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밥을 먹고 다시 공터로 향했다.
이미 영도들이 제법 모여 있었는데, 아마도 우리가 거의 마지막에 온 것 같았다.
중간쯤에 서 있는 스컬이 보였고…….
그 주변엔 요 며칠간 친하게 지냈던 녀석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 녀석들은 우리를 보더니 하나같이 시선을 피했다.
“…….”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에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울린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로 생각했나 보다.
카리스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리고 나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 기복이 없었다.
저놈들한테 아무런 유감이 없는 건 아니라, 나름 잘 놀았는데도 말이다.
이건 내가 선천적으로 모진 놈이라 그런 걸까?
“흠흠.”
단상 위에 서 있던 교관이 헛기침했다.
무예선생 후안이었는데,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뒤쪽엔 무려 대사범 전원이 집합해 있었다.
후안은 눈대중으로 영도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카론 영도, 모두 모인 게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일까.
교관진은 카론을 마치 영도들의 대표처럼 취급했다.
이런 인원 체크는 물론이고, 짤막한 지시사항이 있을 땐 카론을 통해 전달했다.
이동 수업에선 늘 카론이 앞장섰고, 저놈 또한 그러한 취급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순위는… 흠. 표정을 보니 모두 확인이 끝나신 듯하군요.”
후안이 어쩐지 거북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 모두 아시게 됐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론 영도가 추가한 룰은 [영도 간의 포인트 거래가 가능해진다.]였습니다.”
“…그걸 지금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헥토르가 노기를 참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안은 그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없는데요.”
“예?”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
후안이 빙긋 웃었다.
“헥토르 영도, 친절한 설명과 체계적인 교육을 바랐다면 배드니커의 수련회가 아니라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셨어야지요.”
처음이다.
저 교관 놈의 입에서 맞는 말이 나온 것 말이다.
“할 말은 그게 전부라면 이제 과목 선택을 진행하겠습니다. 제 뒤에 서 있는 교관 여러분이 보이시겠지요? 저분들은 각각 개별 과목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짤막한 소개를 듣고, 자신의 적성에 가장 적합한 과목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탄코가 한 발자국 나서더니 말했다.
“탄코다. 당연히 내가 가르칠 건 사냥에 관한 것이다. 사흘 밤낮 동안 한숨도 안 자고서라도 교인의 목을 따고 싶으면 내게 오도록.”
참 그다운 소개였다.
그리고 연이어 교관들이 한 명씩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가르칠 건 생존법이다. 똥밭에 구르더라도 연명하고 싶은 놈이 있다면 튀어 와라.”
“법학선생 에인즈번이다. 우리는 하나의 제국 아래 살고 가지만, 제국법은 모든 땅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않지. 제국 외지나 이종족의 영지에서 지켜야 할 법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본인이 가르칠 건 제국 건국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일세. 물론 원한다면 자네들이 좋아하는 스물한 명의 영웅이나 그 이전 신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도 해줄 수 있네.”
“교의선생 주니앙이야. 여기 있는 모두가 영웅을 지망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아. 태양교에 뜻이 있다면 내게로 와. 태양신의 교의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지.”
대사범의 소개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후안이 말했다.
“무예선생 후안입니다. 검이나 도, 창, 도끼, 둔기, 단검, 활……. 대부분의 무기에 대한 가르침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영도들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아직 어린놈들이라 그런지 이론 수업처럼 따분한 것보단 실전에 가까운 수업을 원하는 듯했고.
그중에서도 무예선생 쪽에 마음이 쏠리는 것 같았다.
수렵선생이나 생존선생은 과목을 떠나서 교관의 성향 때문인지 몰리는 사람이 특히 적었고.
“루안, 넌 무슨 수업을 들을 거야?”
“글쎄…….”
나는 에반의 질문에 짧게 고민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수업은 무엇일까?
답은 쉽게 나왔다.
‘가호지.’
가호의 숙련도도 아니고,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자체를 깨우쳐야 한다.
물론 그런 과목은 없다.
그렇다고 이런 걸 가르쳐 달라고 조를 수도 없고……. 어쨌건 내가 가호를 받았지만,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숨겨야 하니.
따라서 내 선택은-.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손을 드니 후안이 웃으며 말했다.
“루안 영도, 무엇입니까?”
“아무 과목도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럼 루안 영도는 선택 과목 수업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니까요.”
“저 혼자서 자습하는 건…….”
“안 될 말입니다.”
입안이 쓰구만.
역시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구나.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어느 대사범의 앞으로 향했다.
“…음.”
그 대사범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안 배드니커.”
“예.”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그런가?
하긴, 여긴 영도들에게 가장 인기가 없는 수업이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교의선생 주니앙을 보았다.
배드니커의 대사범임과 동시에 태양교의 성직자, 그리고 이단심문관이기도 한 실력자를.
“암흑교단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신 건 교관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긴 한데…….”
교의선생은 약간 귀찮은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농땡이를 못 피우잖아.”
“예?”
“아냐.”
나는 황당한 얼굴로 교의선생을 보았으나, 이 여자는 시치미 뚝 뗀 얼굴로 침묵을 유지했다.
태양교.
태양신 아톤을 숭배하는 이 종교의 교리는, 어쩐지 나의 염화제일공이나 백일식에 영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한 건데…….
‘잘못 생각한 건가?’
어쨌든 그렇게 과목 선택이 끝나고, 대사범은 다시 교관 동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슬슬 쉬려고 하는데, 무예선생이 단상 위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 양반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영도분들께서 수련회에 입소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군요. 배드니커의 수련회엔 매번 놀라운 재능을 가진 분들이 찾아오지만, 이번 기수는 특히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정황상 빈말일 확률이 높았지만, 몇몇 순진한 녀석들은 진짜라고 생각하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 이제 이곳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셨을 테니 슬슬 본격적인 수련회를 시작해도 되겠지요.”
“본격적?”
불길한 단어에 에반이 중얼거렸다.
영도 놈들도 슬슬 불안함을 느꼈는지 하나 같이 입을 다물었다.
영도 일동이 단상 위를 주목하는 가운데, 무예선생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부터 조를 짜겠습니다.”
“…조?”
“네.”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래요?”
깡마른 영도 한 명이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 말투가 좀 불손한데, 단상 위에 있는 게 다른 교관이었다면 훨씬 예의를 차리지 않았을까.
무예선생은 영도의 다소 무례한 말투에도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추후 정식 영웅이 되면 단독으로 움직이는 일보다 팀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겁니다. 협동은 영웅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예요.”
“그, 그건 알고 있지만…….”
반사적으로 물었던 영도는 무예선생의 정론에 입을 우물거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죠…….”
“하하.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미안한 척이라도 해라.’
나는 무예선생의 뻔뻔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조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선 한번 구성된 조는 특별한 상황을 제하면 수련회가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같은 조가 된 영도분들께선 부디 사이좋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특별한 상황은 뭔가요?”
영도의 물음에 무예선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의도치 않게 조원의 수가 줄어드는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
멍하니 서 있던 영도들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친 게 아닐까.
“또 조는 4인 1조로 구성됩니다. 이번 수련회의 총원은 39명이니, 총 9조가 되겠군요.”
“총 9조면… 수가 안 맞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 한 조만은 3인 1조가 될 거예요.”
나는 잠깐 생각했다.
수가 적은 조가 반드시 안 좋을 거란 보장이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같은 조원과는 가산점과 감점이 함께 이뤄지는 경우가 잦을 겁니다. 가령 한 영도가 우수한 성적을 거둬서 가산점을 받는다면, 같은 조에 속한 조원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단 뜻이죠.”
웅성-.
저 말에 주변이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무예선생은 일부러 긍정적인 상황을 말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엿 같은 수련회에 일주일 정도 구른 경험 덕분일까.
영도들은 이제 하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
‘점수가 까여도 같이 까인단 거잖아.’
이러면 협동이고 지랄이고, 싸움이 안 나면 이상할 것 같은데.
이건 오히려 조원이 적은 게 좋을 수도 있겠다.
“조는 어떤 식으로 정해집니까?”
여태껏 침묵하던 카론이 물었다.
무예선생이 빙그레 웃음 대꾸했다.
“교관진에서 객관적인 지표를 토대로 공정하게 정했습니다.”
저 말도 의심이 든다.
대사범의 역량은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몇몇 놈들의 꿍꿍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필두가 저기 서 있는 무예선생이 되시겠고.
카론도 입을 닫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는데, 당연하다.
기껏 룰 추가까지 써먹어서 압도적 1위 자리를 손에 넣었는데, 이상한 놈들과 같은 조가 되면 기껏 따 놓은 점수를 죄다 잃을 수도 있는 판국인 것.
심지어 공정하게 조를 짰다면 카론은 비교적 덜떨어진 영도들과 조가 될 확률이 높았다.
“설명은 이상입니다. 지금부터 차례대로 조를 호명하겠습니다. 우선 1조입니다. 루안 배드니커, 에반 헬빈, 샤를 루비에타, 미르 자이언트.”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