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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82화 (82/172)

82화

나는 미간을 좁히며, 우선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런 내 기척을 깨달은 건지.

아사드가 애매모호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난 교인이 아니다.”

“압니다.”

“참고로 이거 이중적인 의미로 말한 거야. 난 무신론자기도 하거든.”

…누가 늙은이 아니랄까 봐 썰렁하기는.

나의 장점 중 하나는 이런 재미없는 농담에도 호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아사드 님도 가호를 여럿 받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도 신을 믿지 않는다고요?”

그러자 아사드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신神이라 생각하는 존재는 훨씬 더 고등한 존재다. 72신은 강하지만 제한이 너무 많아. 내 기준에선 미달이란 뜻이지.”

아사드의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들으며, 어째서인지 나는 무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잊힌 신’에 대한 이야기.

그때 무신이 또 뭐라고 말했더라.

“절대신.”

“음?”

이 말에 아사드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스쳤다.

“그 단어를 어디서 들었지?”

“네?”

“절대신이란 단어 말이다.”

철혈공에게도 숨긴 무신에 관한 얘기를 여기서 꺼낼 수는 없어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무슨 책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거짓말이군. 그것에 대해 기록된 문헌은 제국에 존재하지 않아.”

무슨 제국에 존재하는 책을 다 읽어 보기라도 한 듯한 말투다.

물론 300년이나 되는 시간을 살았으니, 평범한 사람보단 훨씬 많은 서적을 읽었겠지만…….

“말할 생각이 없나 보네. 음. 당장은 그것도 재밌으려나…….”

아사드는 의외로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찾은 얼굴이 돼서 혼자 킬킬 웃어댔다.

‘이상하게 말리는 기분이네.’

내 성격이 어디 가서 밀리는 편은 아닌데, 이 남자의 태도나 화법은 그 이상으로 독특했다.

이거 정신 바짝 안 차리면 그냥 끌려 다니다 이야기가 끝날 수도 있겠다.

“마왕 강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가? 내가 계획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해. 배드니커는 진작 쥐새끼들의 계획을 간파했으니까.”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러니까 가문 내에 배신자가 있고, 그놈들이 수련회에서 모종의 수작을 부릴 것이란 사실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이 말입니까?”

“정확하군.”

어질어질한데?

나는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데 왜 방관했습니까? 이 정도로 일이 커질 줄 몰랐습니까?”

“나는 가문 내부의 다툼에 어떤 경우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대에 맺어진 맹약이므로 결코 어길 수 없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흠.”

아사드가 나를 보더니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너, 생긴 건 똘똘한데 머리는 나쁘구나.”

“…….”

멍청하다는 말은 오랜만에 들어 본다.

“간단해. 이 일을 두고 가문 내부에서 두 의견이 대립한 것이다.”

“…….”

“가문 내의 배신자를 족치는 데에 대립할 여지가 있나? 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군.”

“네.”

“평범한 가문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곳은 배드니커다. 범인凡人들과는 생각의 틀이 달라.”

아사드가 각 양손에 손가락을 하나씩만 펼친 다음 대립각을 세웠다.

마치 손가락 전쟁을 하듯이 말이다.

“우선 한쪽은 네가 그랬듯 지극히 상식적인 의견. 배신자의 존재를 깨달았고, 그 계획까지 알게 됐으니 곧바로 척살할 걸 제안했지. 처음엔 대부분 그 의견을 수긍했다. 누군가가 반론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아사드가 오른쪽 손가락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말했다.

“이거, 오히려 기회 아닌가?”

“기회요?”

“배신자가 있단 건 깨달았다. 그놈이 수련회에서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도 알게 됐지. 그러나 그놈이 정확히 누군지는 특정하지 못했어. 조무래기를 족치는 과정에서 놈들의 계획만을 알게 된 거니까.”

“…….”

“분명 수련회를 멈춘다면 상황은 평화롭게 마무리됐겠지. 하지만 그건 곧 커다란 기회를 놓치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아사드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너, 마왕 강림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알고 있냐?”

“아뇨.”

“그럴 줄 알았다.”

“…….”

이래서 내가 마법사를 싫어한다.

웃기는 건, 이 정도면 그래도 마법사 중에선 멀쩡한 축에 든다는 점.

어쨌든 아사드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설명했다.

“첫째로 제물. 둘째는 마나가 가득한 땅. 사실 이 두 조건은 그리 까다롭지 않아. 정말로 중요한 건 마지막 요소지.”

아사드의 표정이 바뀌었다.

여태까지 보였던 나른한 기색이 사라지고, 차가운 냉소가 그 자리를 채웠다.

“옛 악마어를 통달하였고, 마왕과 직접 소통할 수 있으며 의식을 주관할 수 있는 존재.”

나는 아사드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제사장.”

“오.”

아사드가 놀란 눈으로 날 보더니 실실 웃었다.

“아까 말은 취소할게. 그렇게 멍청하진 않구나.”

“…….”

“그래. 제사장이다. 교단의 핵심이자 위대한 가문의 주적이지.”

이제야 반대파의 생각을 알겠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물었다.

“그러니까… 가문의 높으신 양반들은 제사장을 잡기 위해 이 꼴을 방관한 겁니까?”

“그런 셈이지.”

“거기에 휘말려 죽는 영도들에겐 이 사실을 숨기고요?”

“마지막으로 제사장을 죽인 게 벌써 6년 전이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만을 따진 거지만.”

이 남자는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는 걸까.

“그때 몇 명의 영웅이 죽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96명이다. 중상자를 합치면 그 배를 넘고.”

“…….”

“물론 제사장 한 놈이 다 죽인 건 아니야. 말했다시피 교단에 있어서도 제사장은 대체 불가능한 고급 인력이다.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그러다 보니 평소엔 교에서도 가장 은밀한 장소에 숨어서 기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아사드가 턱을 괴었다.

“그 제사장을 죽일 수 있다면 고작 영도 수십 명의 생명은 희생할 가치가 있다…….”

“…….”

“…라고, 반대한 사람은 생각한 게 아닐까.”

“하하.”

일의 진상을 알게 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수련회엔 팜이라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재밌는 이름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입이 좀 가볍긴 해도 천성이 명랑한 녀석이라 아마 진심으로 싫어하는 녀석은 없었을 거예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 녀석 죽었습니다.”

“…….”

“오두막에서 그 녀석 시체를 발견했는데, 죽기 직전까지 뭔 꼴을 당했는지 몰라도 얼굴엔 두려움만이 자문처럼 남아 있더라고요.”

아사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영도들의 죽음은 나도 안타깝다. 하지만 그들 또한 수련회에서 죽을 각오를 마친 자들일 텐데.”

아사드의 말에 머리가 확 뜨거워졌다.

“각오? 당연히 했죠. 그런데 그건 시련을 이겨낼 것에 대한 각오였습니다. 희생양으로서 개죽음당하기 위한 각오가 아니라.”

“…….”

“제사장 한 명을 잡는 데에 영웅 백 명이 필요하다고요.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뭡니까. 영도 수십 명을 희생해서 제사장을 잡으면 남는 장사라고? 마법사란 작자들은 원래 생각을 그따위로 합니까?”

“음.”

아사드가 볼을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이렇게 무례한 놈은 근 수십 년 만이라 신선하군. 혹시 불사의 가호, 뭐 그런 거라도 받았나?”

“제 목숨이 한 개든, 수십 개든, 주둥이에서 나가는 말은 별반 다르지 않을걸요.”

“겁을 상실한 놈이란 뜻이군. 하지만…….”

아사드가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마음에 들어.”

나와 반대되는 말을 하는 남자를 보며, 나는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미친 계획의 발안자가 가주님입니까?”

이건 묻지 않고선 알 수 없었다.

철혈공을 상징하는 두 가지 요소.

악마 살해와 혈연주의.

그래서 모르겠다.

아들이 두 명이나 참가한 수련회를, 마왕 소환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미친 발상을…….

그 남자가 찬성했을지, 반대했을지.

“아니.”

아사드가 고개를 저었다.

“델락은 이 일을 반대했다.”

“…그런데도 시행됐단 겁니까?”

“배드니커의 가법 위에 존재하는 게 철혈공이다- 속사정을 모르는 외부인들은 종종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

어째 아니란 말로 들린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당장 내가 델락의 의견에 대놓고 반대한다면 녀석도 재고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부정하기 힘들다.

가문의 수호자 위치에 있는 아사드는, 어느 의미에선 가주보다 존중받아야 할 인물이니까.

“아사드 님은 특별하시잖아요.”

그러자 아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송아, 너는 배드니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이 가문이 품고 있는 진정한 힘과 비밀에 대해서.”

“…….”

“지금 내가 말해 줄 것은 없다. 다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방도는 마련해 뒀지.”

“무슨 방도요.”

“교관 중에 루크 배드니커가 있다.”

루크 배드니커.

철혈공의 동생이자 철혈기사단의 단장을 말하는 것이다.

“…못 본 것 같은데.”

“내가 직접 환영 마법을 걸었는데 영도 수준으로 간파할 수 있을 리가.”

“음…….”

“그 외에도 하나 더 안전장치가 있긴 하지만… 이건 지금 말해 봤자 의미가 없겠군.”

나는 이런 식의 대화 방식을 싫어해서 억지로 물어보았다.

“그냥 말씀해 주시죠.”

아사드가 미간을 좁히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와 아예 관계가 없는 일도 아닌가.”

“예?”

“도검선생이 결계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칼자크가…….”

뜻밖에 반가운 소식이다.

“칼자크는 무사합니까? 가문엔 언제 온 거죠?”

“과할 만큼 멀쩡하고, 가문에 온 지는 이제 일주일 정도 됐나?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

“문제요?”

“그래.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캠프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는데, 이상하게 아직 소식이 없어.”

“…….”

“죽지는 않았을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해 보이니 당장 도움을 바라긴 힘들 거다.”

맞는 말이다.

물론 합류할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찾고 다닐 여유도 없고.

“더 궁금한 건 있나?”

“…….”

머리가 조금 식으니, 의외의 점을 한 가지 깨닫게 됐다.

아사드는 의외로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꾸해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남자의 위치, 그리고 힘이라면 모조리 무시해도 될 텐데도 말이다.

이건 아사드 나름대로 죄책감 때문에 나온 태도일까?

“…그럼 그 제사장이란 작자는 언제쯤 처리할 겁니까?”

“글쎄. 그건 제사장의 행동에 달렸지. 혹시 마왕 소환 의식의 단계에 대해 알고 있나?”

헥토르에게 들은 게 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4단계에 진입하기 직전, 혹은 직후가 될 거다. 그때쯤 되면 제사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니까…….”

“제사장이 누군지는 아직 모르나 보네요.”

“교관 중에 있을 확률이 높지만, 영도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지. 그러니 그놈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루크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아사드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제사장이란 놈들을 잡기 힘든 이유가 뭔 줄 알아? 목숨을 여벌로 갖고 있고, 겨우 잡았다 싶었더니 꼭두각시인 경우도 부지기수이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놈들이 가진 회피 기술 때문이다.”

“회피 기술요?”

“귀로라고 불리는 기술이지.”

“귀로歸路?”

“아니. 귀로鬼路.”

아사드는 내 말을 정정하며 말을 이었다.

“거의 딜레이 없이 순식간에 도망칠 수 있는 제사장만의 기술인데, 일반적인 텔레포트보다 훨씬 수준 높은 권능이다. 한번 발동하면 나도 추적이 불가능해.”

아사드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추적할 수는 있지만, 그랬다간 나도 죽는다고 봐야겠군. 놈들이 도망친 곳은 이 대륙이 아닌 악마들의 세상이니까.”

“…음.”

“어쨌든 질문 시간은 이 정도로 해두고, 나도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

본론?

“루안 배드니커, 원래라면 수련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개입할 생각은 없었지만… 넌 좀 재밌는 녀석 같으니 특별 서비스다.”

아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휘적이자, 문이 없던 방에 문이 생겼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배드니커의 본가가 보였다.

따뜻한 아침 햇살 아래, 그 유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건축물.

“거기서 꺼내 주마.”

“정말입니까?”

“마법사는 거짓말하지 않아.”

그 말이 거짓말 같은데.

아무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돌아가서 다른 영도들을 최대한 모은 다음에 다시 반지를-.”

“아. 그건 안 돼.”

“네?”

“영도들이 그렇게 다수 사라지면 제사장이 눈치챌 수도 있다.”

“그 말씀은…….”

“거기서 꺼내 줄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이란 거지.”

아사드가 턱을 괴며 내게 물었다.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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