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헥토르야 뿌리부터 썩은 놈은 아니고.
에반이야 기본 선량한 놈이니 구하러 갈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카론도 군말 없이 따라왔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리 대답했다.
“빚을 지울 기회지 않나.”
“가서 포인트로 딜하면 또 처맞는다.”
“…….”
카론이 입을 닫았다.
어쨌든 우리는 더욱 신중하게 비명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딱히 정신 건강에 좋지는 않은 광경도 보았다.
영도들의 시체였다.
“…….”
“…….”
헥토르는 이미 차게 식은 시체를, 굳이 얼굴까지 확인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실이라는 녀석이다. 팔롬 가문의 장남.”
에반도 낮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여동생이 예쁘다더라. 장난으로라도 소개시켜 달라 하면 정색하던 녀석이었는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멀쩡해 보이는 건 카론뿐이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이 새끼가 내가 할 말을 뺏네.
“내색만 안 하는 거지.”
사실이다.
내 속은 지금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배드니커.
전생엔 그토록 달고 싶었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꼬리표에서, 지금은 혐오감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까짓 가문이 뭐라고 이 녀석들을 죽일 권리가 있단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더럽고, 엿 같은 인생이라고 해도.
살아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좋은 날이 올 수도 있다.
수련회에 참가한 녀석 중에선 그런 생각을 품었던 영도가 많았을 거다.
악명 높은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참가해서, 성과를 거두고, 인생 역전을 노려보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나는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 현재 위치를 대략적으로 추산한 다음 체크를 해 놨다.
카론이 내 행동에 트집을 잡았다.
“뭐 하는 거냐?”
“체크.”
“체크를 왜 하냐고 묻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와서 묻어 줘야 할 거 아냐.”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하다못해 악마나 짐승들이 시체를 훼손시키지 못하도록 나무 위에 올려 두는 것밖에.
그 모습을 본 카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미 없는 짓을 하는군.”
“의미가 왜 없어.”
“이미 죽었으니까. 시체를 회수하고, 질 좋은 토양에 묻어 줘 봤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장례는 산 자를 위한 조사다.
그러한 관념은 나와 같았지만, 카론의 생각은 거기서 멈춘 듯했다.
“죽은 녀석은 그렇겠지. 그래도 나중에 이걸 보게 될 유가족들 심정도 생각해야 할 거 아냐. 산짐승에 훼손된 시체를 보면 부모 마음이 어떻겠어.”
이것도 용병 생활을 하며 배운 것이다.
직업상 죽을 일이 많았던 그 직종은 하루가 멀게 사망자가 쏟아졌는데…….
그 때문에 사망자의 친구, 가족, 애인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나조차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훼손된 시체를 본 유가족은 십중팔구 그 자리에서 주저앉더라.
시체는 의외로 많은 걸 알려 줘서 그렇다.
어떻게 죽었는지, 죽는 순간 어떤 심정을 느꼈는지…….
개인적으론 불필요한 진실이라 생각한다.
“…….”
카론이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고 있지만, 당황한 티가 났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혼쭐이 난 꼬마를 보는 듯했다.
‘희한한 놈.’
대체 뭔 교육을 받았길래 이렇게 뒤틀린 놈이 된 건지.
제국 최강의 레인저인 하이드 우드잭.
그 위명은 나조차 알 정도로, 제국 전역에 널리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카론이 보인 모습을 고려하면, 어쩐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시체는 한두 구가 아니었고.
앞서 말했듯 발견할 때마다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겁에 질렸군.”
“그래. 팜이랑 같아.”
에반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비스트는 아니다. 그 악마에게 죽었다면 시체조차 남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형님이 말한 밴시인가?”
“글쎄…….”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마침내 살아 있는 영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살아 있는 영도는 총 일곱 명이었고, 상황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충 봐도 십여 마리의 악마에게 몰린 상태였는데, 그중 한 마리.
여태껏 봤던 악마와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의 개체가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비스트도, 밴시도 아니었다.
허망하게 중얼거린 에반의 혼잣말에 대답한 건 이번에도 헥토르였다.
“그림 리퍼다.”
“그림 리퍼?”
해초처럼 흐물거리는 로브와 불길한 기류, 기형적일 정도로 커다란 낫.
이름은 확실히 생긴 대론데.
“사람의 공포를 먹는 악마다. 저 낫으로 영혼을 수확한다더군.”
“척 봐도 거물이군. 의식엔 저급한 악마만 소환된다고 하지 않았어?”
“저놈의 등급도 높은 편은 아니다. 애초에 비스트와 밴시에게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 역할이니까.”
헥토르가 말했다.
“만약 싸울 거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
그렇겠지.
멀리서 보는데도 등골이 오싹거린다.
하지만…….
“…….”
살아 있는 일곱 명의 영도.
그 사이에 있는 흰색 대가리가 보였다.
“구할 거지?”
에반이 나를 보며 말했다.
“구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반이 씩 웃었고 헥토르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배드니커의 땅에서 이 이상 영도들이 죽는 걸 방관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는군. 넌 어쩔 건데?”
그러자 카론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억지로라도 시킬 생각이지 않나.”
“목숨 거는 일로는 강요 안 해.”
“흥…….”
카론이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아직 살아 있다면 구해야겠지.”
이 삐뚤어진 놈한테서 이런 기특한 말이 나올 줄이야.
나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만장일치인가? 우리 생각보다 괜찮은 조가 될 것 같은데.”
에반도 긴장을 풀려는 건지 억지로 농담을 던졌다.
“조장은 누구로 할까?”
“글쎄. 저 악마를 죽이는 놈으로?”
장난삼아 말했는데 헥토르와 카론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미르도 그렇고, 확실히 이 나이대의 소년 소녀는 단순한 감이 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
에반은 물론이고 카론과 헥토르의 손까지 살짝 떨리고 있는 걸 보았다.
사실 무서운 게 당연하다.
아무리 실전 경험이 풍부하더라도.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은 영재라고 해도.
악마라는 저주받은 존재와 정면으로 싸우는 건 당연히 두렵고, 떨리는 일이 맞다.
그러니 영웅이란 그러한 공포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뭐랄까…….
머리가 살짝 맛이 간 녀석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이 녀석들을 칭찬해 줬다.
“이 미친 새끼들…….”
“…….”
“…….”
안타깝게도 호응은 없었다.
* * *
그림 리퍼란 악마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놈 주위에 비스트가 족히 십여 마리는 있었으니.
의아한 건, 그 흉포한 놈들 전원이 영도들을 몰아세우고 있지는 않다는 점.
사실 악마의 숫자가 저 정도로 많다면, 영도 일곱 명쯤이야 진작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잠깐 상황을 관찰한 결과 답이 나왔다.
지휘관, 그림 리퍼란 놈의 지시였다.
‘공포를 처먹는다고 했나?’
세상천지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딴 걸 먹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영도 입장에선 다행인 사실이었다. 공포를 수확하지 않았다면 진작 다 죽었을 테니까.
우리는 간단하게 작전도 짰다.
첫 기습으로,
최대한 많이 죽인 다음,
개판이 된 상태에서 싸운다.
그리고 지금은 각자의 기습 포인트로 이동하는 중.
개시 신호도 만들었다.
지금 영도를 몰아붙이는 건 비스트 세 마리였는데, 저놈들도 지치기는 하는지 중간중간에 선수 교대를 한다.
우리가 노리는 건 그 순간.
“…….”
나는 나무 위에 앉은 채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기습으로 각자 한 놈씩은 없애면 좋은데.’
당연하지만 기습의 이유란 본격적인 교전 전에 최대한 적의 숫자를 줄여 놓기 위함이다.
최소 네 마리는 줄여야 이후 전투 상황이 수월해지겠지.
나는 두 마리까지 죽일 자신이 있었으니, 나머지 세 명이 두 마리만 더 죽여 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뜻밖의 전개가 벌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내 맞은편에 숨어 있던 녀석, 에반이 내게 무언가 수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
‘뭐라는 거야?’
내가 의아함을 표한 순간,
에반이 갑자기 나무에서 떨어졌다.
“……!”
발을 헛디딘 건가? 하필 이런 순간에?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이러면 작전 변경이다.
나도 곧장 추락하듯 나무에서 떨어졌고, 헥토르와 카론도 한 발자국 늦게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꽈앙!
그러나 급한 기습이었기 때문에, 내 낙화로 한 마리밖에 죽이지 못했고.
다른 녀석들은 악마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도로 그쳤다.
‘이러면 엿 됐군.’
애초 상정했던 것보다 전장 난이도가 세 배는 올랐다.
물론 앓는 소리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나는 주변에서 덮쳐오는 악마들의 공격을 피했다.
워낙 덩치가 큰 놈들이라 그런지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수가 많다 보니 결정타를 먹이기가 애매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
왜 이놈들이 숲에서 두셋씩만 다녔는지 알 것 같다.
덩치가 큰 놈들이 열댓 마리씩 몰려 있다 보니 이런 난전에는 취약한 느낌.
조금 장기전이 되겠지만, 이 정도라면 별 피해 없이 이길 수 있을지도…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진 순간이다.
오오오오오오-!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후방에 있던 그림 리퍼였다.
그리고 복잡하던 비스트들의 움직임에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런 식인가?’
이건 지휘라기보다는… 조종 같은데.
비스트에게서 자율 의지가 완전히 박탈되고, 그저 입력받은 명령에 복종하는 골렘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런 형태의 전장에선 보다 단순한 쪽이 유리한 법이다.
‘썩을.’
순식간에 전장의 상황이 반전됐다.
무엇보다 껄끄러운 건, 저 그림 리퍼란 놈이 아직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이 지경이라는 것.
이럴 때면 염화제일공의 슬로우 스타터 기질이 조금 뼈아프다.
‘다른 녀석들은-.’
의외로 잘 싸우고 있다.
특히 헥토르와 에반은 이 난전 속에서 다친 영도들을 보호하기까지 했다.
또 에반이 먼저 뛰어내린 이유도 알게 됐다.
크게 다친 영도 한 녀석이 보였는데, 어째 낯이 익다.
카리스.
가슴에 난 커다란 상처에, 입으로는 울컥울컥 핏물을 뱉고 있었다.
절친이 저 꼴이 된 걸 보면 눈이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기는 하지만…….
솔직히 잘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내가 여러모로 난감한 전장 상황에 여러 수단을 고려하고 있을 때.
불현듯 시린 바람이 휘몰아쳤다.
휘오오오오오-!
단순히 겨울바람이 아니다.
피부를 할퀴는 바람을 느끼는 즉시, 이건 마법 또는 가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렌?’
이 바람은 분명 저 녀석에게서 뻗어 나왔다.
세렌은 한쪽 팔을 쭉 뻗고 있었는데, 이 칼바람에 휘말린 비스트들의 육체가 썩은 고기처럼 찢겼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장 후방에 있던 그림 리퍼까지 순식간에 분쇄했다.
그가가가가가각-!
그림 리퍼는 자신에게 치닫는 칼바람을 보며 검은색 기류를 폭풍처럼 쏟아냈지만, 몇 초도 버티지 못한 채 소멸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게 대체.”
헥토르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림 리퍼를 포함한 비스트 십여 마리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털썩-.
그리고 그 신위를 선보인 주인공은 그대로 풀썩 지면 위로 엎어졌다.
“…어쩌지?”
헥토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나는 즉각 대답했다.
“일단은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