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77화 (77/172)

77화

우선 팜의 시체부터 정리했다.

그래 봤자 시체를 나른 다음, 근처의 땅을 파고 묻어 준 게 전부였지만 그대로 방치하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게 전부다.

“…나중에 교의선생께 정식으로 장례를 부탁드려야겠어. 태양교의 정식 사제시니까, 예의나 절차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거야.”

에반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팜을 저렇게 만든 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어.”

나는 이러한 결심을 좋게 생각한다.

흔들리지 않는 목표란 단단한 고정대가 돼서, 어려운 상황에도 휩쓸리지 않게 도와주니까.

그런데 지금 에반의 상태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목표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것 같은 느낌?

나는 딱히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에반과 함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저 오두막 말인데.”

“응.”

“아마 원래 용도는 교관이 준비한 쉼터가 아닐까 해. 팜은 아마 혼자 숲을 헤매다 오두막을 발견했고, 거기서 잠시 한숨 돌리려고 했겠지.”

“…그렇구나.”

오두막으로 돌아오니, 그동안 샤를과 미르가 엉망진창이었던 내부를 좀 정리한 듯했다.

핏자국만큼은 깨끗이 닦아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이제 어떡하죠?”

샤를의 말에 미르가 대답했다.

“잘 곳을 찾는 거 아니었나?”

“여기서 자자고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영 장소가 마땅찮으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미르가 의외로 실리적인 말을 꺼냈다.

저 말대로다.

핏자국은 물론, 피 냄새도 덜 빠진 장소이긴 하지만, 이곳이 훌륭한 거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무 위나 바깥에서 노숙하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그쪽 생각은요?”

샤를이 일단 나를 조장으로 생각은 하는지 그리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당장 자는 건 좀 미룰까 싶은데.”

“안 자면 뭘 하게요.”

“주변 수색.”

내 말에 조원들이 눈을 깜박거렸다.

“단 시험을 위해서가 아냐. 우린 몬스터가 아닌 다른 조를 찾는다.”

여기서 가장 눈치가 빠른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을 묻기 위함이군요. 다른 조에서도 우리가 본 것 같은 사건이 발생했을 수도 있으니까.”

“맞아. 가능성은 적지만 교관과 마주칠 수도 있고…….”

물론 이 모든 게 내 착각이고, 팜이 단순히 몬스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걸 수도 있다.

그럼 완전 헛다리 짚은 꼴이 되겠지.

‘차라리 그게 낫나?’

헛고생하더라도 ‘내 착각이었구만.’ 하고 끝나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 정도 찾아보고 성과가 없으면 돌아와서 짧게 눈 붙이는 거지. 물론 번갈아 가면서. 어때?”

딱히 반대하는 녀석 없이 조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자. 밤이 더 깊기 전에.”

* * *

낮에도 어두컴컴한 곳이 나비의 숲이었는데, 밤은 훨씬 더 어두웠다.

그나마 주변을 밝히던 나비 놈들도 싹 다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사방이 깜깜하고 어두운 가운데 종종 괴이한 소리도 들리고, 무엇보다 한기 때문에 몸이 얼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램프라도 살 걸 그랬군요.”

포인트 아끼기에 누구보다 진심인 샤를이 그런 말을 꺼낼 정도니 말 다했다.

“그나저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불안하면 네가 앞에 설래?”

“…….”

화안을 쓰면 밤눈도 제법 밝아져서,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장 앞장서게 됐다.

나머지 셋은 주변을 경계한 채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진형.

“뭐 좀 보이는 거 있어?”

“아직은 없어.”

분위기에 비해 숲 자체는 조용한 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다.

짐승이나 벌레 소리는 물론이고, 어쩐지 바람조차 멎은 듯하다.

사박-.

들리는 거라곤 우리가 내는 발소리뿐.

이렇게 조용한 장소를 전진하면 아무리 수다스러운 놈이라도 눈치껏 입을 닫게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필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은 채 밤의 숲을 나아갔다.

그리고 약 십 분 후.

나는 이 숲에서 처음으로 이형의 존재를 발견했다.

“…….”

앞장서던 내가 한쪽 손을 드니 쫓아오던 녀석들이 모두 멈췄다.

“…뭐가 있어요?”

“50미터 정도 앞.”

“대단하군……. 이 밤에 거기까지 보이는 것이냐?”

미르의 칭찬에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이 녀석들도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걸 느낀 모양인지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걸 말하면 이 녀석들이 믿을까?

믿든 안 믿든, 준비해야 한다.

“너희, 악마와 싸운 경험은 있냐?”

“…네?”

사실 처음부터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핏빛 눈동자는 내가 놈을 포착하기도 전에 쭉 내게 꽂혀 있었으니.

펄럭!

악마가 날개를 펼친 순간 내가 외쳤다.

“진형대로!”

직후 끔찍한 괴성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무심코 귀를 막을 정도의 포효에 전신이 짜릿해졌다.

‘염병할…….’

배드니커의 영지에, 왜 악마가 있는 거야?

* * *

흑표범의 털가죽과 산양의 뿔, 박쥐의 날개, 뱀의 꼬리.

용암을 담은 듯 타오르는 눈동자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검은 기류까지…….

나도 악마를 본 건 처음이지만.

이놈은 정말 책에서 본 악마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펄럭-!

악마는 곧장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콰자자작!

방해되는 나뭇가지들은 죄다 박살 내 버리는 요란한 비상이었다.

이윽고 밤하늘에 닿은 악마가 달을 등진 채 우리를 내려다봤다.

“아, 악마…….”

미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해한다.

악마를 실제로 본 이들은 극소수다.

마왕의 피조물이자 존재 자체가 역병이나 다름없는 끔찍한 생물.

여타 몬스터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괴물이 바로 악마다.

“말도 안 돼… 아, 악마라니……. 우, 우린 여기서 다 죽을 거다.”

나는 고개를 홱 돌은 다음, 가장 한심한 소리를 지껄이던 미르의 뺨을 후려쳤다.

“헛소리할래? 진짜 여기서 뒈질 거냐? 약속했던 거 잊었어?”

“약속……?”

“유쾌한 반란을 일으키자고 했잖아.”

“아…….”

내 말에 미르의 눈동자에 조금 빛이 돌아왔다.

다행이다.

이 이상 케어할 여유는 없는 것 같으니.

다시 한번 괴성과 함께, 하늘에 올라섰던 악마가 우리를 향해 낙하했다.

“떨어져!”

나는 조원들을 밀어낸 다음, 내공을 끌어올려 땅에 내다 꽂히는 악마의 몸을 받아냈다.

꽈르릉!

공성 병기를 몸뚱이로 받아내면 이런 느낌일까?

‘억…….’

속이 진탕 뒤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일순 새까맣게 물들었지만…….

나는 격통 속에서도 손에 힘을 더 줬다.

지금 잡힌 이 차갑고 딱딱한 건 악마의 뿔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악마의 힘은 뿔에 집중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번 부러뜨려 볼까?

뿌드득…….

이건 내 갈비뼈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오케이. 힘겨루기는 어림도 없고.’

나는 즉시 손을 뗀 다음 이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애초에 덩치가 무슨 황소 네댓 마리를 합친 것처럼 커다란 놈이었다.

내공을 좀 더 쏟아야 하나?

“루안-!”

그때 미르의 외침과 함께 악마의 몸이 뒤로 끌려갔다.

그리고 드러난 풍경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미르가 줄다리기를 하듯, 악마 놈의 뱀 꼬리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르의 활약으로 정신이 들었는지, 나머지 두 녀석도 각자 무기로 공격을 퍼부었다.

악마의 몸에 작은 상처들이 하나씩 늘어났지만, 딱히 유효타는 없다.

“가호를 써!”

가호야말로 악마의 상극에 위치한 힘이다.

내 말에 조원들은 퍼뜩 정신을 차린 다음, 각자의 가호를 사용했다.

샤를은 지난번 늪지대를 탈출할 때 썼던 영체 같은 게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들고 있는 메이스의 빛깔이 붉어졌다.

에반은 겉보기에 큰 변화는 없어 보였지만, 검술이 훨씬 더 날카로워졌다.

미르는… 쓴 건지 안 쓴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세 녀석이 나름대로 시간을 끌어 주는 형세가 됐다.

내게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후우웁…….”

그렇다면 당장 전장에 합류하는 것보단 이 시간을 이용하는 게 낫다.

지금의 내가 날릴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

‘큰 거 한 방.’

한 번에 못 죽이면 일이 귀찮아진다.

나는 기존에 있던 백일식의 전반부 초식을 떠올렸지만, 지금 상황에 마땅한 걸 찾기가 힘들었다.

방금 접촉했을 때 이 녀석의 가죽 두께와 근밀도를 체감했고.

웬만한 공격으로는 절명시킬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니 나는 내공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초식을 떠올렸다.

이번 수련회에서 수렵선생과 빈번히 벌였던 대련.

그때 장난삼아 떠올렸던 무수한 초식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중 가장 강렬하고, 살상력이 높았던 거…….’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를 이용한 초식.

화르륵!

무릎이 후끈거렸다.

공세에 주춤하던 악마가 날개를 펼치며 거세게 포효한 순간, 나는 지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악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입을 쫙 벌렸다.

뭘 처먹었는지 이놈의 목구멍에선 유황 냄새가 났다.

그뿐만 아니라 목젖 아래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 같은…….

불길?

“루안! 피해요!”

직후 시야가 온통 불길로 물들었다.

시뻘건 염화가 내 전신을 덮친 것.

“루, 루안이 당했다!”

“침착해요! 일단은 진형을 유지하고…….”

“이 괴물 새끼가!”

시끄러워.

나는 속으로 조원들의 호들갑을 힐난하며 악마의 양 뿔을 붙잡았다.

커릉?

악마가 처음으로 괴상한 소리를 냈다.

놀란 건가? 악마도 놀라는구나.

하긴. 이놈 시점에서 보면 불길 속에서 두 손이 나와서 자신의 뿔을 붙잡은 꼴을 목격한 거니.

나는 히죽 웃었다.

악마의 불길이라 그런지 확실히 평범한 불꽃보단 훨씬 거셌다.

전신에 화상을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악마가 다시 입을 벌렸다.

목구멍에서 염화가 꿈틀댄다.

물론 그 꼴을 두 번 두고 볼 내가 아니다. 나는 무릎을 올려 차서 이놈의 입을 강제로 닫았다.

콰지직!

제법 세게 닫혀서 그런지, 악마의 조각난 이빨이 후두둑 떨어지는 게 보였다.

물론 이걸로는 한참 부족하다.

“엄호!”

멍청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조원들이 정신을 차린 다음 다시 공격했다.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건 의외로 미르였다.

미르가 괴력을 선보이며 망치를 휘둘렀는데. 그럴 때마다 악마의 전신에 움푹움푹 패인 자국이 생겼다.

귀청 찢어지는 악마의 비명은 덤이고.

악마가 난동을 부리니 뿔을 붙잡고 있는 내 몸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애초에 머리가 비대할 만큼 거대한 놈이라, 양 뿔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슨 아름드리나무를 전력으로 끌어안는 꼴이다.

나는 이마에 기운을 모은 다음, 악마의 머리에 박치기를 감행했다.

까앙!

“억…….”

머리가 핑핑 돈다.

이상하게 내가 대미지를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래도 나만 이 꼴이 된 건 아닌지, 악마도 순간적으로 균형 감각을 잃고 비틀거렸다.

마침내 악마가 털어내는 걸 포기하고, 직접 내게로 손을 뻗었다.

그사이에 조원들의 공격이 다시 한번 몸뚱이에 작렬했지만, 우선은 가장 귀찮은 나를 떨쳐내려는 데에 집중하려는 듯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악마의 코를 밟고, 이 녀석의 등 뒤에 매달렸다.

목이 두꺼운 놈이라, 예전에 마인 오셀을 죽였을 때처럼 목을 조를 수는 없다.

그래도 내가 마무리해야 한다.

내가 매달려 있는 탓에, 조원들도 어느 정도는 소극적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나는 팔꿈치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콰지직!

이 감촉이다.

이번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는 확신이 생기는 느낌.

악마가 두 팔을 휘적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쿠웅……!

악마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양팔을 휘적거렸지만, 얼마 안 가 쓰러졌다.

“후욱, 훅…….”

샤를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방금… 뭐예요?”

“몰라.”

아직 초식명을 안 지었으니까.

나는 뒷말을 생략한 채 이마에 묻은 피를 닦았다.

“일단 여기서 피해야 해.”

“왜? 쓰러뜨린 것 아니냐?”

“쓰러뜨렸지. 그런데 이놈은 악마 중에서도 가장 밑단이라는 비스트야.”

“그게 왜.”

샤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최하위 악마 비스트. 특징은 무리를 짓는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구슬픈 괴성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