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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5화 (55/172)

55화

히이로가 대답했다.

“[늪지대]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쓸 만한 길잡이와 마법사가 필요한데, 아무래도 제 인맥과 금전으로는 구하기 힘들더라고요.”

“길잡이는 내가 직접 [헤로스]에 말해 보마. 마법사는 관장館長 수준이면 되겠나.”

“충분합니다.”

관장館長 수준의 마법사라면 마스터 등급 바로 아래다.

몇 가지 조건만 만족하면 도시에 마탑을 세울 수 있는 고위 마법사.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를 고용하는 건 단순히 돈만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도, 철혈공은 대수롭지도 않게 말했다.

“그 밖에 더 바라는 건?”

“없습니다.”

철혈공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번엔 네로를 보았다.

“네로.”

“네.”

“[헤로스]에서 B급 임무를 단독으로 수행했다지. 기관의 평가도 아주 좋았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원하는 게 따로 있느냐.”

“…….”

네로는 잠깐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최근 벽을 마주한 느낌이라 경지를 진척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혹 여유가 되실 때 시간을 할애해 주실 수 있는지요.”

철혈공은 이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시간을 따로 내보겠다.”

“예.”

“별개로 최근 옛 요정의 검술을 익히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검술에는 마나가 많이 소모된다. 네 마나량은 또래에 비해 월등하지만 넉넉한 수준은 아닐 터. 조만간 영약을 하나 줄 테니 복용해라.”

“감사합니다.”

네로의 무뚝뚝한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철혈공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짧은 문답이었으나, 철혈공이 내리는 보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의 보상을 대수롭지 않게 줄 수 있는 가문이 제국에 몇이나 있을까.

“루안.”

“네.”

“가문의 비전 검술에 버금가는 무술을 창안했다고.”

일전에 한번 나눴던 대화다.

하리바를 쓰러뜨리고, 배드니커의 금지에서 말이다.

지금 굳이 다시 꺼내는 이유가 뭘까?

나는 히이로와 네로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끼며 대꾸했다.

“가문의 비전 검술을 익힌 적이 없어서 비교가 안 되는군요.”

“그 말은 네가 만든 게 더 우월할 수도 있다는 얘기냐.”

“…….”

일부러 애매한 말투로 말했는데, 이걸 알아듣네.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다행히 철혈공도 더는 깊게 묻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산맥에선 하덴아이하르의 암살자를 격퇴하고 보석수를 토벌하였고 본가에선 잠입한 쥐새끼들을 직접 처리했다. 이후엔 원로회의 견제를 떨쳐내고 스스로를 증명했으며, 대련에선 헥토르를 상대로 압승을 거뒀지.”

“네.”

“훌륭하다.”

철혈공의 치하에 히이로와 네로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대충 이유는 알겠다.

딱 봐도 철혈공은 칭찬에 인색한 남자였다.

‘본가에서 일어난 일은 좀 애매하게 말하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마 루드빅의 잠입 활동은 이곳에 있는 히이로와 네로조차 모르는 일인 듯하니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느냐?”

“어…….”

설마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나는 즉각 대답했다.

“가문의 지하도서관에 출입하고 싶습니다.”

“지하도서관?”

“네.”

“…….”

잠깐 멈칫하던 철혈공이 드물게 미간을 좁혔다.

‘뭐야.’

앞에 두 녀석이 말한 것에 비하면 별 대단한 걸 요구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반응이 왜 이래. 불안하게.

“안 된다.”

“…….”

“그걸로는 부족해.”

“…부족하다 하심은?”

“다른 건 몰라도 하덴아이하르의 끄나풀을 붙잡은 건 커다란 공이다. 지하도서관의 열람 권한을 주는 것만으로는 계산이 맞지 않아.”

그 뜻이었구나.

“달리 바라는 건?”

“음…….”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나는 잠깐 생각해 봤다.

가문의 비전 무술?

백일식과 은하검을 연마하는 것만으로 벅차다. 과한 것보단 부족한 게 낫다는 내 지론이기도 하고.

딱히 경지의 진척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니, 딱히 네로처럼 가르침을 청하지 않아도 된다.

즉 결론은 하나였다.

“저도 영약이 있으면 좋겠네요.”

“영약?”

“네. 이왕이면 극양의 기운을 가진 걸로.”

“음…….”

철혈공의 미간이 다시 좁혀지더니, 입을 열었다.

“가문 보고에 영옥靈玉이 하나 있을 거다. 그걸 줄 테니 복용하도록 해라.”

영옥이 뭐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철혈공이 주는 거니 평범한 영약보단 훨씬 뛰어날 거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도 가져가라.”

반지였다.

딱히 아무런 문양도, 보석도 없는 은색 반지.

“이게 뭡니까?”

“마도구. 마나를 불어넣으면 언제든 이 장소에 올 수 있지.”

“아.”

“일회용이니까 적절한 순간에 쓰도록 해라.”

역시 여긴 아공간이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지하도서관을 방문한 것이라면 사서를 조심하도록.”

“사서요?”

“그래.”

사서가 누구길래 철혈공씩이나 되는 분이 직접 조심하라고 말하는 걸까.

나는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철혈공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타이밍을 놓쳤다.

“오늘은 오랜만에 기꺼운 날이구나. 너희의 성장을 도모하는 의미에서 나도 하나 보여 주겠다.”

이 말에 히이로와 네로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쩐지 선물을 받기 직전의 꼬맹이 같은 표정이 된 것이다.

‘뭘 보여 주려고.’

내 의문은 다음 순간 해결됐다.

스릉-.

자리에서 일어선 철혈공이 검을 빼든 것이다.

검술을 보여 줄 생각이구나.

그제야 저 두 녀석의 흥분도 납득 갔다.

이건 철혈공이 실질적으로 가르침을 내리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철혈공의 자식이라면, 아니.

제국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갈망해 마지않는 기회.

나도 기대가 들었다.

검술은 내 주력이 아니지만, 다름 아닌 철혈공이 직접 보여 주는 검술이다.

단지 구경하는 것만으로 깨닫는 바가 있지 않을까?

검을 빼든 철혈공이 우리를 지나친 순간이다.

구르륵…….

갑자기 지면이 솟아오르더니, 뭉개진 찰흙처럼 꿈틀댔다.

그 찰흙은 얼마 안 가 괴물의 형상이 됐다.

참 별게 다 나온다는 생각이 든 순간, 점잖게 걸어가던 철혈공이 검을 휘둘렀다.

푸화악!

전열에 있던 괴물 다섯 마리가 순식간에 핏물이 됐다.

한 번 휘두른 게 아니다.

찰나의 순간 철혈공의 검이 괴물 한 놈의 몸을 최소 다섯 번은 베었다.

가장 희한한 건 그 모든 참격이 연격이 아닌, 개별적인 공격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괴물의 몸뚱이에 남긴 자상은 한 사람이 냈다기보단, 다섯 명의 검사가 동시에 검을 휘둘러 도륙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철혈공은 평소 점잖고 고요한 남자였지만 싸울 때의 모습은 꼭 짐승 같았다.

숨을 헐떡이거나 포효를 터뜨리지는 않았으나 몸뚱이에 상대의 핏물이 묻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건 전투에 임하는 철혈공의 마음가짐을 보여 주는 지표기도 했다.

효율적인 움직임을 위해서라면 몸에 살점이 묻고, 핏물이 튀는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인간.

목표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시체 아래에서 사흘 밤낮도 잠복할 수 있는 남자.

“…….”

한차례 검무가 끝나고, 철혈공은 뚝뚝 흘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우리를 돌아봤다.

“잘 봤나.”

우리는 합이라도 맞춘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땠느냐.”

철혈공의 물음에 먼저 입을 연 건 히이로였다.

“…맹렬하고, 집요한 검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정해진 형形이 없어 보였는데 제가 본 검술 중 가장 자유로웠습니다. 즉 일대일보단 다대일의 상황에서 더 힘을 발휘하는 검술이 아닐까 합니다.”

철혈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네로가 감상을 말했다.

“대인전을 염두하고 창안하신 검술은 아닌 듯싶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명에 이를 게 확실한 치명상을 입히고도 공세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도 불사자不死者, 혹은 악마와의 싸움을 고려하여 만드시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철혈공은 재차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나를 보았다.

어쩐지 나도 감상을 말해 줘야 할 것 같은 흐름이라서 대충 말했다.

“형님과 누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게 전부인가?”

“네.”

사실 말할 게 한 가지 더 있기는 했는데, 어째선지 입을 닫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기분.

내 대꾸에 히이로와 네로는 물론, 철혈공의 미간에도 힘이 들어갔으나, 딱히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히이로가 물었다.

“혹시 아버지께선 방금 보여 주신 검술을 저희에게 전수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직접 창안하신 검술을 전수해 주신다니…….”

히이로의 목소리에서 들뜬 기색이 느껴진다. 표현은 하지 않았으나 네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전수라는 말을 듣고는 음식물이 얹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 왜 그러지?”

철혈공이 나를 보았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가주님.”

“말해라.”

“저는 이 검술이 필요가 없습니다.”

“어째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저한테 검술은 주력이 아닙니다.”

“네가 맨손 무술을 익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케이안에게 들었고, 헥토르를 꺾었을 때도 주먹을 썼으니까.”

철혈공이 드물게 길게 말하더니 다시 물었다.

“다른 이유는 무엇이냐.”

나는 방금 철혈공이 보였던 무술을 떠올리며 말했다.

“저는 아직 발전 도중입니다. 케이안에게 들으셨다시피, 제가 만들고 있는 무술 또한 아직 미완성이고요.”

“그것도 안다.”

“그럼 이해하시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완성인 무술을 여럿 익히는 건 제 수준에 버겁습니다.”

“…….”

철혈공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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