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나는 갑자기 내달리는 수렵선생의 뒤를 쫓으며 생각했다.
‘체력부터 테스트할 생각이구만.’
순서상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이긴 하다.
일단 내공의 힘을 끌어다 쓰면 사흘 밤낮이고 달릴 수 있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고 몸뚱이의 힘만 쓰기로 했다.
사실 역행한 이후엔 외공 단련엔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다.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증진할 수 있는 내공과 달리, 외공에는 꾸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해서다.
물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는 없다.
천하제일인이 되기 위해선 내공과 외공, 양쪽 모두 두루 익히지 않으면 안 되니까.
‘내공은 다른 놈들한테 안 딸릴 것 같은데.’
보석 산맥에서의 사건도 그렇고, 이번에 얻은 영옥도 그렇고…….
지금 당장은 물론, 장기적으로도 내가 누군가에게 내공이 밀릴 일은 거의 없을 거다.
반대로 외공, 몸뚱이는 내가 여기서 최하위일 게 분명하다.
육체는 정직하다.
험하게 굴리는 만큼 강해지고, 놀고 처먹는 만큼 약해진다.
그리고 열다섯의 나는 1차 가호식에서 낙담하고, 약 1년의 세월을 허비했다.
이렇게 허약해진 것도 자업자득이란 뜻.
당연히 재활에 따라오는 고통도 내가 부담해야 할 것이다.
나는 수렵선생의 뒤를 꾸준히 따라갔다.
약 30분 정도를 뛰니 숨이 차올랐고, 거기서 또 30분을 뛰니 머리가 어질거렸다.
생각보다 더 템포가 빨랐고.
생각보다 내 체력은 더 저질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목적은 이 체력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나마 산맥에서 체력을 쥐꼬리만큼은 키워 놔서 다행인가…….’
그것마저 없었다면 10분도 못 뛰고 고꾸라졌을 터.
얼마 안 가 슬슬 시야까지 흐릿해졌다.
‘아직.’
그래도 나는 꾹 참고 계속 내달렸다.
사람의 육체는 생각보다 튼튼하다.
내 기준으로, 사람이 진정으로 한계에 달하면 토한다.
현재 나는 목구멍이 조금 쓰라린 상태긴 하지만, 구역질까지 느껴지진 않는다.
아직 한계는 아니라는 증거.
‘이래서 아침도 안 먹이고 부른 건가?’
뭘 처먹었다면 진작 토한 놈들이 수두룩할 테니.
아무튼 수렵선생의 역할은 교관이다.
영도를 험하게 굴리고 있기는 하지만, 어떠한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며.
영도 수준 이상의 결과를 바라지도 않을 터.
때문에 나는 이 질주가 오전 중에는 끝날 거라 확신했다.
* * *
새벽부터 시작했던 질주는, 루안의 예상대로 오후가 되기 직전에 멈췄다.
“…….”
수렵선생은 자신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따라온 여섯 명을 보았다.
‘별 탈 없다면 이 녀석들은 살아서 수료하겠군.’
그간 무수히 많은 수련회를 진행하며 얻은 유의미한 데이터다.
헥토르 배드니커, 세렌 굿스프링, 에반 헬빈, 미르 자이언트…….
넷 모두 이번 수련회는 물론, 가호식 이전부터 가문에서 기대받던 유망한 인재들이다.
그중에서 수렵선생의 시선을 가장 이끈 건 완주할 때까지 자신과 열 발자국 이상 멀어지지 않은 소년이다.
‘카론 우드잭.’
제국 최강의 레인저라 불리는 하이드 우드잭의 아들.
땀을 살짝 흘리긴 했지만, 호흡은 전혀 흐트러져 있지 않다.
‘이놈은 벌써 어느 정도 태가 나는군.’
수렵선생은 카론의 얼굴을 보았다.
콧등을 가로지르는 흉터.
저 초원의 전사들에게 있어 흉터란 치부가 아닌 훈장이었고, 수렵선생 또한 그리 생각한다.
수렵선생은 아마 겉옷 아래의 감춰진 피부에도 비슷한 흉터가 몇 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저 정도 흉터가 새겨진 게 흔한 일은 아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이드가 하나뿐인 아들을 어떤 식으로 교육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하이드는 철혈공이 직접 초빙하려고 했던 대사범 후보 중 하나였다.
직접 그를 마주한 철혈공이 어째선지 마음을 바꾸긴 했지만, 하이드가 늪지대에서 맡은 임무가 워낙 막중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수렵선생의 시선이 가장 뒤쪽을 향했다.
그곳엔 다른 의미로 수렵선생의 주의를 이끌던 인물이 서 있었다.
‘결국 완주했나.’
루안 배드니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지만, 뒤처지지 않고 끝까지 잘 따라왔다.
저놈은 수렵선생으로서도 본 적 없는 근성의 소유자였다.
비록 이 여섯 중 순위는 가장 낮았지만.
가장 큰 고통을 겪었음에도 그걸 극복했다.
기특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론 가산점을 주고 싶었지만…….
“카론 우드잭, 헥토르 배드니커, 세렌 굿스프링, 에반 헬렌, 미르 자이언트.”
그럴 수는 없다.
수렵선생은 이번 수련회의 교관이고.
교관의 상벌이 공정하지 않으면, 수련회의 질서가 깨진다.
“이상 다섯 명에게 가산점 2점을 주겠다.”
말을 내뱉고 루안을 보았는데, 이 녀석은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뿐 덤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아직 포인트가 가진 중요함을 모르는 걸까?
‘그럴 리는 없지.’
눈치가 없어 보이는 녀석은 아니니.
“…오후 훈련은 식사 이후에 시작할 것이다. 정확한 시간은 그때 공지할 테니, 일단은 숙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예.”
수렵선생은 영도들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교관 숙소의 외견에선 빛이 났지만, 사실 내부까지 번쩍번쩍한 건 아니다.
일부러 겉모습에 공을 들인 이유는 이곳에 참가한 영도들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수렵선생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극이 적은 음식을 배급받은 다음 자리에 앉았는데, 문득 누군가 서성이는 게 느껴졌다.
“조금 이른 점심이군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맞은편에 앉은 건 무예선생인 후안이었다.
“아침을 걸렀던지라.”
“역시 탄코 선생. 영도들 모두가 굶었는데 자신만 끼니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건가요? 하하. 오늘 또 하나 배웁니다.”
“…….”
이 남자는 수렵선생이 좋아하지 않는 부류다.
그 재능은 인정하고, 교육에도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으나 어쩐지 그 방식이 수렵선생과는 맞지 않았다.
묘하게 불쾌하달까.
“그러고 보니 오후 수업은 후안 선생이었던가.”
“그렇습니다. 하하. 긴장되는군요. 이번 기수엔 특히 귀한 가문의 자제들이 많다던데…….”
꼬투리일 수도 있지만 저런 시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어떤 고귀한 혈통을 가졌든, 수련회에 참가했다면 일개 영도일 뿐이다.
그러니 교관으로서 주목해야 하는 건 그들의 적성과 재능, 그리고 근성이다.
수렵선생은 더 이 자리에 앉아 있기 거북해져서, 반 덩이나 남은 빵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소.”
“그러시죠. 참. 혹시 눈에 띄는 영도가 있었습니까?”
“…….”
여럿 있었지.
그중에서 가장 시선을 뺏은 건 의외의 인물이었고.
하지만 그 사실을 밝혀 줄 의리는 없어서, 수렵선생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
* * *
“후우우…….”
나는 호흡이 진정될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과 흙투성이가 된 몰골이 찝찝하긴 하지만, 딱히 씻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오후에도 이만큼이나 험한 수업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애초에 욕실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 배급에 정량은 없었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고기 위주로 식판 위를 푸짐히 장식한 다음 적당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진행했다.
수련회 식당은 이 귀족 놈들 사이에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의외로 내 입맛에는 나쁘지 않았다.
간이 좀 심심하긴 해도 기본적으로 잡내가 난다거나 불결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영양 밸런스가 좋았다.
“야……!”
그때 누군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어제 잠깐 보았던 얼굴, 세렌이었다.
나는 고기를 씹으며 인사했다.
“안녕. 우리 의외로 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것 같은-.”
“시끄럽고.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세렌이 내 말을 끊으며 물었다.
나는 그제야 이 녀석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내가 꼭 죽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긴 했지.
고기를 꿀꺽 삼키고 대꾸한다.
“잘 해결했어.”
“뭐?”
“잘 해결했다고. 그러니까 여기 내가 있는 거 아니겠어?”
세렌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 괴물 놈을 너 혼자 잡았단 거야?”
사실대로 말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나는 원활한 대화를 위해 약간의 거짓을 더했다.
“가문 사람이 도와줬어.”
“누구.”
“넌 말해도 몰라.”
“됐으니까 말해 봐.”
“야. 겨우 이렇게 재회했는데 뭐 그리 꿉꿉한 얘기를 해?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서 다시 만났다는 거잖아.”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
이 녀석이?
진짜 말 돌리는 게 뭔지 보여 줘야겠다.
“그것보다 비밀이 뭔데?”
“…무슨 비밀?”
세렌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직후 살짝 움찔거린 걸 놓칠 내가 아니다.
“살아서 다시 만나면 무슨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며.”
“…음. 내가, 그랬나?”
“어. 그랬어. 진짜 다 걸고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러니까 말해 봐. 뭔데.”
“…….”
“표정이 왜 그래? 비밀이란 게 그렇게 거창한 거야? 사실 너 남자라거나?”
“그, 그럴 리가 있겠어?”
세렌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물론 내 눈썰미가 성별조차 간파 못 할 만큼 형편없지는 않다.
“아님 실은 비밀 같은 건 없고 설마 그냥 한 말이었다든가. 그렇게 있어 보이는 척 말하면 내가 혹시라도 살아 돌아올까 봐 뒷일은 생각 안 하고 내뱉은 거라든지?”
“아냐!”
세렌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직후 살짝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젠장.”
“그러니까 왜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해.”
“…그러게나 말이야. 가능하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의 날 한 대만 때리고 싶군.”
뜻밖에도, 세렌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이 말에 살짝 움찔할 뻔했다.
방금 이 녀석이 내뱉은 말은 회귀한 내가 자주 가졌던 생각이라서 그렇다.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봐서 말해 줄게.”
“알겠어. 그것보다 넌 수련회에 왜 참가했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넌 왜 온 건데? 이 수련회가 얼마나 위험한 줄 모르는 거야?”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 배드니컨 줄 알겠다.
“집안 행사잖아. 가호까지 받았는데 참가 안 했다간 웃음거리가 될걸.”
“그건… 그렇겠지만.”
잠깐 망설이던 세렌이 말했다.
“…이 수련회, 한번 참가하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없어.”
“크게 다치면?”
“교관 동에 있는 병실에서 쉬게 해줄걸? 교의선생이라고, 현직 성직자인 대사범이 있는데 그 사람이 상처도 치료해 줄 거야.”
“…….”
어쩐지 이상한 반응이었다.
배드니커의 수련회가 위험한 건 알고 있지만… 굿스프링의 영애가 이 정도로 겁먹을 일인가?
수련회의 사망률이 높긴 해도 세렌 정도의 실력이라면 죽을 일은 없을 텐데.
태도를 보니 나를 만나기 위해 참가한 건 아니고, 별도의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고.
“뭔데?”
“…나중에 말해 줄게.”
“왜.”
“미친년 취급당하기 싫으니까.”
무슨 말이지?
어쨌든 세렌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굳이 나와 가장 떨어진 자리에 털썩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기라도 생겼는지, 빤히 쳐다봐도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성격 진짜 별나네.’
나쁜 녀석은 아닌데, 마냥 착하다기엔 입이 거칠고, 대하기 편한 타입도 아니다.
게다가 어쩐지 감추고 있는 것도 엄청 많은 것 같고.
아무튼 앞으로는 세렌 굿스프링이 기본적으로 까칠한 녀석이란 사실을 뇌리에 박아 둬야겠다.
“기억났어……!”
그리고 세렌이 떠나자마자 누군가가 후다닥 달려와서 내 옆에 앉았다.
주근깨 머리의 소녀, 팜이다.
“뭐가?”
“배드니커의 막내와 굿스프링의 삼녀 사이에서 오갔다는 혼담 말이야!”
그리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배드니커의 막내!”
“나지.”
“굿스프링가의 삼녀……!”
“세렌이지.”
“역시나!”
팜이 숨을 헐떡거렸다.
상태가 좀 위험해 보인다.
“왜 굿스프링의 혈족이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참가했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던 거라면 납득, 또 납득이지!”
“아 좀, 시끄러워.”
카리스가 다가오더니 팜의 머리를 꾹 눌렀다.
내 룸메이트인 에반도 호기심 섞인 얼굴로 말했다.
“약혼자였구나. 왠지 친해 보이더라.”
“안 친해. 그리고 혼담 그거 깨진 지가 언젠데.”
“악! 그러고 보니 그랬지! 헉, 잠깐! 혼담은 이미 깨졌지만, 그래도 서로에 대한 상사상애는 사라지지 않고, 마침내 가문을 뒤로한 채 사랑의 도피를…….”
팜이 머리를 눌려 찌그러지면서도 속사포처럼 외쳤다.
에반이 잠깐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전 수업 때 대단하더라. 솔직히 네가 완주할 줄은 몰랐어.”
일부러 화제를 돌려 준 걸까?
배려심 넘치는 녀석이다.
“오랜만에 무리했더니 뒤질 것 같더라.”
“하하. 엄살은.”
“너야말로 3위인가, 위로 통과했잖아?”
“체력은 자신 있는 편이거든.”
“…….”
나는 잠깐 멋쩍게 웃는 에반을 보았다.
에반 헬빈.
헬빈가의 삼남이며 주무기는 검.
아버지이자 가주인 도즈 헬빈이 창안한 비전 검술 [레이븐]을 주로 쓰는 녀석.
동명이인일 확률은 아예 없다.
나는 포크로 고기를 쿡 찌르며 생각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보기만 해도 맥 빠지는 놈이…….
10년 후엔 정말로 대륙 최악의 범죄자가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