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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9화 (59/172)

59화

에반이 즉시 항변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포인트가 없다면 밥도 먹지 말라는 뜻입니까?”

“누가 먹지 말랬나. 말했을 텐데. 저녁 식당에만 발을 들일 수 없다고.”

기사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많이 처먹어라.”

“…….”

이런, 이런 막말이라니……!

에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귀족치고는 소박한 심정의 소유자인 에반이지만, 아버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욕만큼은 인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숨을 크게 들이켠 다음, 이 무례한 기사한테 한소리……!

“개소리 집어치워!”

…그런데 이 외침은 에반의 것이 아니었다.

뒤쪽에, 다른 기사에게 제지당한 녀석이 있었다.

‘저 녀석은…….’

분명 아까 같이 감점당한 놈.

이름이 한스 밴더였던가?

“아무리 배드니커라고 해도 이 한스 밴더를 이렇게 대우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내게 식사를 대령하지 않으면…….”

빠악!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한스가 저 멀리 날아가더니 쿠당탕 바닥을 굴렀다.

“쿠, 쿨럭……!”

한스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한 듯했으나.

에반은 보았다.

앞에 있던 기사가 한스를 걷어차는 것을.

“대령하지 않으면, 뭐.”

“…가, 감히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이런 짓을 해도 된다고, 네 손으로 직접 서명하지 않았나. 한스 영도, 배고프면 풀이라도 뜯어 처먹어라. 여기서 지랄하지 말고.”

“…….”

그러자 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관두겠다……!”

“…….”

“이까짓 수련회, 당장 관두겠다고! 당장 나를 돌려보내라!”

“…하아.”

기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머저리는 앞으로 내가 담당하지. 한스 밴더, 내 이름은 로저스다. 수련회 동안 잘.부.탁.하.마.”

저벅, 기사가 다가가니 한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오, 오지 마! 내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앗!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꽥!”

뒤이어 수련회 공터에 돼지 멱따는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

일련의 과정을 모두 목격한 에반은 다시 앞을 보았다.

식당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말했다.

“에반 영도, 뭔가 할 말이 있는가?”

“…….”

에반은 먼눈을 하며 기사를 보았다.

“쥐꼬리만큼도, 없습니다. 교관님.”

* * *

식사 시간이 끝난 이후엔 교관에게서 간단한 주의사항에 대해 들었다.

“저녁 시간엔 수업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자유 시간이다. 물론 이 공터 구역을 벗어나는 건 금한다. 교관동에 접근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를 어길 시 받게 되는 불이익은 네놈들 스스로가 책임지어야 할 거다.”

그제야 에반은 오른쪽의 번쩍거리는 건물이 교관의 숙소라는 걸 알게 됐다.

‘이쪽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3층 건물인데…….’

저쪽은 6층짜리에 건물 디자인도 감탄이 나올 만큼 미려하다.

분명 내부 시설도 엄청나겠지…….

“참고로 오늘 저녁엔 기본적인 의류와 생필품의 보급이 있다. 공터에서 나눠 줄 테니 차례대로 받아 가도록.”

보급받은 옷은 영도복이라고 불리는 옷이었는데, 디자인 자체는 무난했지만 묘하게 허름했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교관님, 맞는 사이즈가 없습니다.”

“그냥 아무거나 처입어.”

“예.”

한 가지 다행인 건, 옷 재질이 무척 튼튼해서 웬만큼 구르는 걸로는 찢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점.

“…근데 옷 핏이 너무 구리지 않아?”

“핏 타령할 때냐.”

영도 건물의 구성은 단순했다.

1층은 라운지.

2층은 여자 영도의 구역.

3층은 남자 영도의 구역.

당연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서로 이성의 구역에 침입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영도 대부분은 1층의 라운지로 모이게 됐는데-.

말이 라운지지, 낡은 목재 테이블의 의자에 모닥불……. 유흥거리라곤 구겨진 카드와 귀퉁이가 찌그러진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래도 허름하고 좁아터진 방에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도가 이곳에 있는 거지만.

에반도 마찬가지.

친구 한 놈과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채 멍하니 모닥불을 응시하는 중.

“그러고 보니 카리스, 식당은 어떻든?”

카리스 어스맨은 에반의 친구다.

사는 곳이 가까운 데다, 소싯적부터 부모 간의 교류가 잦아서 거의 형제처럼 함께 자란 절친.

이번 가호식도 일부러 타이밍을 맞췄고, 수련회에 참가한 것도 입을 맞췄다.

“생각보다 괜찮던데? 배급도 자유라서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근데 기사들이 눈 시퍼렇게 뜬 채 감시하고 있어서 좀 부담되더라.”

“그랬군……. 아. 배고파.”

에반이 괜히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다행히 라운지엔 수통이 있어서 물만큼은 자유롭게 마실 수 있었다.

“룸메이트는? 괜찮은 놈으로 걸렸어?”

“난쟁이 친구인데 나쁘지 않아. 코를 좀 심하게 골 것 같긴 하지만. 넌 어때?”

“난… 아직 잘 모르겠어.”

“누구길래.”

에반이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루안 배드니커.”

“…어, 진짜로?”

“그래.”

“와.”

카리스가 질린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진짜 너 첫날부터 액땜 제대로 하는구나…….”

“으음……. 그래도 소문이랑 인상이 좀 다르던데. 의외로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어.”

“그럴 리가 있냐? 그 미친놈 소문은 너도 잘 알잖아. 무려 배드니커 가문의 보검을 갖다 판-.”

카리스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막 계단에서 등장한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그 소년은 성큼성큼 지척까지 걸어오더니 같은 테이블에 털썩 앉기까지 했다.

“확실히 방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여기가 낫네. 책도 있고.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교양책인가. 제목 멋진데.”

“…….”

둘은 입을 닫았다.

하필이면 등장한 인물이 루안 배드니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들었나?’

‘몰라, 등신아.’

둘은 눈짓으로 교류했고, 카리스가 애매한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카리스 어스맨이라고 합니다.”

“루안 배드니커. 이제 보검을 갖다 파는 미친 짓은 졸업한 남자지.”

다 들었구나.

카리스가 즉시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

“장난이야. 그냥 내 룸메이트 친구 같길래 안면이나 트러 왔어.”

“아, 아하…….”

“카리스 어스맨 맞지?”

“마, 맞습니다.”

“말 편하게 해도 돼. 우리 동갑일 거야. 아마도.”

“으, 으음. 그럴까요. 아니, 그럴까…….”

카리스는 알고 있다.

높으신 분들의 “편하게 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저 말의 진의를 해석하면 “너무 정중하게 굴면 내가 불편하니까 적당히 해라. 아, 그렇다고 아예 예의 없이 굴면 죽는 거 알지?” 정도가 되겠다.

분명 그럴 텐데.

“오, 그래? 너희도 북쪽 출신이었구나.”

“당신도… 아니, 너도?”

“어머니가 콜랜드 출신이셔. 난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아하. 왠지 머리 색이 낯이 익더라니.”

…이상하게 얘기하기가 편했고.

“그러니까, 가호가 꼭 축복만은 아니란 뜻이지. 오히려 가호를 너무 많이 받는 것도 안 좋을 수도 있어.”

“그런가?”

“그렇다니까.”

…입담도 좋았으며.

“너희도 맥스 가문의 천재 얘기는 들어 봤겠지?”

“아, 들어 봤어. 가호를 받기 전에는 신동 소리를 듣던 녀석이었는데, 오히려 가호를 받은 이후엔 범재가 됐다던가?”

“맞아. 재능에 잡아먹힌 꼴이지. 그 녀석, 아마 가호 따위 안 받고 그냥 검술에 매진했으면 훨씬 강해졌을걸.

…말귀가 잘 통했다.

“아. 하나 예외가 있기는 하다.”

“뭔데?”

“우리 가주님. 다수의 가호를 거의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분이지.”

“결국 가문 자랑이잖아.”

“그게 그렇게 되나.”

…의외로 괜찮은 사람 같은데?

카리스는 에반과 같은 감상을 품게 됐다.

어느새 루안 주위엔 제법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됐다.

카리스는 그들 대부분이 몰락 귀족이거나 이종족, 혹은 평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수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열 명 안팎.

애초에 위대한 가문의 출신 대부분이 잘나가는 귀족이니 당연한 일이다.

“플러시! 좋았어, 이럼 내가 이긴 거지?”

“멍청아,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이건 하트가 아니라 다이아잖아.”

“앗.”

“푸하하!”

이 나이대의 소년소녀들이 다 그렇듯, 계기만 있으면 금방 친해진다.

특히 이 수련회라는 특수한 장소는, 전우애라는 끈끈한 감정을 싹트게 만들기에 무엇보다 적합했다.

어느새 영도들은 저들끼리 편히 농담을 던지거나, 낡은 카드를 갖고 놀며 웃을 터뜨렸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모습이 모든 영도에게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어이. 거기 천박한 놈들, 주둥아리 좀 닥치고 있을 수는 없나?”

귀족 중 한 명이 인상을 찌푸린 채 힐난했다.

노골적인 언사에 분위기가 살짝 차가워졌으나, 카리스는 첫날부터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주의하지.”

“말이 좀 짧군.”

“…….”

“이봐, 평민. 이런 곳에서 같이 구르고 있으니 우리가 뭐 동급이라도 된 것 같나? 주제를 알아라.”

카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첫째로는 이쪽이 숙이고 들어갔는데도 저놈은 침을 뱉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애초에 카리스는 평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쪽처럼 제도까지 명성을 떨칠 만큼 유명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리 주제가 어떤데?

“그것까지 내가 설명해 줘야-.”

그러나 귀족은 도중에 말을 삼키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이 됐다.

끼어든 인물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루안 배드니커.’

백번 양보해도 평민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내력의 소유자.

물론 루안의 악명이나 가문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 소문으로는 대충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배드니커다.

그 성姓은 어떤 비실이 뒤에 붙더라도, 함부로 대하기 힘들게 만들어 주는 희한한 힘이 있었다.

“그나저나 넌 이름이 뭐야?”

“…한스 밴더.”

“한스? 아아. 식당에서 생떼 부리다 기사한테 처맞은 그놈.”

“익……!”

한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루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저녁 못 먹어서 예민한 건 알겠는데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마. 앞으로 6주 동안 질리도록 볼 낯짝들인데,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하- 귀족이라면 친분을 틀 만한 상대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스는 배드니커의 혈족을 상대로도 반말을 고수한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그 뿌듯함은 곧 용기가 돼서,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 줬다.

“그리고 거기 있는 떨거지들은, 이번 수련회만 끝나면 내 인생에서 볼 일도 없어!”

“…음.”

그러자 순간적으로 루안이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한스 밴더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없으니, 넌 여기랑은 노는 물이 다르겠다.”

“…….”

어쩐지 비꼬는 듯한 말투에 한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리고 이 나이대 소년 소녀의 또 하나의 특징.

모욕에 대한 내성이 없다.

“너, 이 배드니커의 무능아가……!”

한스는 말을 내뱉고 스스로 움찔하며 상대의 눈치를 봤지만…….

루안의 표정엔 딱히 변화가 없었다.

그 태도에 한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입만 산 놈이었구나……!’

한스가 이죽거리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재능이 없는 놈들끼리 서로 감싸는 건가? 하하. 아주 잘 어울리는군 그래. 그러니까 가호도 한두 개밖에 못 받는 거겠지!”

그 순간이다.

정문이 활짝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앗.”

“저분은…….”

제국에선 보기 드문 검은색 머리카락에 조각 같은 얼굴- 헥토르 배드니커다.

한스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배드니커의 내부 사정까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헥토르가 루안을 쓰레기 취급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헥토르 님!”

그리고 한스는 헥토르의 라인에 기꺼이 탑승한 인재였다.

이 소년은 향후 몇 년 이내로 제국 전역에 혁혁한 명성을 떨칠 것이고, 어쩌면 배드니커의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

한스는 헥토르에게서 그 정도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헥토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아- 그게… 동생분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한스라고 해도 헥토르의 눈앞에서 루안에게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루안이 한심한 것과 별개로, 배드니커의 혈통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으니.

“…무슨 트러블.”

한스는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될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느라 헥토르의 어조가 살짝 가라앉은 걸 깨닫지 못했다.

“…아무래도, 동생분은 배드니커의 이름값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 같은데요. 저런 저급한 놈들과 어울리는 걸 보니 말입니다. 여기선 헥토르 님이 형님 된 도리로서 한마디 하셔야-.”

“한스 밴더.”

도중에 말이 끊겼다.

그제야 한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네?”

“놀랍군. 밴더 가문의 영향력이 이렇게 높아진 줄 미처 몰랐어.”

“…네?”

“감히 배드니커의 일에 참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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