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1위. 카론 우드잭 43점.
2위. 제로스 실베르 31점.
3위. 신바 29점.
4위. 한스 밴더 28점.
5위. 헥토르 배드니커 25점.
…….
…….
16위 루안 배드니커 18점.
…….
…….]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2위와 3위는 처음 보는 이름이고, 4위는 뭐? 한스 밴더?
수업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는 나조차도 저놈 이름이 셀 수도 없을 만큼 호명된 건 알고 있다.
- 한스 밴더, 감점 1점.
- 한스 밴더, 감점 2점.
- 한스 밴더…… 또 너냐?
당연히 가산점이 들어갈 때는 아니고, 까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랬던 놈이 헥토르보다 점수가 높다고?
물론 그 이상으로 이상한 건 카론의 점수다.
“…43점?”
시작할 때 주어지는 포인트는 10점.
그렇단 건 저놈이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33점이나 벌었다는 뜻인가?
나는 확인 삼아 에반을 보았다.
에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영도들의 점수 대부분을 계산하고 있던 이 녀석도 모르는 일이란 거지.
“카론 우드잭.”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보니 탁자에 앉은 채 물을 홀짝이고 있는 카론과, 그 앞에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헥토르가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글쎄. 뭘 묻는지 모르겠군.”
“시치미 뗄 생각이냐? 그럼 확실하게 묻지. 나는 지금 포인트에 대해 묻고 있는 거다.”
그러자 카론이 픽 웃었다.
“내게 말해 줄 의무라도 있나?”
“있지. 감히 이 배드니커의 수련회에서 부정한 짓을 저질렀으니 말이야. 네 아비가 봤다면 부끄러워하실 거다.”
“재밌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래.”
카론은 헥토르의 도발에도 동요하지 않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와 내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짧게 해명하자면, 나는 그 어떤 부정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뭐?”
“별개로 하나 충고하마, 헥토르 배드니커. 순위권에 들 생각은 포기하고 수료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라. 네 실력이라면 그 정도는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네놈……!”
헥토르가 으득 이를 깔았다.
그리고 예전에 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허리춤에 채워진 칼자루를 쥐었다.
카론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가라앉은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형님, 진정해.”
“…비켜라, 루안.”
“뭘 비켜. 설마 여기서 싸울 작정이야?”
나는 힐끗 통신 수정을 보았다.
아마도 교관 놈들은 저걸 통해 이쪽의 동향을 엿보고 있을 터.
주먹싸움이 일어나면 즉시 개입한 뒤, 페널티를 먹일 거다.
“머리 좀 식혀. 그 다혈질 성격 때문에 여태 손해 본 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
“…….”
헥토르가 멈칫했다.
그사이 카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라운지를 떠났다.
그 뒤를 따라서 영도 무리가 우르르 나갔다.
한스를 포함한 익숙한 얼굴 몇몇이 보인다. …그러니까 방금 게시판에서 본, 상위권에 있었던 놈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씩씩 대고 있는 루비에타 영애가 보였다.
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봤다.
‘스물네다섯 정도인가.’
일견 이쪽의 머릿수가 더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글쎄.
자세한 건 까봐야 안다.
“카리스, 테이블 좀 모아 봐.”
“왜?”
“얘기할 게 있으니까 그렇지.”
“지금 점심시간인데…….”
“밥 처먹을 때가 아니야, 이 새끼야.”
나는 헥토르를 보면서도 말했다.
“형님도 좀 앉으시죠.”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야 카론 우드잭에 대해서지요.”
원래라면 이런 애들 싸움에 개입 안 하고, 자기개발에나 신경 쓰려고 했는데…….
이 정도까지 스케일이 커졌다면 나도 더 이상 잠자코 있기 힘들다.
‘거기에…….’
어쩐지 슬슬, 카론 놈이 1등을 차지한 모습이 거슬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 * *
귀족파와 서민파가 한자리에 모였다.
물론 저쪽에도 서민이 있고, 이쪽에도 귀족이 있지만…….
내 독단으로 그렇게 분류한 놈들이, 지금은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운지에 남은 건 총 스물여섯 명이었다.
적은 인원은 아니지만, 많지도 않다.
“얘기할 게 뭐가 있나요? 분명 저 더러운 놈이, 더러운 수단을 취한 거겠죠!”
루비에타 영애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외쳤다.
생긴 건 고운데 성격은 불같네.
나는 우선 그 착각을 잡아 줬다.
“그런 수단을 취했다면 교관진이 깨닫지 못했을까?”
“물론……!”
언성을 높이던 루비에타 영애가 합, 하고 입을 닫더니 헥토르의 눈치를 봤다.
당연하다.
대사범들을 의심하는 건 배드니커를, 나아가서 그들을 초빙한 철혈공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철혈공의 신자 1호인 헥토르로선 당연히 유쾌한 일이 아닐 거다.
“백번 양보해서 영애의 말이 맞는다고 쳐. 그런데 자기 한 명도 아니고, 단체로 순위를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건.”
“이제 다들 알 거 아냐? 상위권에 기록된 영도, 헥토르 형님을 제외하면 죄다 카론 무리였다고. 아. 한스는 아닌가?”
“…한스 밴더는 얼마 전부터 카론 옆에 들러붙었다.”
헥토르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이런저런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정말로 자기 패거리의 포인트만 올렸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룰 추가.”
헥토르의 말에 주변이 흠칫했다.
그렇지.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구나.
계속 저렇게 빠릿빠릿하게 굴었으면 내가 이렇게 나설 일도 없었을 텐데.
“맞아. 아마 그 권리를 이용해서 모종의 수작질을 부린 거겠지.”
“수작질이라면?”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짚이는 건 있어.”
“뭔데?”
“스컬.”
내 말에 구석에 있던 스컬이 흠칫 놀랐다.
“왜, 왜.”
“너 언제 포인트가 2점까지 떨어졌냐?”
“…….”
내 물음에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물들었다.
“그, 글쎄? 최근에 감점당하는 일이 많았으니까…….”
“에반, 저 말 맞아?”
“아니.”
에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컬은 수련회가 시작하고 1번밖에 감점당하지 않았어. 마찬가지로 가산점도 1번 받았으니 상쇄됐고, 대신 대련은 총 1승 2패를 기록했지.”
“그래? 그럼 지금 포인트는 7점이어야 한다는 거네?”
나는 스컬을 보며 물었다.
“그럼 다시 물을게, 스컬. 네 5점은 대체 어디 갔냐? 제 발로 가출한 건 아닐 거 아냐.”
“…….”
“스컬.”
“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스컬이 울상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처음엔… 처음엔 그냥 사소한 거래였어.”
“거래?”
“그래……! 1점을 주면, 최고급 스테이크를 배 터지게 먹게 해준다고…….”
“스테이크라고?”
“여기서 그런 걸 어떻게…….”
물론 영도 식당의 퀄리티가 형편없는 건 아니다.
당연히 고기도 나오고.
문제는 맛인데, 당연하지만 몸에 좋은 건 대체적으로 간이 싱겁고 밋밋하다.
한창 들끓는 소년 소년들의 입맛을 충족시키기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는 뜻.
“그보다 1점을 준다니, 그게 말이 돼? 포인트는 그렇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게…….”
“‘포인트는 거래가 가능하다.’”
나는 턱을 괸 채로 말했다.
“카론이 그런 룰을 추가했다면 가능한 일이야.”
주변에서 탄성과 침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헥토르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스테이크는 어디서 구한 거지? 반입할 수는 없었을 텐데.”
“마도구가 있는 것도 아닐 거야. 첫날에 철저하게 검사했을 테니까.”
그 말대로다.
아마 입소 당일, 교관진들이 제법 까다롭게 몸을 수색했다.
내 영옥을 보고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이건 수련용으로 가져온 거고 이것만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로스 실베르.”
스컬이 짓씹듯이 말했다.
“그 녀석의 가호야.”
“제로스라면 아까 전 2위?”
“언제부턴가 카론 옆에 붙어 다니던 녀석이잖아. 그 잘난 척하는 놈.”
“맞아.”
스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가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잔뜩 갖고 있었어. 온갖 먹을 것에 맥주나 연초, 심지어 바깥에서도 구하기 힘든 귀한 장신구까지…….”
대충 공간 이동과 관련된 가호를 손에 넣은 걸까?
잘 모르겠지만, 이제 얼추 사태의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다.
“그놈이 밀수꾼 역할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스컬 이외에도 제로스란 놈과 거래한 녀석들, 더 있지?”
그러자 제법 많은 영도의 얼굴에 뜨끔한 표정이 생겼지만, 곧 숨길 수 없다고 여겼는지 순순히 실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 오고부터 저녁밥을 한 끼도 못 먹었는데, 어젯밤 갑자기 먹을 걸 준다고 해서.”
“나는 맥주로 유혹당했다. 방금 뽑은 생맥주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데, 그 광경을 그냥 지나친다면 난쟁이 전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 저는 향수를 하나 샀는데요. 땀 냄새를 지워 주는 데에 탁월하다고-.”
그 모습을 본 루비에타 영애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한심할 수가……. 당신들이 미래에 저와 같은 영웅이 될 거란 생각을 하니 없던 현기증이 생길 지경이에요.”
“루비에타 영애.”
“뭔가요?”
에반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알기로 당신의 포인트는 현재 23점이어야 하는데, 아까 보니 20점이더군요.”
“그, 그걸 어떻게…….”
“…….”
“헛!”
일동의 시선이 루비에타 영애를 향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어버버하다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자, 자네타 보석점에서 한정판으로 발매한 티아라가 있는데 그걸 고작 3포인트에 넘긴다고 해서…….”
“…….”
“이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못 구하는 물건이라구요……! 그걸 3포인트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남는 장사인 줄……!”
“예예. 잘 알겠으니까 좀 닥치시고.”
루비에타 영애는 잠깐 욱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부끄러움 때문인지 입을 닫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앞으로는 저쪽에서 뭘 제시하든 포인트를 주지 말자고. 이 이상 격차가 벌어지면 더 이상 따라잡기 힘들 테니까.”
그런데 어째 반응이 시원찮다.
내 말에 동조하는 영도도 많지만, 어쩐지 석연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놈들도 비슷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나는, 나를 잘 알아.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상위권에 들 수 없어.”
스컬이었다.
“이건 의지나 근성의 문제가 아냐. 그냥 태생적인 한계라고.”
“그래서?”
“…포인트는 최상위권을 경쟁하는 사람한테나 의미가 있어. 나는 수료만 하면 돼. 배드니커의 수련회에서 아무 탈 없이 수료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경력이 되니까.”
“과연…….”
나는 스컬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넌 앞으로도 계속 포인트를 팔겠다는 건가.”
내 말에 스컬이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
“제로스가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이곳에서 판 1점을 나중에 가면 백 골드로 셈해 준댔어!”
그리고 주변을 보며 외쳤다.
“10포인트만 팔아도 천 골드나 된다고!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게 바뀌는 줄 알아? 잘나가는 명문 귀족 나리들은 절대 모르겠지……!”
“후회할 텐데.”
“…아니. 포인트가 없어도 수료하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어. 그러니까… 너희한테 미안하지만, 나는 여유가 되는 대로 포인트를 계속 팔겠어.”
스컬은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라운지를 떠났다.
“…면목 없지만, 나도.”
“미안해.”
“어쩔 수 없다고.”
그리고 스컬을 따라 하나둘씩 자리에서 떠났다.
거의 절반 이상이 되는 인원이 훅 떠났고- 이제 남은 인원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헥토르는 당연히 남았고, 나와 쭉 어울렸던 에반과 카리스도 있다. 거기에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세렌도 보였고.
나는 이들의 면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돈과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인재는 이 정도인가.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은데.”
“허참. 1점에 백 골드라니. 돈이 썩어나나?”
에반과 카리스가 한마디씩 뱉으니, 루비에타 영애가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썩어나지요. 제로스의 가문인 실베르는 대대로 거상 집안이었습니다. 황가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금전이 넘쳐나겠죠.”
“…그랬어?”
“그럼 우리에게 막을 방법은 없는 거 아냐?”
“그건 두고 봐야 알지.”
내 말에 영도들의 시선이 모였다.
“무슨 수가 있는 거야?”
“아, 제로스가 바깥 물건을 반입했단 걸 교관들한테 일러바치면…….”
카리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세……. 아마도 교관들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이 수련장 전부가 교관들의 감시하일 테니까.”
그러니 카론과 제로스의 다소 부정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교관들도 묵인했다는 뜻이다.
애초에 카론이 주도한 일.
고작 일러바치는 것만으로 끝났다면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우리도 밥이나 먹을까.”
“…당신은 왜 그리 태평한 거예요? 방금 포인트를 팔겠다고 말한 게 열 명이 넘어요. 더 이상 이쪽이 다수도 아니라구요.”
“글쎄다.”
어쩐지 방금 나간 놈들이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러나 아직은 추측에 불과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