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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6화 (56/172)

56화

미약한 호선으로 시작된 철혈공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나는 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이 이렇게까지 웃을 수 있는 남자란 걸 처음 알게 됐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음산함도 커졌는데, 과연 배드니커의 가주에 걸맞은 웃음이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루안 배드니커.”

철혈공이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당장 말을 잇지 않은 채 테이블로 걸어가더니 다시 앉는다.

“네 말이 맞다. 방금 내가 보여 준 검술은 아직 미완성이야. 아직은 손볼 부분이 많다는 뜻이지.”

“그렇군요.”

“신기한 일이군. 나는 이 검술을 세 명에게 보여 줬으나, 오직 너만이 그 사실을 깨달았구나.”

철혈공이 다리를 꼬며 히이로와 네로를 보았다.

“히이로, 네로.”

“네.”

“…네.”

“나는 너희 둘의 안목이 루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안만이 너희가 깨닫지 못한 점을 정확히 짚었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둘은 골몰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요.”

“너희는 나를 너무 신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철혈공은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몇 번이고 말했지. 나도 틀릴 때가 있고, 잘못 생각할 때가 있다. 창안한 검술에 어설픈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그걸 너희가 발견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너희 둘은 그 가능성을 아예 배제한 채로 내 검술을 보았다. 내가 만든 검술이니 완벽할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하면서.”

“…….”

“사실 너희 둘만이 아니라 배드니커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이런 시선으로 나를 본다. 내가 굿스프링의 하템처럼 본가에 머물며 수련하지 않는 이유기도 한데…….”

그리고 철혈공의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반면 루안. 너는 투명한 눈으로 내 검술을 직시했다. 적어도 나를 최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너는 혹시 나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자를 만난 적이 있느냐?”

“…….”

철혈공의 물음을 듣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역시 이 남자는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심계가 깊은 것은 물론이고, 상대의 사소한 반응을 토대로 심리 상태를 유추해 낼 수 있는 능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 중에서 이보다 껄끄러운 상대는 없을 것이다.

이런 남자가 친부라는 사실은 내게 있어 행운일까, 불운일까.

“…글쎄요.”

물론 그렇다고 영산에서의 일을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철혈공은 잠깐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악마, 그리고 교인과의 전투엔 교본이랄 게 없다. 짐승이나 마물을 상대할 때처럼 정형화된 공략 방법을 확립할 수 없다는 뜻인데, 제사장부터 조무래기에 이르기까지 공통점이란 게 없는 놈들이라 그렇다. 그저 어느 파벌에 속했느냐에 따라 성향을 추측할 수 있는 정도지.”

철혈공이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가령 핏빛 달의 마왕인 하덴아이하르의 하수인들은 은밀하고.

녹색 혀의 마왕 탕탕타의 하수인은 모략을 짜는 걸 즐기며.

금빛 뿔의 마왕 킨가로드투스의 하수인은 폭력적이고, 충동적이다.

나는 뜻밖에 적절한 순간이 왔다고 생각하며 자연스레 질문했다.

“무채색의 마왕은 어떻습니까?”

“그에겐 하수인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마왕으로선 특이한 유형이지.”

“아…….”

“무채색의 마왕은 마왕 중에서도 특히나 이질적인 존재다. 비교적 최근에 출현했고, 그 영향력이 제국 깊숙이 침투해 있는 것도 아니지.”

“그럼 왜 마왕으로 분류되는 겁니까?”

“100년 전 나라 하나를 혼자 멸망시켰으니 마왕이라 불릴 자격은 충분하다.”

“…….”

나는 이 말에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사형은 스승님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살생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물론, 영산에 서식하는 요괴를 죽인 후에도 항상 참회할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만한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미쳐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사형이 익힌 태극제일공은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니까.

정신이 나가 버렸다면 그 강함 또한 사라졌을 터.

그렇다면… 대사형은 아주 이성적으로 미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뭔 소리야?’

내가 생각했지만 이런 개소리가 따로 없다.

“내가 방금 보여 준 검술엔 이름이 없다. 완성할 생각도 없고. 나는 그 몫을 너희에게 맡기려고 한다.”

“그 말씀은…….”

“이 검술을 참고하여 각자의 무술을 완성해라.”

“…….”

“기한은 1년이고, 반드시 내 검술을 토대로 만들 필요는 없다. 참고만 해도 돼. 내가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악마와의 싸울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히이로와 네로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공은 그들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너희 둘은 이만 가도 좋다.”

“아, 저희 둘만 말입니까?”

“그래. 나는 막내와 할 얘기가 남았으니.”

그 말에 네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고, 히이로는 특유의 이채가 감도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버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몸조리 잘하십시오.”

배드니커의 장남과 차녀가 물러나고.

나와 철혈공만이 자리에 남았다.

나로선 딱히 반가운 전개가 아니라 떨떠름한 심정이다.

철혈공과 이렇게 독대하는 건 두 번째였지만, 어쩐지 그때보다 더 마음이 불편하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도 가지 않았고.

“본가의 수련회에 참가한다고 들었는데.”

“네.”

“이유가 무엇이냐.”

“영웅이 되려고요.”

“[헤로스]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냐?”

“그럴 수도 있고요.”

“최종적인 목표는 또 다르다는 뜻이군.”

나는 잠깐 철혈공을 보았다.

그리고 호수에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슬그머니 내 목표를 입에 담아 봤다.

“마왕을 한 명 쓰러뜨려 볼까 합니다.”

철혈공은 빛 한 점 없는 눈동자로 나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무채색의 마왕 말이냐.”

“그렇습니다.”

딱히 놀라지 않고 대꾸했다.

어쩐지 철혈공이라면 방금의 대화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왕의 소재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애초에 평소에는 우리와 같은 세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추측도 있지.”

“이런 아공간 같은 곳에 처박혀 있다는 뜻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악귀들만이 사는 별개의 세상이 있을 수도 있겠지.”

철혈공이 말했다.

“나는 무채색의 마왕의 소재를 알고 있다.”

“……!”

깜짝 놀라서 철혈공을 바라봤으나, 이 남자는 무덤덤한 어조로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직접 싸우기도 했지.”

철혈공과 대사형이 한판 붙었다니.

나는 쉽게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다.

둘 다 내 역량으로는 그 강함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땠습니까?”

“지금 네 수준으로 넘볼 상대가 아니다.”

그건 내가 더 잘 안다.

아마 철혈공은 둘러서 말하는 게 아닐까.

내가 이 자리에서 소재를 물어봐도 가르쳐 줄 생각이 없다고.

“마왕의 소재는 일정하지 않다. 무채색의 마왕도 마찬가지. 지금 파악한 장소엔 제법 오랫동안 머물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때문에 [위대한 가문]은 물론, [헤로스] 거기에 제국의 강자들로 구성된 연합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

“곧 원정대가 결성될 테지.”

나는 멈칫하다가 말했다.

“…이거 기밀 사항인 거 아닙니까?”

“그래.”

“이걸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너의 노력 여하에 따라 원정대에 넣어 줄 수도 있다.”

“…….”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원정은 언제입니까?”

“모른다. 당장 한 달 뒤가 될 수도 있고, 10년이 지나고도 출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원정대의 참가는 정식 영웅, 그중에서도 A급 이상만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라면 등급에 상관없이 한둘 정도는 넣어 줄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영웅이 되려면…….”

“원한다면 헤로스에 견습 신분으로 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그보단 수련회에 참가하는 걸 추천하마.”

다시 한번 수련회라는 단어가 나왔다.

심지어 철혈공이 직접 권하는 상황.

이쯤 되면 나도 더 이상 이 건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참가하겠습니다. 원정에 관한 얘기는 수료 이후에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철혈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루안.”

“예.”

“이왕 수료한다면 1위를 노려라.”

“…….”

나는 잠깐 철혈공과 시선을 마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습니다.”

* * *

철혈공과의 독대가 끝나고, 나는 다시 본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가고 쉬고 있자니, 잠시 후 케이안이 찾아왔다.

“오셨군요.”

“응.”

“별일 없으셨던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나는 케이안의 말에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별일이 없던 게 맞기는 한데, 대화 내용 자체는 무척 살벌했기 때문이다.

“주인님, 방금 대사범에게 전해 들었는데, 수련회에 참가하시려면 이번 주중으로 주거지를 옮겨야 한다더군요.”

“어디로?”

“본가의 울타리를 벗어난, 숲 북쪽에 있는 건물입니다. 과거 기사단의 훈련소로 쓰던 장소인데 지금은 수련회에 참가하는 영도들이 머무는 숙소 겸 교육소가 됐지요.”

“아하.”

“도련님을 제외한 영도들은 대부분 미리 이동했다고 들었습니다.

거의 모두 다른 가문 출신들이니 타당한 조치다.

아직 수련회가 시작하지 않았다고 해도 계속 본가에 머물게 하는 건 좋은 그림이 아니니.

배드니커는 위대한 가문 중에서도 특히 폐쇄적인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럼 나도 곧 넘어가야겠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급히 움직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좋아. 그럼 난 잠깐 나갔다 올게.”

케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십니까?”

“지하도서관.”

사실 이렇게 급하게 갈 필요는 없지만, 아버지한테 궁금한 것도 있으니 지금 갔다 오려고 한다.

케이안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가주님께 허락받으신 겁니까?”

“응. 도서관 사서가 벌써 전달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주님 이름을 팔면 날 쳐내지는 않겠지. 그러고 보니 경은 지하도서관 사서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나?”

“송구한 말씀이지만, 지하도서관엔 저도 출입한 적이 없는지라.”

“그렇군.”

“그건 왜 물어보신 겁니까?”

“가주님께서 말씀하시던데. 지하도서관의 사서를 조심하라고.”

이 말에 케이안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철혈공께선 함부로 경고하지 않으십니다.”

“알아. 그래서 좀 꺼림칙한 상태야.”

그보다 더 기대되기도 한다.

내가 방을 나서려고 할 때 케이안이 말했다.

“저도 동행할까요?”

“아냐. 게다가 출입권이 있는 건 나뿐이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알아서 갔다 올게.”

“예. 조심하십시오.”

방을 나선 다음 곧바로 지하도서관으로 향하려고 했는데.

문득 나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나는 지하도서관의 입구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대충 복도를 걷다가 만든 하녀를 붙잡고 물어봤다.

“지하도서관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

“지하도서관이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본가 사용인인데, 이걸 모르는 게 말이 되나?

‘견습인가.’

그런 것치고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어쨌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고, 다른 사용인들을 붙잡고 계속 쭉 물어봤지만…….

“저는 알지 못합니다.”

“처음 듣는 곳인데요……?”

“죄,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이게 뭔 일이래.”

나는 잠깐 복도에 선 채 생각을 정리했다.

본가 사용인의 머리가 단체로 맛이 간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분명히 이상하다.

잠깐 고민하다가, 이번엔 나이가 좀 있는 하녀를 붙잡았다.

내 기억으로는 하녀장이었던 사람이다.

아마도 본가에서 일한 경력이 10년은 넘는 베테랑.

이 하녀는 앞선 녀석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이야?”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하녀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

하녀장의 말에 위화감이 확연히 구체화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떠나는 하녀장을 굳이 붙잡지 않고, 드넓은 저택 1층을 샅샅이 둘러봤다.

그리고 수십 분 후 깨달았다.

애초에 이 저택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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