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수렵선생 탄코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이 남자가 제국에서 쉽지 않은 삶을 보냈을 거란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그렇게 생겼으니까.
거친 말투에 투박한 이목구비, 거기에 초원의 소수 민족 특유의 이질적인 외모까지…….
아마도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기 전에는 매 순간 시비가 걸리는 삶이 아니었을까?
“슬슬 포인트의 중요성에 대해선 알게 됐을 텐데.”
수렵선생이 말했다.
“루안 배드니커, 현재 너의 점수는 11점이다. 내게 패하게 되면 9점이 된다는 뜻인데.”
“상관없습니다.”
“그래?”
수렵선생이 힐끗 뒤를 보았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기사들 몇몇이 다가와서, 다른 영도들의 대련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투가 과격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듣기로는 주먹을 쓴다고.”
그래도 대사범이라고, 나와 헥토르의 대련에 대한 소문은 이미 접수한 모양이다.
장비라면 칠죄검이 있기는 하지만, 딱히 지금 쓸 생각은 없다.
그럴 자신도 없고.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나도 맨손으로 상대하겠다.”
얕보는 말투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오케이.
오히려 적절한 페널티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한 손만 쓰겠다. 이러면 어느 정도의 형평성은 맞겠지.”
“…….”
“표정이 왜 그러나?”
“그건 좀 무리하는 게 아니신지.”
“그걸 판단하는 건 나다.”
“음. 그렇긴 하죠.”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에선 투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상대가 대단한 위인인 건 둘째 치고…….
무인이 이 정도까지 무시당했다면 한 대 먹여 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 * *
내가 싫어하는 말 중에선 ‘실전에서 제 실력을 못 낸다’라는 개소리가 있다.
애초에 모든 대련과 모의전은 실전을 위한 것이다.
연습 때 무패행진을 이어 간들, 실전에서 그 퍼포먼스가 나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는 뜻.
실전에서 제 실력을 못 낸다고?
그 반대다.
실전에서 나온 그 꼬락서니가, 그놈의 원래 실력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도 대련의 필요성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는다.
“…….”
수렵선생은 아주 독특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대련이기는 하지만, 전신에선 흉포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게 의도된 연출이란 걸 아는 나조차 긴장이 될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웬만한 영도는 이 남자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 것이다.
탓, 수렵선생이 지면을 박찬 순간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진 짐승이 내게 몸통을 들이박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선공?’
의외다.
이런 대련에서. 보통은 하수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남자는 지금 교관 신분이잖아.
‘아. 그래서인가?’
가르침을 줘야 하는 교관이라서 오히려 틀에 박힌 싸움이 아닌 뜻밖의 공세를 취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점을 빼고도 이런 싸움 방식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남자기는 하다.
관례니 어쩌니 하는 게 통용될 것 같은 낯짝도 아니니.
나는 수렵선생의 돌진을 피하지 않고 마주 달려 나갔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진 순간, 수렵선생의 움직임이 약간 느릿해진다.
나는 순간적으로 수렵선생의 무게 중심의 변화에 주목했고… 그 상체가 비틀린 순간, 발차기를 날릴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쐐액-!
대련에선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게 철칙.
그런데도 방금 수렵선생의 발차기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끼쳤다.
마나 없이 이 정도 속도라?
육체를 이 정도까지 갈고닦은 사람은 전생에 용병질을 하면서도 본 적이 없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긴 했으나 다음 공격도 이렇게 잘 흘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절반은 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어쩌면 수렵선생이 조금 봐준 걸 수도 있겠다.
이번엔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수렵선생의 직접적인 수준을 알게 됐기 때문에, 교관과 영도라는 차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어설프게 수세를 취했다간 오히려 몰릴 테고.
그렇다고 정직하게 붙었다간 다섯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당한다.
‘아쉬운데…….’
지금의 미완성된 몸뚱이가 아닌, 성장한 육체로 싸웠다면 더 재밌었을 것을.
반대로 흥미롭기도 하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적과 싸우는 건, 그 자체만으로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몇 가지 전략을 떠올리며 허리를 굽혔다.
우선은 내게 몇 없는 유리함, 체격이 작다는 점부터 써먹어 보기로 한 것.
쐐액, 순식간에 수렵선생의 품으로 파고든 직후, 펼친 손바닥을 쭉 내지른다.
내공을 싣지는 않았으나, 형태는 백일식의 제이초식인 화륜이었다.
퍼억.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아무리 터프한 놈이라도 마나 없이 명치에 공격을 허용하면 이렇게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순간적으로 수렵선생의 전신에 빈틈이 노출됐으나, 나는 이어서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내뺐다.
쉭, 거의 간발의 차이로 수렵선생의 손아귀가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수렵선생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대로 떠나는 꼴을 지켜보지 않았다.
그대로 손을 뻗어서 수렵선생의 손목을 붙잡는다.
오른팔이었다.
‘오른팔을 썼다는 건, 쓰지 않는 건 왼팔이라는 거지.’
왼팔은 스스로 봉했고, 오른팔은 내가 붙잡았다.
게다가 서로 근접한 이 상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나는 오른손을 휘둘러 수렵선생의 턱을 후려쳤다.
빠악!
수렵선생의 턱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첫 유효타.
제대로 공격이 들어갔다는 증거였지만, 어쩐지 석연찮다.
수렵선생의 표정 때문이다.
도무지 허가 찔린 사람의 낯짝이 아니다.
연격을 잇기도 전.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복부에서 극심한 격통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육체와 정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걷어차였다. 나는 지면을 두 바퀴 정도 구른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쿨럭.”
한 박자 늦게 숨을 토해내며 정면을 응시했다.
수렵선생이 짐승처럼 달려오는 광경이 보였다.
나는 몸을 추스를 여유조차 없이 수렵선생과 맞붙었다.
근접한 상태에서 서로 수를 교환했다.
나는 수렵선생의 공세에 대응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방금 내가 어떤 공격에 당했는지 깨달았다.
무릎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렵선생은 교전에서 팔꿈치를 공격 수단으로써 빈번히 사용했다.
‘…이런 능구렁이를 봤나.’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수렵선생에게 있어 팔 한쪽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그리 커다란 페널티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남자의 주력은 다리였던 것.
‘특이한 무술인데…….’
초원의 전사들이 쓴다던 고유무술인가?
어쨌든, 무릎이건 팔꿈치건 한 번 맞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아팠다.
저 기술에 마나를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하나하나의 공격을 필살기必殺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의외로 수렵선생의 전투 방식은 나와 흡사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백일식의 초식 또한 모두 필살기니까.
내 전투는 대부분의 상황을 임기응변, 나쁘게 말하면 막싸움으로 대처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적합한 백일식의 초식으로 마무리하는 형태다.
나의 무공과 상대의 무술에서 공통점을 찾으니, 갑자기 머릿속의 뇌가 팽팽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격전 속이라는 사실도 잊고 상상에 몰입하고 말았다.
아직 미완성인 백일식의 후반부 초식.
어쩌면 그 창안의 단서를 이번 대련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대부분의 대련은 금방 끝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5분 이상 걸린 대련이 없었다.
애초에 대련의 형식이라서 공격이 과감했고, 그러한 형식의 싸움은 어떤 형태로든 빨리 결착이 나기 마련이다.
“졌다.”
“졌습니다…….”
“크윽.”
절망 섞인 얼굴로 고개를 떨군 녀석들.
패배한 대부분이 내일 저녁을 먹을 수 없게 됐다.
반대로 이긴 쪽의 표정은 당연히 밝았다.
아직도 포인트의 사용처에 대해선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이번 수련회에선 목숨만큼이나 귀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져, 졌다.”
헥토르는 멍한 얼굴로 스스로의 패배를 시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세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거두며 짧게 목례했다.
헥토르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상대에 대한 원망보단, 스스로가 치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루안 앞에서 당당히 선언했다.
이번 수련회에서만큼은 자신이 앞설 것이라고, 반드시 성과를 거두겠노라고.
그리 선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볼썽사납게 패배하다니.
“…힘을 숨기고 있었나?”
패자의 추한 변명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헥토르는 눈앞의 인물이 갑자기 강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렌 굿스프링.
따스한 봄날과는 눈곱만큼도 연관성도 없는 상대는 얼음을 박은 듯한 눈동자로 헥토르를 보았다.
“그럴 리가요.”
“그럼 이 단시간에 이렇게 강해졌다는 것이냐?”
“그런 셈이죠.”
그리고 앞으로도 더 강해지겠지, 하는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애초에 세렌은 이 세상 누구보다 빨리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 살아서 다시 만나면 무슨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며.
‘…염병.’
미친놈, 진짜로 머리가 돈 거지.
그딴 말은 왜 지껄여서 사람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물론 말을 꺼낸 것도 자신이니까, 스스로를 욕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세렌을 혀를 차며 루안을 찾아봤다.
이 요주의 인물이 대체 누구랑 붙고 있나 궁금해서였는데, 어디 있는지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사람이 유난히 몰려 있는 장소를 보았다.
세렌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인파를 비집을 필요도 없이 영도들이 좌우로 좍 갈라졌다.
이럴 때는 거추장스럽게만 여겨지던 위명이 조금 고맙기도 했다.
아무튼 인파 너머엔 찾고 있던 루안이 있었고… 수렵선생도 있었다.
“허.”
어떤 재수 없는 놈이 교관과 싸우나 했는데, 저 녀석이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렌은 루안이 범상치 않은 놈이란 걸 알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대다수의 영도들은 그 사실을 모를 거다.
평판이 나락 가까이 치달은 녀석이니 누구랑 붙을지 골라잡을 수 있었을 텐데…….
‘교관이랑 싸우는 게 저놈 의도였나?’
미친 생각이긴 하지만, 저 미친놈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세렌은, 잠시 후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두게 됐다.
“…….”
“…….”
대신 왜 이곳에 사람이 이토록 모여 있는지, 아무 말도 없는지 알게 됐다.
일단 둘 다 맨몸으로 싸우고 있었다.
이번 대련자 대부분이 날이 없는 칼이나 창, 목검 따위의 무기를 채용한 걸 떠올리면 의아한 일이었으나.
직접 관전하고 있자니 그러한 의문은 자연히 사그라졌다.
저 두 명에 한해서는 오히려 목검을 들려 주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수렵선생 탄코.
저 대사범의 강함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세렌은 탄코에 대해 일반적인 영도보단 조금 더 잘 알고 있었다.
저 사내는 사냥만이 아닌, 대인전에 있어서도 전문가다.
초원의 대전사 출신이라서 그렇다.
제국 동부 끝자락에 펼쳐진 개활지, 드넓은 초원에서 대전사라는 이름을 손에 넣으려면 모든 부분에서 최고여야만 한다.
사냥은 물론이고 투쟁에 있어서도 그렇다.
대전사가 되기 위한 과제 중 하나는, 초원 전역을 돌며 27개의 대표 부족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인정을 받는 방식이란 대체로 투쟁이다.
그리고 세렌이 알기로, 탄코는 역대 대전사 중 가장 많은 승리를 거뒀다.
‘무패의 대전사.’
실제로 무패無敗는 아니지만, 탄코가 그러한 이명으로 불리는 데에 이견을 표한 자는 없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보이는 대련이 대등해 보이는 건, 지금 탄코의 정체성이 대전사가 아닌 수렵선생이라서 그런 것일까?
물론 세렌의 눈썰미는 수렵선생이 안고 있는 페널티를 단숨에 깨달았다.
탄코가 팔 하나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 말이다.
쐐액!
그때 수렵선생의 발차기를 루안이 도약하며 피했다.
치명적인 빈틈, 수렵선생이 주먹을 내지른다.
“와……!”
그 순간 누군가 감탄을 터뜨렸다.
아마 세렌의 목소리가 섞였을지도 모르겠다.
도약했던 루안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수렵선생의 팔에 매달렸다.
세렌에겐 커다란 뱀이 수렵선생의 팔을 감싼 것처럼 보였다.
꾸드득!
‘관절기!’
놀랐다.
세렌이 보기에도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 세련된 기술이었다.
저대로라면 어깨가 뽑히고, 더 심하면…….
…그 순간 수렵선생이 왼쪽 팔꿈치로 루안의 등을 내려찍었다.
콰직!
“끅.”
동시에 루안의 몸뚱이가 지면에 떨어졌다. 그러나 고개를 든 루안은 실실 웃는 낯짝을 하고 있었다.
“왼팔, 쓰셨네요.”
“…….”
수렵선생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