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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62화 (62/172)

62화

이번 수련회에 참가하고 놀란 점은, 이곳에 나조차도 한 번씩은 이름을 들어 본 유명인들이 잔뜩 포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헥토르나 세렌은 말할 것도 없고, 달리기에서 1위를 차지한 카론 우드잭에 루비에타 가문의 처형인, 슈발리에의 흑기사, 나이트워커(Nightwalker)의 젊은 족장과 훗날의 수인족 영웅까지…….

그야말로 미래의 제국을 지탱할 영웅들의 대집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내 귀에 많이 들린 녀석의 이름을 대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에반 헬빈이다.

10년도 아니다.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흘러도 제국에서 에반 헬빈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게 된다.

아마도 에반은 1~2년 이내에 영웅 기관인 [헤로스]에 입관할 것이다.

그리고 헤로스 출신의 영웅으로서 전무후무한 업적을 쌓으며 기관은 물론, 제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니 영웅 에반 헬빈의 타락은 [인류에게 가장 뼈아픈 배신]이라고도 불렸다.

나는 에반을 보았다.

회색 머리카락에 순진한 얼굴은 소년의 것이었다.

헬빈 가문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내 기억대로라면 지방 촌구석에 있는 그저 그런 가문일 거다.

영웅의 피를 흐릿하게 잇고 있기는 하지만, 헬빈 가문에서 뛰어난 영웅이 나온 적은 없다.

그런데도 에반은 제법 유명한 편이다.

나조차 한 번은 들어 봤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여러 검술 교류회를 전전하며 성과를 거뒀고, 그를 가르친 검술 선생들도 하나같이 그 재능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문은 금방 제도帝都까지 소문이 번지는 법.

‘애초부터 싹이 구린 놈은 아니란 건데.’

사실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내 안목도 속일 만큼 더럽게 음험한 새끼거나…….

이런 순박한 놈이 사상 최악의 범죄자가 될 만한 어떤 사건이 있었다든가.

‘마침 룸메이트니까.’

당분간은 지켜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러다 만약 답도 없을 만큼 음험한 놈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마지막 남은 고기를 씹어 삼켰다.

* * *

점심을 먹고 연무장으로 나가니, 뒤처져 있던 놈들이 하나둘씩 캠프로 돌아와서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잘나신 귀족 놈들이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는 모습은 여러 의미로 각별했다.

나는 적당한 곳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니 기사들까지 나타났다.

그놈들은 양어깨에 축 늘어진 영도들을 얹고 있었는데,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로 흙바닥 위로 던졌다.

“게헥.”

“억…….”

살아는 있구만.

역시 좋은 걸 처먹고 자란 놈들이라 그런지 튼튼하다.

귀족가의 자제이긴 하지만, [위대한 가문]의 혈통을 이었다면 대부분이 무가의 자식이다.

마냥 온실 속 화초로 취급하기엔 애매하다는 뜻이다.

어렸을 적부터 나름대로의 훈련을 받았을 테니까.

“배, 배고파…….”

한 영도가 기어서 식당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살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힘내라, 힘.’

나는 영도의 생존 본능을 열렬히 응원했으나, 그 뜨거운 레이스를 막는 비정한 인간이 있었다.

“멈춰라.”

기사의 말에 영도가 처량한 시선으로 올려다봤지만.

기사에겐 인간의 마음이 없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시간은 끝났다.”

“그, 그럴 수가. 아침도 못 먹었는데…….”

“밥을 먹고 싶었다면 빨리 들어왔어야지.”

“갸아악…….”

영도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 영도를 통제하기에 밥보다 나은 수단은 없을 것 같다.

비겁하고 졸렬한 느낌이 들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것 자체가 이미 효과가 있다는 방증.

식사량 자체는 제한이 없다고 해도, 하루 활동량이 워낙 크다 보니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금방 허기가 지기도 하고.

“자. 충분히 쉬었으면 다시 모여라. 오후 수업을 시작하겠다.”

나야 충분히 쉬고, 밥도 먹었고, 배가 꺼질 때까지 소화도 잘 시켰지만.

방금 도착한 놈들은 아직도 바닥을 기는 녀석들이 태반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관들이 했던 말을 무를 것 같지는 않다.

못 움직이는 놈들을 발로 뻥뻥 차면서 연무장 중앙으로 모이게 했다.

“괜찮아?”

“으, 응…….”

에반은 그 와중에도 몇몇 녀석들을 챙겨 줬다. 부축하거나, 업기까지 하면서 도와준다.

생긴 것도 그렇고, 행동거지도 그렇고 전형적인 호인이다.

사서 손해를 보는 타입이랄까.

아무튼 중앙에 모인 영도들이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섰을 때쯤, 단상 위로 한 남자가 올라갔다.

젊고 잘생긴 남자였지만, 입술이 가늘어서 내 기준으로는 비호감인 외모였다.

“안녕하세요, 영도 여러분. 저는 후안이라고 합니다. 이번 수련회에선 무예선생으로서, 영도분들에게 전반적인 무술을 가르치게 될 겁니다.”

아마도 수련회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듣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 목소리가 교관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진다.

“으음…….”

후안은 좀비처럼 자신을 쳐다보는 영도들을 보며 볼을 긁적거렸다.

“오전 수업은 탄코 선생이었지요? 여러분 모두 많이 지친 것 같군요. 어쩔 수 없죠. 오늘은 첫날이고 하니, 편히 앉아서 수업을 진행할게요.”

“오, 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에 대부분의 영도들이 털썩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흙바닥에 구르는 것에도 망설이던 놈들이었지만, 육체의 피로 앞에선 그딴 걸 생각할 겨를도 없는 모양.

그러나 나는 무예선생의 말에 살짝 위화감을 느꼈다.

언뜻 보면 영도들을 배려해 주며, 휴식을 권유하는 대단히 좋은 사람 같지만…….

‘하필 이런 타이밍에?’

오늘로 고작해야 수련회 이틀째다.

수렵선생이라고 해서 영도를 이렇게 험하게 굴리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일부러 과도하게, 더 험악하게 구는 건 지금이 적응 기간이기 때문.

그런데 이자의 휴식은, 기껏 팽팽하게 당겨졌던 영도들의 긴장감을 다시 느슨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지금이야 편하고 좋겠지만…….’

글쎄.

당장 다른 수업이 되면 다시 개같이 구를 텐데 이 휴식이 과연 좋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내가 꼬여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은 저 무예선생이란 작자의 맘이 여리고, 착해빠진 사람일 수도 있으니.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교수들의 평가는 이미 시작됐을 테니 어설픈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감점 요소다.

1위로 수료하기 위해선 어설픈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지.

‘1위?’

문득 떠올린 생각에 살짝 당황했다.

철혈공이 흘린 말이 자연스레 내 목표가 됐기 때문이다.

‘확신이 있어서인가.’

철혈공이 신상필벌에 얼마나 엄격한 인간인지는 이미 느꼈다.

아마 1위를 하게 되면 단순히 칭찬 한두 마디로 안 끝날 터. 영옥에 버금가는 무언가가 주어질 수도 있다.

“무술의 시작점이란 대저 호신護身-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다릅니다. 전체적으로 종류가 훨씬 늘었지요. 사용하는 무기나 자주 사용하는 신체 부위, 특정한 상대나 환경에서의 전투법, 혹은 희귀한 체형으로 태어난 자를 위한 전문 무술도 존재합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희귀한 체형이란 게 무슨 말씀이죠?”

“선천적인 외팔이나 절름발이, 혹은 장님을 말합니다.”

“아.”

“이런 자들의 수련 방식은 당연히 일반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지요.”

수업은 대체적으로 무예에 대한 이론 설명이었다.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제국의 대표적인 무술과 그 특징, 각각의 장단점……. 수련과 대련, 실전에서 조심해야 할 사항 등.

솔직히 말해서 무가의 자식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대다수다.

목소리는 듣기 좋았으나 수업 자체는 지루해서,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영도도 있었다.

“일어나세요.”

그런 놈들 보고도 무예선생은 조용히 주의를 줄 뿐 실질적인 처벌을 하거나 감점을 주지도 않았다.

지적받은 놈도 긴장이 풀렸는지 멍청한 웃음이나 흘려댔다.

아무튼 그런 김빠지는 수업은 금방 끝나고, 고대하던 저녁 식사 시간.

“너는 입장할 수 없다.”

“아, 안 돼……!”

포인트 10점 미만의 영도들은 절망 섞인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반항하는 놈은 없었다.

첫날에 본보기를 충분히 보여 줬기 때문이다.

배고픈 영도들이 좀비처럼 식당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나는 밥을 먹으며 그 꼴을 구경했다.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옆에 앉은 에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녀석은 가산점 2점을 얻었다.

어제의 감점을 충당하고도 남는 성과다.

“앞으로 한 끼 식사에도 진심으로 감사해야겠어.”

어쩐지 에반의 목소리를 들으니 영산 시절이 떠올랐다.

일주일을 내리 굶었던 때, 돌멩이도 먹을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절 말이다.

“…….”

설마 본가 수련회를 하며 그때 기억이 떠오를 줄은 몰랐다.

‘세상사 새옹지마라…….’

나도 모르게 대사형의 말버릇을 떠올리고, 혼자 흠칫하고, 혼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져서일까.

식욕이 뚝 떨어져서, 그날 저녁은 평소의 절반도 먹지 못했다.

* * *

저녁 수업엔 다시 수렵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사범은 8명이나 있다고 했는데, 벌써 모습을 드러내는 빈도가 심상치 않다.

교관 사이에 딱히 상하관계는 없는 듯 보였으나, 이 남자가 전담 교관 같은 위치에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녁 수업은 대련이다. 무기는 나눠 주는 걸 쓰도록. 2명씩 짝을 짓도록 해라. 5분 주겠다.”

수렵선생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선언한 다음, 덧붙였다.

“참고로 대련에서 승리한 쪽은 1점 가산점이고, 반대로 패배한 쪽은 2점 감점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영도 놈들이 술렁거렸다.

그중에서 어떤 어벙한 낯짝의 소유자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겼을 땐 1점이고 졌을 땐 2점인 겁니까?”

어떤 어리바리한 새낀가 했는데 카리스였다.

수렵선생이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카리스 어스맨, 세상을 아주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있군. 머릿속에 어떤 꽃밭이 펼쳐져 있는지, 직접 뚜껑을 열어 확인하고 싶을 정도야.”

그 서슬 퍼런 목소리에, 카리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오래 살고 싶다면 잘 들어라. 개고생의 끝에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가 있을 것이라 단정 짓지 마. 이 세상은 네놈의 노고 따위 기억하지 않는다. 얻고 싶은 게 있다면 밑바닥부터 철저히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어. 반대로, 때때로 단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걸 잃게 되지.”

수렵선생의 말은 어쩐지 내가 삶에 임하는 자세와 맞닿는 면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렵선생 탄코.

생긴 걸로 봐선 초원의 소수 민족 출신인 듯한데, 내가 알기로 그쪽 사람들은 어렸을 적부터 자연과 함께 산다고 들었다.

아마 철이 들기도 전에 약육강식의 섭리에 대해 깨달았겠지.

카리스는 압도된 채로 못이라도 박힌 듯 서 있었고, 그사이 발 빠른 놈들은 벌써 행동에 나섰다.

“어… 당신, 나랑 붙을래?”

“시, 싫어. 그쪽은 슈발리에가 출신이잖아…….”

“그럼 나는 어때?”

“으음. 나는 웬만하면 검사랑 붙고 싶은데…….”

대다수의 영도들은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찾으려고 혈안이 됐다.

2점 감점이라는 말의 무게를 이제야 이해한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대다수의 점수는 10점.

당장 10점 미만이 되면 저녁 식사의 권리를 잃게 되고… 앞으로도 어떤 페널티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이 영도들도 지금에서야 점수의 무게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서로 약자만을 찾는 한심한 혼란 속에서, 의외로 그럴듯한 대련이 성사되기도 했다.

“후회하지 않겠죠?”

“물론.”

나로서도 뜻밖의 전개.

헥토르와 세렌이 붙게 된 것이다.

나는 흥미로운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헥토르가 한 수 위지 않을까 싶다.

헥토르 쪽의 나이가 더 많고, 1차 가호식에서 받아 뒀던 가호가 있으니 숙련도가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렌이 무조건 질 것 같지는 않다. 잠시나마 같이 싸워 봤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세렌은 이미 일반적인 영도 수준이 아니다.

지금 당장 실전에 투입돼도 딱히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란 뜻.

“너는 상대를 찾지 않나?”

그때 수렵선생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여전히 헥토르와 세렌을 보며 반문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냐.”

“이번 수련회의 총원은 39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두 명씩 짝을 지으면 1명이 남게 되는데, 남는 사람은 누구와 대련합니까?”

“마지막 남은 한 명은 나와 붙게 된다.”

“……!”

이 말에 아직 상대를 못 구한 영도들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대사범의 위명은 제국 전역에 자자하다.

그 철혈공이 직접 초빙한 귀인 중의 귀인이니 당연하다.

비록 교육에 치중한 성향 탓에, 현 대륙 최강자들 사이에 이름을 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일개 영도와는 비교 자체가 실례일 만큼의 강자인 것이다.

“교관님과의 대련에서 패배하더라도 점수는 깎입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는군.”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을 보았다.

남은 영도들의 목소리에서 슬슬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이봐요! 그냥 나랑 싸웁시다!”

“그, 그럴까?”

“그쪽은 나랑 붙는 게 어때요?”

“으윽… 어쩔 수 없나.”

잘나가는 영도와의 싸움을 피하던 놈들도, 수렵선생과 붙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짝을 짰다.

“왜 계속 가만히 있는 거지?”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 나를 보며 수렵선생이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남는 사람은 교관님과 붙게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러니까요.”

수렵선생은 순간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미간을 좁혔으나.

“…….”

곧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지금 수렵선생의 웃는 이유는 나와 같지 않을까?

나도 그 사실을 깨닫고 마주 웃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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