“예.”

케이안이 말을 이었다.

“가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거나, 혹은 지하도서관의 출입을 허락해 주신다면, 배드니커의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가주님께선 이번 가호식에서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지요. 언제 귀가하실지는 알 수 없으니, 일단 대사범 과반수의 허락을 받거나 혹은 아사드 님께 직접-.”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철혈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군, 루안.”

“아, 예.”

“식사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점심을 먹기엔 조금 늦었지만, 지금 바로 가능하겠나. 저녁부턴 일이 있어서.”

“좋습니다.”

“편히 입고 3시까지 5층으로 오도록. 기다리겠다.”

“예.”

철혈공이 문득 케이안을 보더니 말했다.

“케이안, 은퇴하더니 얼굴이 좀 좋아졌군. 이번 식사에 초대하지 못하게 돼서 유감이네.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예, 예?”

“방해해서 실례했다.”

그리고 철혈공이 문을 닫고 떠났다.

나도 당황스러웠지만, 옆엔 나보다 백 배는 더 당황한 듯한 케이안이 갑자기 자기의 뺨을 후려쳤다.

“뭐 하는 거야?”

“…꿈은 아닌데?”

“…….”

* * *

나는 케이안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혹시 모르니 이것도 가져갈까.’

나는 침대 밑에 넣어 뒀던 칠죄검도 챙겼다. 철혈공을 가까이서 보면 무신의 의식이 다시 깨어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기회가 돼서 잊힌 시대에 대한 걸 묻게 되면 조언을 받을 수도 있고.

다행히 지금 칠죄검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장난감 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경계를 받을 일은 없을 거다.

미친놈 쳐다보듯 보겠지만, 그런 시선은 익숙하니 괜찮다.

나는 준비를 마친 채 전장에 나서는 기사의 심정으로 5층을 향했다.

그렇다.

무려 배드니커 본관의 5층이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3층.

그 제한된 인원 중에서도 더욱 한정된 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4층.

그리고 5층.

5층에 관해선 떠도는 말이 없다.

소문조차 돌지 않는 장소기 때문이다.

본관 5층은 온전히 철혈공만의 영역이고, 허락받지 않은 자는 설령 원로라고 해도 출입이 불가하다.

내가 알기로 5층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는 건 가주를 빼면 대대로 가문의 수호자였던 아사드뿐이다.

그래서 나는 4층- [재판의 방]을 향할 때보다 더 호기심이 들었다.

어쨌든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낯짝과 마주쳤다.

“너……!”

헥토르가 큼지막한 눈을 하며 내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삿대질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나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갔다.

“안녕, 형님. 회복은 잘되고 계셔?”

“…네가 그걸 묻는 거냐?”

“왜. 직접 팼으면 안부도 못 묻나.”

어쨌든 나는 헥토르에게 큰 유감은 없다.

아르잔을 후려치고 짜증 나는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반쯤 죽여 놓은 걸로 일단 감정은 모두 해소했다.

물론 여기서 또 개소리를 지껄이면 해소된 감정이 다시 쌓이겠지만, 일단 당장은 괜찮다는 뜻이다.

“얼굴 좋네. 하루 만에 회복될 상처는 아니었는데.”

“…고위 신관을 불렀다.”

“아하. 돈지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외가가 상당히 잘나가는 집안이었다.

주로 금전적인 의미로 말이다.

“당분간 본가에 지낼 것 같으니 종종 인사나 하자고.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말고, 적당히.”

사실 이건 헥토르만이 아닌 내 모든 형제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아예 죽자 살자 싸울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형제간의 찐득한 우애를 쌓고 싶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오고 가며 인사나 하는 사이.

딱히 이 녀석한테 더 할 말도 없어서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헥토르가 갑자기 물어왔다.

“어딜 가는 거지?”

“5층.”

“뭐? 거기는 왜…….”

“가주님이랑 밥 한 끼 하러.”

그러자 헥토르의 얼굴이 아주 우스꽝스러워졌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낯짝이다.

헥토르가 떠듬떠듬 말했다.

“네가 아버지랑 왜 식사를…….”

“초대해 주셨으니까?”

“대체 언제…….”

“몰라. 그보다 좀 비켜 봐.”

그걸 말하려면 가문의 금지에서 철혈공과 마주친 얘기까지 해야 한다.

당연히 그런 걸 이놈한테 말해 줄 이유는 없어서, 음침하게 웅얼거리는 헥토르를 지나치려는데 이놈이 미쳤는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

“아, 아니. 잠깐만 기다려라.”

내 표정을 보더니 황급히 손을 놓는다.

그래도 몇 대 처맞으니 머릿속에 예의란 항목이 생성된 모양이다.

나도 그렇고, 이쯤 되면 배드니커의 인성 교육엔 반드시 주먹이 필요한 게 아닐까.

“뭐야?”

“나도… 나도 함께 가겠다.”

“그러시든가.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건…….”

헥토르가 굳은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나도 5층으로 가야겠어.”

“알았어.”

나는 뜻밖의 동행인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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