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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83화 (83/172)

83화

이건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제가 원래 있던 곳으론 어떻게 돌아갈 수 있죠?”

그러자 아사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음… 그러니까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되겠네요.”

“어째서지? 내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한 거야? 다시 멍청한 녀석이 된 건가?”

“…….”

이 양반이 진짜.

악의는 없지만, 오래 말 섞고 싶은 타입은 아니다.

“이해는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지옥으로 돌아가겠다고.”

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지옥일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흠…….”

아사드가 턱을 매만졌다.

“네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렷다……. 좋다. 그것이 네 판단이라면 내가 관여할 권리는 없겠지.”

그리고 내 뒤를 가리킨다.

“출구는 네 뒤쪽에 만들어 뒀어.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돼.”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분명 없었던 문이 생겨나 있었다.

“떠나기 전에 말입니다. 이 미친 계획의 발안자가 누군지는, 제가 물어봐도 안 가르쳐 주시겠죠?”

“응.”

그러더니, 불현듯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혼자 낄낄 웃더니 말한다.

“그래도 말 정도는 전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요?”

“그래. 그자한테 해주고 싶은 말 있어?”

“…늙은이 새끼.”

“음?”

아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인가?”

“네.”

“그렇군. 근데 내가 나이를 말했던가.”

“그건 아닌데요. 고작 코흘리개한테 가주님이 휘둘릴 것 같진 않아서요.”

“정확하군.”

아사드가 내 말을 긍정해 줬다.

물론 저 긍정 자체가 속임수일 수도 있겠지만, 아사드가 그런 귀찮은 심리전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저 대답은 모른 척 던져 주는 힌트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 오랫동안 배드니커의 장막 뒤에 숨어 있던 노괴 중 하나겠지.

“좋다. 내키면 전해 줄 테니까 이만 가 봐.”

아사드가 손을 휘저었다.

내가 고개를 숙인 다음 문고리를 잡았을 때.

“루안 배드니커.”

“네?”

“살아남으면 좋겠군.”

내가 힐끗 뒤를 보니, 아사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야.”

* * *

“도, 돌아왔다!”

“루안! 괜찮아?”

“아버지와 만났나? 그분이 뭐라고 하셨지?”

“…잠시만. 현기증이.”

나는 비틀거리는 척하며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나를 둘러싼 기대 섞인 얼굴들.

심지어 저 구석에 처박힌 카론조차 힐끗힐끗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면 그냥 숨겨?’

이대로 진실을 말하면 배드니커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거고,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훨씬 커질 수도 있다.

다른 가문이 병신도 아니고, 자기네들의 귀한 자식이 죽는 걸 그대로 방치했다는데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지.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걸리는 게 있다면 아사드의 태도다.

그 똑똑한 양반이 이런 나비효과를 모를 리는 없는데 내게 일의 전말을 숨김없이 말했다는 점.

‘다른 가문이 뭐라 지랄하건 개의치 않는다는 건가.’

자칫 잘못하면 다른 가문과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는 건 물론, 황실에 제재까지 받을 수도 있다.

배드니커가 자기네들이 저지른 업보로 활활 타오르는 꼴을 보는 건 분명 유쾌한 일이겠지.

“…뭔가 이상한 방 같은 곳으로 이동했는데 아무도 없더라.”

그러나 나는 진실을 감췄다.

당연히 배드니커를 위해선 아니다.

그냥 아직 영웅이라고 부르기 힘든, 이 미성숙한 녀석들이 진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물론 ‘당장 도움받긴 글렀다.’라는 내 말에도 이 녀석들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사장을 잡기 위한 미끼 역이 됐다는 말을 들으면 훨씬 더 절망하지 않았을까?

물론 내 개인적 소견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버텨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반드시 배드니커가 깨달을 테니까.”

저 말대로다.

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 진작부터 다 알고 있었지.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영도들을 보며, 슬그머니 내 다음 행선지를 밝혔다.

“나는 일단 캠프로 갈 생각인데.”

“…캠프?”

“그래. 아무래도 교관 측에서 아무런 대응도 없는 게 마음이 걸려. 뭔 상황인지 가서 한번 보려고.”

“위, 위험하실 텐데요…….”

“위험 없인 성과도 없는 법이지.”

“아, 아하… 그, 그럼 전 여길 지키고 있겠습니다…….”

소심한 드워프, 바질이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

태도를 보니 같이 갈 생각은 1도 없어 보인다.

“애초에 다 갈 생각은 없었어. 단체로 움직이면 위험하잖냐. 그러니 지금부터 지원자만 받겠어. 갈 사람?”

일단 이런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나는 혼자 움직여도 별 상관이 없다.

아, 한 녀석은 빼고.

“카론, 넌 나랑 함께 간다.”

“왜지?”

“왜지는 개새끼야. 처맞고 갈래, 그냥 갈래.”

“…….”

어쩐지 카론 앞에선 내 말투가 험해지는 것 같다.

이 녀석 생김새 때문인가?

꼭 용병처럼 생겨서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무튼 카론은 입을 닫았다.

이유는 이 녀석들 중에서 가장 쓸 만한 게 카론이라서지만…….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니다.

여기서 저 녀석을 제어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 괜히 눈 밖에 놔뒀다가 또 개짓거리를 벌일 수도 있다.

악마가 출현했는데도 포인트로 딜하던 미친놈인데 뭘 못 하겠어.

“…네가 말 안 해도 갈 생각이었다.”

카론이 최소한의 반항을 하듯 한마디 던졌다.

말 안 들으면 진짜 때려 팰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수고를 던 셈.

“나도 간다.”

헥토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라면 당연히 간다고 말할 줄 알았다.

일단 내가 생각한 탐색 멤버는 이렇게 셋인데…….

나는 아직 갈팡질팡하는 영도들을 보며 말했다.

“자신 없으면 그냥 여기 지키고 있어. 남한테 피해 줄 바엔 그편이 낫다.”

나는 확실히 말했다.

오늘의 숲은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장소가 됐을 터.

짐짝을 달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닐 터다.

“…나도, 가겠어.”

그리고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에반 헬빈이 동행 의사를 밝혔다.

뭔 생각으로 꺼낸 말인가 싶어 가만히 보니… 에반의 시선은 내가 아닌 카론에게 닿아 있었다.

‘카론한테 경쟁의식을 느낀 건가?’

지난번 대련에서 왕창 깨진 걸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나 보다.

일반적으로 경쟁 심리는 과하지만 않으면 긍정적인 성장으로 이어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에반, 어제랑 비슷한 꼴을 보이면 도중에라도 돌려보낼 거야.”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맹세해도 좋아.”

이렇게까지 확언한다면, 좋다.

“그럼 정찰대 결성이군.”

나와 카론, 헥토르, 마지막으로 에반.

이 넷이 캠프를 보러 간다.

“너희는 여기서 대기하면서 여유가 되면 먹을 걸 확보해 줘. 그리고 만에 하나 오두막을 버리게 되면 흔적을 남겨 두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먹을 건 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지. 만에 하나 악기가 이 땅을 침범하면 숲이건 샘이건 다 말라비틀어질 테니, 그 전에 최대한 확보해 둬야지.”

“음… 알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미르를 보았다.

얼떨떨한 표정을 보니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것 같다.

“미르.”

“으, 음? 뭐냐.”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한다.”

그러자 미르가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잘 부탁한다고?”

“그래. 네가 저 녀석들을 지켜 줘.”

“내가…….”

너무 긴장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농담을 건넸다.

“약자를 지키는 게 영웅이잖아.”

“…누구 보고 약자래.”

샤를이 투덜거렸지만.

내 말은 진담 반, 농담 반이었다.

미르의 포텐셜은 카론이나 헥토르에 비해서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공포만 극복할 수 있다면 주위에 널린 저급 악마는 적수가 되지 않을 거다.

“알겠다! 내가 지킬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조심히 갔다 와라!”

어쨌든 천성이 단순한 녀석이라, 내 격려 아닌 격려가 잘 먹혔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는 미르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줬다.

“그럼 우선 캠프로 가는 건가?”

“최종 목적지는 그렇지. 일단 가는 길에 영도를 만나면 도와줄 생각이야.”

이 녀석들에겐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영도 중에서 한 명, 반드시 만나야 할 녀석이 있다.

세렌 굿스프링.

이 사태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굴던 녀석.

배드니커도 아닌 굿스프링이, 교단의 계획을 어떻게 알았던 걸까?

우선은 그걸 알아봐야 한다.

* * *

교관이 나눠 준 숲의 지도는 정밀도가 높지는 않았으나.

대략적인 위치는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려져 있었다.

“캠프는 그렇게 멀지 않다. 이런 사태가 아니라면 두세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

“지금은?”

“최소 이틀, 길면 사나흘까지 봐야겠지.”

헥토르가 숲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곧바로 캠프까지 향하는 것보단 숲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1차 목적지로 삼는 게 어떨까 싶군. 그러는 김에 식수도 보충하고.”

개천이라면 우리 조가 처음으로 괴물 거미를 만났던 곳이다.

식수도 넉넉하지는 않은 편이라 우리는 동의했다.

그때 주변을 둘러보러 떠났던 카론이 소리 없이 복귀하더니,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대충 주변을 둘러보고 왔다. 악마가 득실거리더군. 두셋씩 짝을 이룬 형태였다.”

“형님이 말한 대로 악마들이 무더기로 소환된 모양이군.”

두셋씩 다닌다면 기습으로 죽이기엔 리스크가 크다.

즉 크게 둘러 가더라도 악마와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카론이 길잡이가 됐다.

이 녀석은 악마가 소환돼서 위험해진 숲을 제집 안마당처럼 싸돌아다녔는데, 그러면서도 기척 갈무리가 완벽했다.

헥토르는 숲의 지리나 특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몇 번 들른 건지, 사전에 얘기를 들은 게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숲이 악기에 절여지기 전까지는 유효한 지식일 터다.

‘내 조보다 낫구만.’

카론과 헥토르, 두 녀석 모두 영도 중에서도 한 손에 꼽는 인재니 당연하기는 하다.

어쨌든 우리는 느리지만, 착실히 전진했다.

생각 이상으로 순조로운 진격.

하도 변수가 많아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내일쯤 도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음…….”

품에서 모래시계를 꺼내서 확인했다.

출발하고 제법 시간이 흘렀다.

공터는 몰라도 개천은 슬슬 보여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

그때 카론이 말했다.

“…이상하군.”

“뭐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게 무슨…….”

“잠깐. 여기 아까 지났던 곳 아닌가?”

헥토르의 말에 카론이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지났던 곳이라고?”

“그래.”

“증거는.”

“저 나무, 아까 봤던 것과 똑같이 생겼잖나.”

카론은 헥토르가 가리킨 나무를 보았지만, 딱히 수긍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동조했다.

“형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그래……? 내가 보기엔 잘 구분이 안 되는데.”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

그리고 나와 헥토르는 뭔가 통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형님.”

“…그래.”

나와 헥토르만 깨달았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배드니커만 깨달았다는 것.

나비의 숲의 특징 중 하나.

배드니커 이외의 인물은, 이 숲에서 헤맨다.

“숲의 결계가 부서진 건가.”

“부서지고 있는 도중일 거다. 결계가 완전히 무너졌다면 가문에서 즉각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

헥토르는 배드니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영도를 희생양 삼아 마왕을 족치려는 미친놈들이라고까지는 예상 못 한 듯하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 순간이다.

- 으아아아아…….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들었어?”

“그래. 서쪽이었다.”

“캠프와는 정반대 방향이군.”

“그래도 가야죠.”

아직 헥토르와 어색한 사이인지, 존댓말을 고수하고 있는 에반이 말했다.

“루안이 출발 전에 말했잖아요. 영도를 만나면 구해야 한다고.”

“그랬지. 하지만 영도가 아니라면?”

“네?”

“밴시일 수도 있다.”

헥토르가 말했다.

“인간의 비명을 흉내 내는 악마지. 이놈도 저급 악마지만 비스트보단 골치 아픈 상대다.”

“같이 소환됐을 수도 있다는 거군.”

“가능성이 없진 않아.”

일동의 시선이 내게 쏠려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조였던 에반은 그렇다 쳐도, 왜 나머지 두 녀석도 날 결정권자처럼 취급하는 걸까.

나는 짤막하게 말했다.

“구하러 가야지.”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됐는데 무시할 수는 없다.

아직 어리고 미성숙하긴 해도…….

우리는 영웅 지망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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