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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4화 (54/172)

54화

4층 계단을 지나 5층에 발을 디딘 순간.

갑자기 주변 풍경이 확 바뀌었다.

마지막 계단을 딱 오른 순간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저택 내부였던 풍경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자락으로 변했다.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희한하네.”

환각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현실적이다.

어둑어둑한 하늘과 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새? 자세히 보니 박쥐 같다.

아무튼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의 절벽이다.

“너, 5층엔 처음 왔나 보군.”

어쩐지 헥토르가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5층은 매번 풍경이 바뀐다. 내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던 해변가였지.”

“환각 마법이야?”

“글쎄…….”

넓은 장소였으나, 다행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절벽 끝자락엔 뜬금없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데서 먹을 게 목구멍으로 넘어갈지 모르겠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영산의 꼭대기에서도 밥은 잘 먹었다.

나는 헥토르와 서로를 바라본 다음, 그곳을 향해 걸었다.

“왔구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철혈공이 특유의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왔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힐끗 양쪽을 보았다.

철혈공만 있는 게 아니었다.

둥근 테이블의 양쪽에도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잘 알고 있는 낯짝들이다.

장남인 히이로 배드니커.

차녀인 네로 배드니커.

명성만 따지자면 헥토르 이상인, 철혈공의 자식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두 자녀가 되시겠다.

‘이 녀석들도 본가에 있었나?’

그럴 리는 없다.

이 둘은 현역 영웅이고, 이미 제국 어디서든 이름만 대도 알 만큼의 명성을 쌓았다.

내가 알기로는 철혈공만큼이나 바쁠 터.

즉 이 절벽은 환각 따위가 아닌 아예 별개의 장소다.

어쩌면 대마법사만이 만들 수 있다는 아공간亞空間이 아닐까?

아공간이란 주인의 허락과 좌표값, 그리고 매개체가 되는 마도구만 소지하고 있다면…….

누구든,

어디서든,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공간이다.

각지에 흩어진 사람을 한곳으로 집합시키기엔 최적이라는 뜻.

물론 어마어마한 난도를 가진 고등 마법이라, 제국 전역을 통틀어도 쓸 수 있는 사람이 열 명이 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배드니커엔 이런 기예가 가능한 규격 외의 인간이 한 명 있다.

수호자 아사드.

그 대마법사라면 아공간 마법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겠지.

나조차도 깨닫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이동시켰다는 점에 살짝 소름이 끼치긴 했으나.

상대는 무려 300년 동안 배드니커를 지킨 괴물 중의 괴물이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그때 건조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듣기만 해도 늘어지는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니, 방금 자다 깬 것 같은 흐리멍덩한 낯짝이 보였다.

장남인 히이로.

역행 전에도, 딱히 나한테 해를 끼친 인물은 아니다.

아마 관심조차 없었단 게 정확한 말일 테지만.

어쨌든 이 녀석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어울리는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전혀 ‘배드니커’스럽지 않은 인물이다.

음흉함, 음침함, 어두움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란 뜻.

지금도 철혈공만 없었다면 즉각 책상에 퍼질러 잘 것 같다.

“…….”

반면 차녀인 네로는 지극히 ‘배드니커’스럽다.

보기만 해도 음울함이 느껴지는 오라 속에서, 이쪽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차를 홀짝이고 있다.

그때 히이로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더니 철혈공을 보며 물었다.

“둘 다 부르신 겁니까?”

“아니.”

“그럼 한 명은 불청객이란 뜻이군요.”

네로가 말했다.

“아버지의 말에 대답한 건 루안이었지. 즉 이곳에 부른 것도 저 녀석이라는 뜻인데- 헥토르, 너는 무슨 자격으로 여기 온 거지?”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헥토르를 보았다.

이 싸가지 없는 놈이 무슨 이유에선지 위축된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철혈공 앞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저 둘이랑 껄끄러운 사이인가?’

아마 그런 것 같다.

잠깐 네로의 얼굴에 한심함이 맴돌았고, 히이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자격 없어. 어차피 넌 언젠가 퇴출당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게 무슨…….”

“너. 재능 없으니까.”

헥토르의 얼굴이 굳었다.

“예상보다 이르고, 대체된 인물도 의외긴 하지만 그렇다고 네게 입 놀릴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지.”

“…저는.”

헥토르가 눈가에 힘을 주며 말했다.

“히이로 형님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오호.’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위축된 주제에 제법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헥토르가 못난 놈이긴 했지만, 두려움에 맞서고 있는 모습까지 못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거잖아.”

히이로가 귀찮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토르의 얼굴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떼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집중력을 극도로 다듬은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전말은 단순하다.

쿠당탕!

“……!?”

명백한 수준 차이.

히이로가 내뻗은 손바닥이 명치에 꽂히는 순간까지 깨닫지 못한 것 같은데… 방금 동작은 딱히 무술은 아니었다.

그저 기초적인 육체 스펙이 헥토르보다 득하게 높았다.

철혈공의 자식 중, 천재가 헥토르를 일컫는 말이라면…….

괴물은 히이로를 말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천재와 괴물 사이에 놓인 거리가 확연히 보였다.

“쿨럭……!”

헥토르가 주저앉은 채 숨을 토해냈다.

“이만 가. 이 이상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저는, 나는……!”

헥토르가 재차 일어나더니,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오늘은 이놈의 여러 면모를 보는 날인 것 같다.

설마 이런 추한 근성을 보여 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면 히이로는 여전히 무표정했는데, 헥토르의 발버둥을 근성이 아닌 발악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히이로가 단순하지만 강맹했던 헥토르의 돌진을 가볍게 피하더니, 즉시 목을 움켜잡았다.

“컥!”

“제발 귀찮게 하지 말고… 아니면 여기서 죽고 싶은 건가?”

뿌드득.

꽉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헥토르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좀 과한데.’

히이로는 지금 손속을 두지 않고 있다.

형제도 아니고, 그냥 벌레를 눌러 죽이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나랑 싸울 때의 헥토르조차 저 정도는 아니었다.

여러모로 철이 없는 녀석이기는 해도 선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모습은 내비쳤는데, 지금의 히이로에겐 그런 절제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잠시 철혈공을 보았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다.

철혈공은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얼굴로 테이블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본심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당장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커헉, 컥…….”

헥토르의 안색이 점차 파리해진다.

염병, 정신 나간 집안 같으니라고.

“히이로 형님, 거기까지 하시죠.”

히이로의 손목을 잡고 말했지만, 이놈은 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시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연스레 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콰드득.

“그만하시라니까.”

“…….”

그제야 히이로가 나를 보았다.

반쯤 감긴 눈동자에 약간의 이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내가 왜?”

“헥토르 형님도 이제 알아들었을 겁니다.”

“아닐걸. 이놈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제가 알아듣게 얘기하죠.”

“흐음.”

히이로가 흥미로운 눈으로 날 보더니, “그러지 뭐.” 하며 손아귀 힘을 풀었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쿨럭거리는 헥토르를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러게 왜 덤벼? 몸도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닌 것 같은데.”

“…비켜라.”

“비키면 뭐, 가주님한테 뭐라고 말하게.”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

정곡인가 보군.

나는 대놓고 혀를 찼다.

“형님은 가주님한테 그렇게 죽고 못 살면서 아직 저 사람에 대해 몰라?”

“…무슨 소리냐.”

“지금 형님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건 가주님의 귀에 닿을 것 같냐고.”

“…….”

“오히려 실망만 커지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더 이상 실망 끼치지 말고 이만 물러나. 형님 입장에서도 그게 맞아.”

“그래도……!”

나는 헥토르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면 이 자리에서, 히이로 형님 대신 내가 널 때려 팰까?”

“…….”

“괜찮겠어? 히이로한테 처맞는 것보다 훨씬 쪽팔릴 텐데. 아버지의 실망도 분명 더 클 테고.”

헥토르의 표정이 굳더니,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철혈공이 있는 쪽을 바라보더니 정중히 허리를 꺾었다.

“…….”

철혈공은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었다.

어찌 보면 이미 헥토르란 인간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헥토르도 딱히 대꾸를 예상하지는 않았는지, 그대로 온 길을 되돌아가며 떠났다.

나갈 때는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조금 걷던 헥토르는 잠시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마법처럼 말이다.

딱히 보이는 풍경에서 위화감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대충 저쪽 어딘가에 출구가 있는 모양이다.

히이로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뭐라고 말한 거야?”

“그냥 잘 타일렀죠.”

“그럴 리가. 고집 하나는 알아주던 놈인데.”

“…….”

“뭐 말하기 싫으면 됐고.”

히이로가 뭉그적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엎어진 다음 입이 찢어지게 하품한다.

특이한 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데도 철혈공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점이었다.

‘루드빅도 철혈공 앞에서 어느 정도 편하게 굴긴 했지만…….’

히이로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

그만큼 철혈공이 히이로를 신뢰한다는 것일까.

“그럼 슬슬 먹을까.”

그때 철혈공이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상에 엎어져 있던 히이로도, 차를 마시던 네로도 순식간에 품행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네로가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순간.

팟-.

탁자 위에 있던 찻잔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그곳을 다양한 음식들이 나타났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고 보니 난 아침도 안 먹었구나.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철혈공의 말에 둘이 대꾸했고, 나도 한 박자 늦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방금 구운 것처럼 육즙이 흘러나오는 스테이크를 한입 먹고, 처음 보는 소스로 드레싱된 샐러드를 입에 넣는다.

내가 채소보단 고기를 선호하긴 하는데, 이 샐러드는 고기만큼이나 맛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좋은데.’

…정말로 그냥 밥만 먹는 자리일까?

나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입안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한동안 테이블엔 식기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나는 딱히 과식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음식이 맛있어서 좀 과하게 먹고 말았다.

애초에 음식이 너무 많기도 했고.

어쨌건, 조용한 식사 시간이 끝난 뒤 철혈공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히이로.”

“네.”

“제2황자가 개최한 무술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승까지 상처 하나 없이 진출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철혈공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곳이 어떤 자리인지 깨달았다.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하도록 해라.”

이곳은 논공행상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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