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마도 에반은 철이 들기 전부터 레이븐을 배웠을 것이다.
장난감 칼조차 버겁게 느껴질 나이부터 검술을 익혔다는 뜻인데, 그쯤 되면 무武와 일상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딱히 전투 상황이 아닌 평상시…….
가령 길을 걷거나 밥을 먹거나 하는 별거 아닌 행동에도 검술의 색채가 묻어나올 정도.
그만큼 육체 깊숙이 스며든 검술을 다짜고짜 배제하려 들면 어떻게 되느냐.
당연히 저렇게 팔다리가 꼬이게 된다.
“에반! 정신 안 차려?”
내 고함에 에반이 움찔 몸을 떨었으나, 그래도 레이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 새끼 아까부터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더라니…….’
실전이라 계속 다그칠 여유는 없다.
나는 일단 좀 더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하며 거미를 공격했고…….
콰지직!
얼마 가지 않아 샤를의 메이스가 거미의 머리를 으깼다.
거대 거미는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으아아아아-!”
시체가 된 거미를 향해 계속 도끼를 휘두르는 미르.
고개를 푹 떨구는 에반.
얼굴에 묻은 거미의 체액을 닦는 샤를.
샤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개판이군요.”
내 말이.
* * *
몸에 익은 습관을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무술에 한해선 더욱 그렇다.
실력자 간의 승부에선 상대의 습관을 더 빨리 눈치채는 쪽이 승기를 붙잡는다고 말할 정도니까.
그러니 대단한 고수일수록 더욱 자신의 안 좋은 습관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이것엔 부작용이 있다.
습관을 무리하게 없애려 들면, 기존에 잘 배웠던 움직임조차 꼬이게 되는 것.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느냐?
아마도 에반에게 있어 레이븐이란, 문자 그대로 습관의 총집합체처럼 보여서 그렇다.
- 일반적으로 무공은 어릴 때 습득할수록 좋으나.
내가 영산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적 스승님이 말했다.
-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미성숙한 육체는 무학을 펼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을 완전히 모방하여도 군더더기가 생기기 마련이지. 그리고 아이의 습득력은 그러한 군더더기마저 거름 없이 흡수한다. 조기 교육에 스승이란 존재가 필요불가결한 이유랄까?
- 음…….
- 그러니 막내야. 너는 어떤 면에선 행운아다. 이미 머리가 굵어질 만큼 굵어져서, 안 좋은 건 금방 교정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 교정은 물리적 교정으로써, 주먹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순하다.
에반은 레이븐을 버리면 안 된다.
만약 버리더라도, 이렇게 단기간에 떨쳐내려 드는 건 명백한 악수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듯, 이후에도 우린 몇 번 몬스터와 조우했으나.
“죽어라아아아-!”
“…큭! 미, 미안!”
미르와 에반의 상태는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1인분을 하는 건 나와 샤를뿐.
그쯤 되니 샤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사냥이 아닌 채집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음…….”
샤를은 첫 사냥 이후 부쩍 나한테 말을 자주 걸었는데, 그나마 상의할 게 나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황당하지만 나도 비슷한 심정이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에반이 저 꼴이 된 이상, 지금 이 조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건 샤를 루비에타다.
“저 둘을 데리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샤를이 슬쩍 뒤를 보며 말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미르와 에반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미르의 트라우마와 에반의 방황.
둘 다 단기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동시에 손보기에 72시간이란 시간은 너무 짧다.
사실 지금 둘 중 더 심각한 건 의외로 에반 쪽이다.
미르의 경우 여전히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것처럼 보였지만, 낙담한 것까지는 아니다.
반면 에반은 아예 넋이 나갔다.
레이븐에 대한 실망과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이게 맞는 선택인가 하는 의심.
아마도 저놈 속내엔 지금 폭풍이 몰아치고 있을 거다.
나도 한숨이 나왔다.
스승이란 게 별게 아니다.
제자의 고민에 함께 고민하고, 조언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스승이다.
그런데 이 자칭 교관이란 새끼들은 뭐란 말인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애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다.
‘이딴 놈들이 대사범?’
…물론 그렇게 묶어서 비난하면 안 되겠지.
내가 보기에 수렵선생 같은 경우엔 훌륭한 스승이었다.
산맥에서 봤던 칼자크도 마찬가지.
“물론 채집으로 노선을 바꾸면 시간이 많이 빠듯하겠지만……. 이봐요.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 그런데 계획을 좀 바꿔도 될 것 같은데.”
“네?”
“3일 전부를 써야 할 것 같아.”
샤를이 두 눈을 깜박였다.
“…밤의 숲이 지옥이니 어쩌니 하면서, 해가 지기 전에 끝내자고 말한 건 당신 아니었나요?”
“그랬지. 근데 역시 이게 수련회가 맞기는 하더라.”
나는 주변을 보며 말했다.
“이 근방은 아직도 교관들의 사정권 안이야.”
“그게 무슨…….”
“잘 봐. 희미하지만 길이 닦여 있어. 우리가 걷는 쪽은 풀 허리가 낮잖아.”
샤를은 내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봤으나, 딱히 깨달은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당연하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영재 교육을 받았다고 한들, 귀족 여식이 야산에 갈 일이 있겠어?
분명한 건 야생의 숲은 이보다 훨씬 개판이라는 것.
물론 교관이 없다는 말은 사실 같기는 하다.
“그냥 몇 번 왔다 갔다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마차가 다닌 길이라거나.”
“증거는 하나 더 있어. 후안 교관이 말했지? 혹 같은 영도를 공격한다면 즉시 탈락이라고.”
“…아!”
샤를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떴다.
다행히 머리가 굳은 녀석은 아니었다.
“즉시 탈락이라면… 교관 측에선 영도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단이 있다는 거군요.”
“그래. 그러니 너무 멀리 벗어나지만 않으면 사흘 동안 지내도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수련회 캠프를 기준으로 일정 거리까지는 통제된 장소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낭이라도 살 걸 그랬다. 그렇게 비싸지도 않던데.
“뭐, 일리는 있네요. 아까 몇 번 싸웠던 몬스터도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으니까.”
샤를이 살짝 달라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루안 배드니커, 조금 다시 봤어요. 헥토르 님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혈통은 못 속이는군요?”
“너, 설마 우리 형님 좋아하니?”
“그럴 리가 있겠어!”
샤를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뒤에서 걸어오던 녀석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귀청 아프게.”
“무례하긴……! 아까 말은 다 취소하겠어요!”
“그러든가.”
나는 떽떽거리는 샤를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하늘을 보았다.
수풀 때문에 잘 안 보이긴 하지만… 염화제일공을 익혔기 때문에 느낄 수 있다.
슬슬 해가 저물려고 한다.
“머물 데나 찾을까. 아가씨는 노숙 경험 있어?”
“없어요.”
그렇겠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무 위가 제일 적당할 것 같긴 한데 추위가 문제네.”
지금은 한겨울이다.
밤의 숲은 어마어마하게 춥고, 우리에겐 체온을 보존할 만한 텐트나 침낭도 없으니 그냥 자는 건 지옥 직행 마차에 탑승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불을 피우면 되잖아요.”
“나무 위에서?”
“아뇨. 그냥 밑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불침번을 서잔 거죠.”
“흐음.”
아가씨치고는 괜찮은 제안이 나왔지만…….
다른 곳도 아닌 나비의 숲이란 점이 왠지 모르게 껄끄럽다.
내 느낌상 여긴 보석 산맥만큼이나 위험한 장소다.
‘교관이 통제하고 있는 장소라고 해도 만에 하나란 게 있으니…….’
불을 피웠다 괜히 몬스터의 이목을 끌게 되면 귀찮아질 거다.
“…아니면 그냥 안 자는 건 어때?”
멍하니 있던 에반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
그러나 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만, 다음 날부터는 컨디션이 망가질 거야.”
반드시 첫째 날에 성과를 거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을 경우 리스크가 너무 크다.
“거기에 밤의 숲을 수색하는 건 효율이 너무 안 나와요. 어두워서 뭐가 보이긴 하겠어요?”
“으, 으음…….”
이딴 멍청한 제안을 할 녀석이 아닌데.
아무래도 아직 맛이 간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오두막에서 자면 되지 않나!”
그때 미르가 미친 소리를 해댔다.
샤를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두막? 와!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네요! 그럼 일단 벌목부터 할까요? 사방이 나무니까 재료가 부족할 일은 없겠네! 이 얼간이 거인아!”
“무슨 소리냐? 벌목을 왜 해?”
“그럼 오두막이 뭐 하늘에서 툭 떨어질까?”
“저기 있지 않나.”
미르가 앞을 가리켰다.
“…응?”
“허어.”
그리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정말로 오두막이 있었다.
“…아직 헛것이 보일 만큼 지치진 않았는데.”
“이봐요. 혹시 이 숲에, 무슨 환각 작용 그런 것도 있나요?”
“글쎄…….”
하지만 환각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두 눈에 화기를 집중해 봤다.
그러자 캄캄한 시야가 일순 환해지며 오두막의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화안火眼 상태다.
별건 아니고, 마나의 움직임을 보다 세밀하게 볼 수 있는 기술이었는데…….
“환각은 아닌 것 같은데? 함정일 수는 있겠지만.”
“음…….”
나는 잠깐 조원들을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가서 확인해 볼게. 너흰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혼자 가도 괜찮겠어?”
“같이 가는 게 더 위험해.”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뭔가 위험하다 싶으면 신호를 보내세요.”
“신호? 어떻게?”
“딱 두 개만 정하죠.”
샤를이 팔을 펼쳐서 O자를 만들었고.
“이러면 안전.”
다음엔 양팔을 X자로 교차했다.
“이러면 위험.”
“음. 다시 한번 보여 줄래?”
“안전, 위험…….”
“한 번만 더.”
“안전, 위험…….”
“마지막으로…….”
샤를이 내 멱살을 붙잡으려는 걸 에반이 막았고.
나는 귀한 구경을 한 대가로, 불만 없이 홀로 오두막을 향했다.
사실 같이 가는 게 더 위험하다느니, 있어 보이는 척 지껄이긴 했는데 나로서도 잠행이나 암행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니다.
저 병아리들보단 나을 것 같아서 내가 나선 것뿐이지.
“음…….”
가까이서 본 오두막은 그냥 평범했다. 좀 작은 편이긴 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이상도 없다.
인기척도 안 느껴지고.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는 별개로, 나는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피 냄새가 난다.
나는 칠죄검을 칼집에 꽂았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내가 무기를 놓는 건 오히려 긴장감을 끌어올렸다는 방증이다.
여차하면 맨몸으로 대응하기 위한 사전 준비.
아무튼 오두막은 그 흔한 창문조차 없었다. 작은 굴뚝이 나 있기는 하지만, 사람 몸이 들어갈 사이즈는 안 되는 듯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잠깐 타이밍을 재다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즉시 내 후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두막 내부엔 시체가 있었다.
“…….”
핏물에 잠겼으나 뚜렷한 주황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주근깨가 콤플렉스였던, 말이 많고 입이 가벼웠던 수다쟁이 소녀.
그러나 성격이 밝아서 왠지 모르게 미워할 수는 없었던 녀석.
팜이 피 웅덩이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