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우리 조는 총 35포인트를 사용했다.
우선 물 한 병씩 4포인트.
나눠 먹을 육포 한 봉지 1포인트.
그리고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한 포션 한 병까지.
참고로 이외에도 구매하지 않은 작은 모래시계와 지도를 받았다.
“지도는 당연히 숲의 지도일 테고… 모래시계는 뭘까?”
“제한 시간이겠지.”
“아.”
어쨌든 사 온 물건을 보여 주니, 샤를이 발광했다.
“포션은 왜 산 거예요!”
“필요할 수도 있잖아.”
“으아아아……!”
샤를이 울상이 된 얼굴로 외쳤다.
“이렇게 막 썼는데 이번 시험에서 등수에 들지 못하거나! 1차 시험에 비해 보상 포인트가 적기라도 하면……!”
“넌 만사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거잖아요!”
“넌 그게 너무 과하니까 그렇지. 자, 반대로 희망적인 상황을 떠올려 보자고.”
나는 포션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걸 꼭 우리가 쓰리란 법은 없어. 숲에서 다른 조랑 마주쳤을 때, 그놈들이 크게 다친 상황이라면 어때?”
“음……? 아!”
샤를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포션을 팔 수 있겠군요?”
“맞아, 최소 두 배, 많으면 세 배까지도 받을 수 있을 거야.”
포인트가 귀중해도 목숨보다 귀하겠나.
아마 그 상황이 되면 가진 포인트를 죄다 바쳐서라도 얻고 싶어 할 거다.
그제야 샤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기, 기다려…….”
그때 한 조가 우리 곁을 지나갔다.
세 명이 앞서 가고 있고, 그 뒤를 누군가가 쫄래쫄래 뒤쫓아 가는 모습이었는데…….
비실비실한 덩치가 더욱 초라해질 만큼 잔뜩 짐을 짊어진 건 스컬이었다.
“야! 빨리 안 와?”
“넌 짐꾼 역할도 제대로 못 하냐?”
조원들의 타박에 스컬이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나 혼자만 너무 많이 들었잖아…….”
“그래서 뭐? 못 들겠냐?”
“포인트도 없는 놈이 이런 쓸모라도 있어야지.”
조원들의 냉소 섞인 목소리에 스컬은 입도 뻥긋 못 했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스컬만의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신나게 포인트를 팔아 젖힌 녀석들은 대개 조에서 저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
“…….”
그 광경을 에반도 봤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우리도 슬슬 가자.”
가만히 놔두면 이 쓸데없이 착한 놈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긴장된 표정으로, 마침내 나비의 숲에 발을 들였다.
* * *
배드니커의 본가를 둘러싼 나비의 숲은 거대 밀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만약 보석 산맥- 이곳과 한참 떨어진 그 산맥의 어느 봉우리에서 배드니커의 영지를 본다면, 지평선 너머까지 빼곡히 이어진 나비의 숲을 볼 수 있을 정도.
이렇게 넓은 곳이니 영도와 마주칠 확률은 낮을 거다.
‘심지어 시작할 때 조마다 다른 방향으로 진입했으니.’
그렇다고 조우 확률이 제로인 건 아니니 긴장을 늦춰선 안 되겠지만.
“나비의 숲에 나오는 마물은 어떤 종류가 있나요?”
그때 샤를이 슬쩍 나를 보며 물었는데.
“몰라.”
내가 알 리가 있나.
애초에 나비의 숲은 배드니커에게도 출입이 금지된 장소다.
마물 종류는커녕 이 숲의 특징에 대해서도 남들이 딱 아는 만큼만 알고 있다.
“…하아.”
샤를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점수가 팍팍 깎여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저 녀석, ‘배드니커’란 이름값 때문에 간이라도 재듯 날 몇 번 찔러봤는데 그때마다 딱히 번뜩이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내 입장에서야 저 녀석 혼자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한 거지만 말이다.
“…일단 포메이션부터 정할까요?”
“포메이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취할 진형 말이에요.”
샤를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소지한 가호부터 말해 봐요.”
“아… 응. 내 가호는…….”
어쩐지 멍하니 있던 에반이 반사적으로 대꾸하려는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네 가호부터 밝혀. 그럼 우리도 밝히지.”
“…….”
그러자 에반이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 뻔했는지 깨달은 듯하다.
소지하고 있는 가호에 대해선 감추는 게 불문율이다.
가호란 영웅의 정체성, 그리고 가장 감춰야 할 비밀이자 비장의 카드인데…….
때문에 경계가 삼엄한 녀석이라면 같은 가문에게까지 숨긴다.
“흐응… 뭐, 꼭 가호를 알아야 진형을 짤 수 있는 건 아니죠.”
멀뚱히 바라보니 어깨를 으쓱하며 그리 말한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런 게 나쁘단 건 아니다.
그냥 음험할 뿐.
…그러고 보니 루비에타는 따지자면 정치가 가문이었던가?
샤를은 비록 영웅 지망인 듯하지만, 보고 들은 게 있기는 하겠지.
‘그렇다고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한데.’
미르랑 티격태격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직 저 녀석의 심계는 많이 어설프단 걸.
어쨌든 샤를의 말대로 대충 진형을 정했는데, 어차피 넷 모두 근접전 위주의 전사라서 단순한 진형이 됐다.
“…숲이 많이 어둡네. 시간 감각이 마비될 것 같아.”
에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다.
기본적으로 나비의 숲엔 거목이 잔뜩 자라나 있는 데다, 수풀까지 빽빽하게 우거져서 그 아래를 걷고 있는 우리는 거의 한밤중에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의외로 사방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는 됐는데.
“여기도 나비가 있다!”
“어딜 가나 있어.”
“아하……! 그래서 [나비의 숲]이었군! 캠프에만 있어서 몰랐다.”
사방에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비야말로 이곳이 ‘나비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숲 전체엔 항상 은은한 밝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도 한몫했고.
마물보다는 요정이 살 것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과거엔 흑요정이 살던 숲이기도 했고.
그렇게 주변 구경을 하며 약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처음 숲에 진입하면서 세웠던 긴장감이 많이 흐릿해졌을 무렵…….
샤를이 주변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너무 풀어진 거 아니에요? 언제 마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멈춰 봐.”
“하! 감히 제게 명령하는 건가요?”
그럼 계속 가시든가.
한 발자국 더 걷던 샤를이 몸이 푹 꺼졌다.
“끼엑!”
비명이 참 특이하네.
“이, 이게 뭐야!”
“늪지대.”
“그걸 누가 몰라!”
“말투가 좀 불손하시네. 거기 자력으로 오기 힘들걸?”
“……!”
샤를의 몸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다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와줄까?”
“…하!”
그러자 샤를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더니, 돌연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손바닥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흘러나오더니, 나무에 푹 꽂혔다.
‘가호인가.’
어떤 가호인지는 봐도 모르겠다.
대충 혼魂과 관계된 쪽 같은데…….
어쨌든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수축하며, 늪지대에 가라앉아 가던 샤를은 어렵지 않게 빠져나왔다.
나는 뜻밖의 묘기에 박수를 쳐 줬지만.
“…흥!”
샤를은 나를 노려보더니 코웃음만 쳤다.
* * *
숲에 진입한 지 약 세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어떤 마물과도 마주치지 않고 전진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악명 자자한 금지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으면 슬슬 긴장이 풀리기 마련.
심지어 미르는 하품까지 쩍쩍 하고 있었는데, 밤잠을 설쳤으니 당연하긴 하다.
나도 긴장은 놓지 않았지만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뭘 가져가는 게 좋으려나.”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의외로 샤를이 대꾸해 줬다.
“가장 희귀한 거면 되겠죠.”
“그걸 우리가 판별할 수 있을까?”
물건의 가치를 매기는 건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감정사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았겠지.
“강한 마물을 잡으면 되지 않을까요? 수준 높은 개체일수록 좋은 소재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흥.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허?”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다르다.
샤를은 미르에게, 다름 아닌 멍청하다는 얘기를 들은 게 큰 충격인 듯 턱이 빠졌다.
“이 콩알만 한 거인족이… 누구 보고 멍청하다는 거야?”
“사냥에 대해 하나도 모르니 멍청한 게 맞지 않나! 강한 몬스터라고 반드시 쓸 만한 소재를 주는 건 아니다! 거기에 질 좋은 소재를 손에 넣으려면 사냥하는 순간부터 신경 써야 하는데, 우리 같은 초짜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맞는 말씀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도, 질 좋은 짐승의 모피를 손에 넣기 위해선 날붙이의 사용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
어쨌든 말투로 보니 미르는 사냥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꼭 마물이 아니어도 괜찮아. 나비의 숲이 배드니커의 영지이기는 해도 미지의 부분이 더 많으니까. 아마 운이 좋다면 영약의 재료도 채집할 수 있겠…….”
나는 말을 멈췄다.
“갑자기 왜 그래요?”
“몬스터다.”
“네?”
샤를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안 보이는데요?”
“여기선 그렇겠지.”
“…여기선?”
“됐으니까 기척을 죽이고 천천히 따라와.”
샤를은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으나,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한 건지 지시를 따랐다.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지시한 방향으로 몇 분 정도를 나아가니, 우리는 시냇물과 그곳에 있는 몬스터를 발견했다.
거미였다.
생긴 건 그랬다.
덩치가 곰만 하긴 했지만.
“…어떡할까?”
나는 우선 조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우리를 눈치 못 챈 것 같으니 그냥 지나가도 돼. 뭔가 귀한 소재를 줄 것 같지도 않고.”
잠깐 생각하던 샤를이 말했다.
“…주변에 다른 몬스터는 없는 것 같으니 싸우죠. 합을 맞춰 볼 기회입니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우리 실력이라면 저 거미 한 마리 죽이는 것쯤이야 별달리 힘든 일도 아니니까.
“좋아. 그럼 진형은 아까 짜둔 대로?”
“그러죠.”
우리가 짠 진형은 단순했다.
가장 앞에 미르가 서서 상대의 주의를 끌고, 나머지 셋은 기회를 엿보며 공격하는 것.
까놓고 말해서 밸런스가 좋은 조는 아니라 이런 극단적인 포메이션이 됐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당연히 미르였는데…….
“…….”
나는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쥔 미르를 보았다.
“미르, 할 수 있지?”
“…응. 해보겠다.”
“큰 기대는 안 할 테니까 주의라도 잘 끌어 봐요.”
미르는 샤를의 비아냥거림에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으아아아아-!”
고함을 내지르며 거미에게로 돌진.
…뭐.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가 아니겠지.
그래도 주의를 끌어야 한다는 역할만큼은 충실히 해냈다.
거미 또한 협각을 우물거리며 마주 괴성을 내지른 것.
“가자.”
“아, 응.”
“하아…….”
그리고 우리도 전투에 합류했다.
다만 나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칠죄검으로 공격하는 시늉만 하며 다른 녀석들을 살폈다.
우선 미르.
막무가내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마저 돌보지 않은 극단적인 공세다.
저런 꼴인데도 별다른 치명상 없이 버틸 수 있는 건 거인족이라서 그렇겠지.
샤를은 딱히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잘 싸웠다. 메이스(Mace)를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숙련도가 상당했고 몬스터와 전투 경험도 있는 듯하다.
그리고 에반 역시-.
‘…응?’
나는 에반이 생각보다 쩔쩔매고 있단 사실에 놀랐다.
가장 믿었던 녀석인데 의외다.
실전 경험이 딸리는 건가?
‘조금 다른데.’
주의 깊게 에반을 관찰하던 난, 곧 이유를 깨달았다.
이 녀석, 레이븐을 전혀 쓰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