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몸은 좀 어때?”
“…최악이야.”
세렌은 잠깐 눈을 감은 채 단전에 손을 올리더니,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네가 날 구한 건가?”
“그런 셈이지.”
“고마워. 솔직히 죽을 줄 알았는데.”
나는 주변을 보았다.
카론과 에반, 헥토르는 이 은신처에서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아직 세렌이 깨어난 건 눈치 못 챈 상황.
그렇다면 얘기를 나눌 기회는 지금뿐이다.
“너는 이 상황을 예견했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세렌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시선으로, 수풀에 가린 하늘을 올려다보니 중얼거렸다.
“예견이라…….”
“……?”
“그렇게도 말할 수도 있겠군.”
좀 애매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순순한 시인이다.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데.”
“적어도 마왕 강림 의식이 벌어질 건 알고 있었지.”
“그럼-.”
“왜 애초부터 막지 않았냐고?”
세렌이 킥 웃으며 말했다.
“굿스프링인 내가, 배드니커의 수련회에서 마왕 소환 의식이 벌어진다고 떠든다라? 믿고 안 믿고는 둘째 치고, 경우에 따라선 두 가문이 전쟁을 벌일 수도 있겠는데.”
“…….”
“있지. 난 이 꼴을 막을 방법이 뭔지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 그런데 결론은 하나밖에 없더라.”
“직접 참가하는 거?”
세렌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수련회에 뭐 아는 사람이라도 참가했나?”
“그럴 리가 있겠어? 내 지인은 다 배드니커를 싫어해.”
“그럼 생면부지의 녀석들을 구하려고 이곳에 발을 들인 거야?”
“…겸사겸사지. 이 숲에선 얻을 것도 있으니까”
어쩐지 마지막 말은 내게 핑계처럼 들렸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이 녀석은 바른 일을 하고도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오래 못 살 성격이구만.”
“남이사.”
“그럼 네가 말한 비밀이란 게 마왕 강림 의식이었던 거야?”
세렌이 잠깐 침묵하더니 툭 말했다.
“…일부지.”
“…….”
“그래서 지금 무슨 상황이야? 난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고, 내 일행은 어디 갔지? 설마…….”
“죽진 않았어.”
세렌은 정확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쩐지 칼바람을 시전할 때 눈깔이 까뒤집혀 있더라니.
“캠프를 향하고 있는 도중에 비명이 들려서 도우러 왔지. 너랑 같이 있던 녀석들은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했고. 시간은 네가 기절하고 한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다.”
“음…….”
“어쨌든 우린 계속 캠프로 갈 생각인데, 넌 어쩔래?”
“…별수 있나. 같이 가야지.”
세렌이 물었다.
“그런데 너 혼자야?”
“아니.”
주변에 흩어져서 경계를 서고 있는 녀석들을 가리키니, 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 안 듣는 녀석들을 잘도 모았네.”
“말은 안 통해도 주먹은 잘 통하더라.”
“아하.”
그리고 녀석들을 부르려고 하는데 세렌이 불쑥 말했다.
“…더 안 묻냐?”
“뭘.”
“이것저것,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거 아냐.”
많긴 하지.
그런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니, 지금 당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많이 길겠지?”
“뭐가.”
“네 얘기.”
그러자 잠깐 멈칫한 세렌이, 어쩐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마어마하게 길지.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나올 만큼.”
“그럼 나중에 듣지 뭐.”
“그래도 되겠어?”
“한가롭게 얘기나 들을 상황이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아. 근데 이건 지금 물어보자. 네가 악마를 쓸어버린 그 힘은 뭔데? 가호?”
그러자 세렌이 대꾸했다.
“가호라면 가호인데 일반적인 가호는 아니야. 이건 잊힌 신의 가호니까.”
“잊힌 신…….”
뜻밖의 이름이 등장했다.
나는 칠죄검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럼 네가 들렀다는 제단은 잊힌 신의 제단이었나 봐.”
“에디에게 들었어? 맞아.”
어떻게 세렌이 제단의 위치를 알고 있었는지, 어떤 잊힌 신이었는지.
그런 건 지금 상황에선 딱히 중요하지 않다.
“또 쓸 수 있어?”
“…한 번 정도는 아마 가능할 것 같기도. 리스크는 크겠지만.”
당연하지만 쉽게 쓸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아쉽긴 하다.
방금 기술을 맘껏 쓸 수 있었다면, 고화력의 마법사를 우군으로 둔 것처럼 든든했을 텐데.
어쨌든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라 얘기는 이 정도로 끝냈다.
나는 떨어져 있던 녀석들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줬다.
그러자 주변 경계를 하던 녀석들이 즉각적으로 복귀했다.
“깨어났군.”
“그래.”
“…….”
“…….”
이 분위기 어쩔 건데?
접점이란 게 없는 놈들을, 실력 하나만 보고 끌어모으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겼다.
성향이 워낙 제각각인 녀석들이다 보니 어색함이 주변을 잠식한 것.
어쩔 수 없이 조장인 내가 발 벗고 나섰다.
“친목도 도모할 겸 자기소개부터…….”
“집어치워.”
에반을 뺀 셋이 동시에 말했다.
‘마음이 잘 맞는구만?’
내 오해였다.
* * *
카론, 헥토르, 에반.
마지막으로 세렌.
내가 이번 수련회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한 영도들 되시겠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 녀석들 전원을 한자리에 모으니 나름 감회가 남달랐다.
일단은 드림팀을 형성한 느낌?
세렌은 죽다 일어난 녀석치고는 빠릿빠릿하게 잘 움직였다.
뒤처지는 녀석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보다 더 빨리 나아갈 수 있었고.
모래시계가 다 닳았을 무렵-.
그러니까 정확히 시험 개시 이후 사흘이 경과한 시점에서, 캠프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극적인 복귀로군.”
“그러게.”
가까이서 본 캠프는 섬뜩할 만큼 조용했다.
인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질감이 느껴질 지경.
마지막으로 이곳을 봤을 땐 영도들의 앓는 소리와 교관들의 호통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던 곳이라 더 그런 것 같다.
“…뭔가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인데.”
“음…….”
“이제 어쩔 거냐.”
헥토르의 말에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들어는 가 봐야지. 그래도 함정일 수도 있으니까 두 명만 갈 거야.”
“누구 두 명.”
“나랑 카론.”
그 직후 카론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지만, 애초부터 저 녀석에겐 선택지가 없다.
“그럼 우린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다.”
“그래. 뭔 일 생기면 신호를 보낼게.”
“어떤 신호?”
“소리 겁나 크게 지르지 뭐.”
“음… 알겠다.”
나와 카론은 곧바로 캠프로 진입했다.
가장 먼저 향할 곳은 당연히 교관 동.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카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부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묘한 기척? 악마?”
“사람 같은데.”
“몇 명인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 명.”
딱 한 명이라…….
어쩐지 구린내가 난다.
어쨌든 누군가 있다면 이쪽도 기척을 숨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창문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이것들은 환기도 안 시키나.”
문이란 문은 죄다 잠겨 있었다.
물론 창문을 깨면 쉽게 진입할 수 있겠지만, 그럴 거면 이렇게 몰래 움직이지도 않았겠지.
“어쩔 수 없군. 정문으로 가자고.”
위험하지만 창문을 깨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문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저벅.
그렇게 교관 동으로 진입.
영도들은 발도 들일 수 없는 교관 건물의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번쩍번쩍한 건 겉이었고, 내부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
“어이.”
“알아.”
내부로 발을 들인 직후,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묘하다.
이 정도 혈향이라면 바깥에서부터 진동해야 하는데…….
혈향은 마치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건물 안에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교관들은 없나?’
진짜 다 죽은 건가?
그게 가능한 일일까.
교관 동에 있던 건 배드니커에서 엄선한 기사들과 대사범- 거기에 아사드에게 들은 바로는 철혈공의 동생까지 있었다.
아무리 제사장이라고 해도 그들 전부를 혼자 죽일 수는 없을 텐데…….
혈향을 추적하며 1층 복도를 지난다.
그러다 어느 방 앞에서 멈췄다.
다른 방보다 유난히 문이 큰 방이었지만,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문 아래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안쪽에 있나?”
“아니. 내가 감지한 기척은 위층에서 느껴진다.”
물론 이 녀석의 기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은 확인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음…….’
그리고 아까와는 비교도 하지 않을 짙은 혈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인상을 구긴 채로 내부를 살폈다.
회의실로 썼던 방인가?
널찍한 방은 피칠갑을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육편이나 시체는 없었다.
아니.
벽면에 처박힌 시체가 딱 한 구 있었다.
아는 얼굴이다.
이번 수련회에서 나와 가장 많이 말을 섞었던 교관.
수렵선생 탄코.
“카론, 주변에 뭐 없나 찾아봐. 난 시체를 살펴볼 테니까.”
“명령하지 마라.”
카론은 투덜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수렵선생의 시체에 다가갔다.
사인은 가슴 한복판에 뚫린 구멍이다.
대충 내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단면이 반듯한 걸 보니 수렵선생은 몸에 구멍이 뚫린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일격에 절명했다고? 탄코 정도의 실력자가?’
이해가 안 간다.
거기에 사방팔방 뿌려진 핏물은 인간 한 명의 몸에서 나왔다기엔 너무 많다.
“이봐.”
그때 카론이 다시 돌아왔다.
‘…근데 이 새끼는 남을 부를 때 어이, 야, 이봐밖에 모르는 건가?’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카론이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걸 주웠다.”
“이건…….”
통신 수정이다.
건물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그 수정 말이다.
“이 방에 있던 거다. 많이 부서지긴 했지만, 작동은 하더군.”
“과연…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단 건가? 잘했어.”
“…….”
카론이 내 말에 인상을 구겼다.
칭찬해 줘도 지랄이네.
아무튼 나는 통신 수정에 마나를 불어넣었고.
우웅-.
곧 이 마도구는 노이즈 낀 영상을 출력하며…….
이 방에서 벌어진 일을 재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