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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87화 (87/172)

87화

교관 동, 회의실.

혹은 감시실이라고 불리는 이곳엔 통신용 수정이 총 128개 배치되어 있다.

영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함은 물론, 수련회 캠프에 강대한 몬스터가 침입하면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평소엔 감시 인원 서너 명만이 이곳에 대기하지만, 특별 시험엔 교관 대부분이 머물게 된다.

아예 이부자리를 깔고 자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회의실은 생활감 넘치는 장소가 됐다.

회의실에 있는 교관의 총인원은 스무 명.

‘…음?’

그중에서 처음 위화감을 감지한 건 생존선생 소이몬드였다.

128개의 통신 수정 중 수련회 캠프를 비추는 건 고작 28개.

나머지 100개는 캠프를 중심으로 반경 10킬로미터의 지역 내에 구석구석 배치되어 있다.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저건…….”

그중 한 수정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간헐적인 깜박임 이후 화면이 까맣게 물든 것.

구석진 곳에 있는 수정이라 다른 교관들은 깨닫지 못했고.

소이몬드 또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비의 숲은 신비한 장소다.

이 지역 자체에 흐르는 마나만 해도 특수한 편인데.

이 땅에 여러 성유물이나 마도구를 배치하며 그 성질이 더욱 복잡하게 변했다.

그 때문에 수정이 혼선을 일으키는 사고는 의외로 잦았던 것.

그러니 소이몬드가 의아함을 느낀 건, 다섯 개 이상의 통신 수정이 먹통이 됐을 때였다.

그때쯤 되니 다른 교관들도 함께 의문을 표했다.

“수정이 왜 이러죠?”

“오늘은 만월이지 않습니까? 이럴 때 마도구는 간혹 오작동을 일으키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수가 많은데요?”

“별일 아니겠죠.”

그러한 말도 20개 이상의 수정이 제 기능을 잃었을 땐,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낙관적인 교관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이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영도 중에서 누군가가 수정을 부수고 있는 건가?”

“그들 수준으로 숨겨진 수정을 간파하는 건 어려울 텐데…….”

“하지만 이건 누군가의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소.”

그때 기사들이 나섰다.

“저희가 주변을 한번 순찰하고 오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지요?”

“A-3구역인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30분 내로 돌아오지요.”

그렇게 떠난 기사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때쯤 통신용 수정은 절반 이상이 고장 났다.

‘느낌이 좋지 않아.’

소이몬드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불길함과는 별개로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라면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후안 선생이 어디 갔는지 본 사람 없소?”

“무예선생이요? 못 봤습니다.”

“저도요.”

“아까 회의실을 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소이몬드가 그쪽을 보며 물었다.

“그게 언제였소?”

“그것까지는 잘…….”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회의실엔 무예선생 이외에도 몇몇 대사범이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무예선생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던 자들.

‘…….’

소이몬드는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느끼며, 회의실을 나섰다.

정확히는, 나서려고 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회의실 입구에서 후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

“…….”

평소라면 이 순간 등장한 후안 주위에 여러 인물이 모여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침묵이 내려앉았다.

후안의 전신은 피투성이였고.

눈썰미가 좋은 이라면, 그 피가 후안의 것이 아니란 사실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안 선생, 어디서, 뭘 하다 왔지?”

후안이 피에 절인 겉옷을 벗으며 대답했다.

“방금 기사들을 숲에 보냈지요?”

“그렇네.”

“그들을 죽이고 오는 길입니다.”

“뭣……?”

그 순간, 교관 사이에서 누군가가 용수철처럼 뛰쳐나갔다.

야생의 짐승을 연상케 할 만큼 빠르고, 위협적인 움직임이었다.

‘탄코……!’

그러나 수렵선생 탄코의 신형이 순식간에 후안의 지척까지 이른 순간, 그 육체가 허공에서 정지했다.

“……!”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잡힌 것 같은 모습이다.

탄코는 주먹을 휘두르며 무언가를 공격하려는 듯했지만, 손발은 허공만을 스쳤다.

“가만히 계시지요, 수렵선생. 아직 죽고 싶지는 않잖습니까.”

“…뭘 한 거냐?”

“아직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당신도 귀중한 제물이니까요. 물론 이 이상 귀찮게 굴면 저도 더 이상 좌시할 수-.”

탄코가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발끝이 후안의 얼굴에 꽂히기 직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탄코의 육체가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가만히 계시라니까.”

“탄코 선생!”

소이몬드가 급히 탄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표정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었다.

절명했다.

“이, 이럴 수가…….”

초원의 대전사이자 대사범인 탄코가, 단 일격에 죽은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선생, 그거 아십니까?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의원들은 사람의 피에도 종류가 있단 걸 몰랐다지 뭡니까? 종류가 다른 피가 합쳐지면 혈액이 응집해 환자가 죽는다는 걸 모르고 무분별한 수혈을 감행했지요. 그 무지의 대가로 얼마나 되는 환자들이 죽었을까요?”

소이몬드는 후안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말했다.

“대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무지란 곧 비극입니다. 탄코 선생이 죽은 것도 그 때문이죠. 의식 도중 제사장을 공격하면 신벌을 받는다는 당연한 이치를 몰랐으니까요.”

“의식이라고?”

몇몇 이들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자, 장난이 과하십니다, 무예선생…….”

“하하. 아직 장난으로 느껴지시나 보군요.”

“장난이 아니라면 이게 뭡니까! 타, 탄코 선생이 이렇게 죽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후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상한 건 없습니다. 여러분들, 이건 지극히 배드니커스러운 일 아닙니까?”

소이몬드는 이제 상황을 파악했다.

눈앞의 존재는 명백한 적이다.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배드니커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저는 지금 배드니커의 철칙 중 하나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철칙이라고?”

“강자존强者尊.”

후안이 양팔을 뻗은 순간이다.

바닥에서 검은색 점액질이 치솟더니, 교관과 기사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당황하지 마라! 진형을 갖춰!”

“고,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꼭 생물처럼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점액질에는 날붙이는 물론, 가호와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점액질은 모든 공격을 무시한 채 교관들에게 접근했고,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들은 전신이 점액질에 뒤덮인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은 꼭 그물에 생포당한 채 발버둥치는 짐승처럼 가련해 보였다.

점액질은 곧 회의실에 있던 모든 교관들을 감싼 채 가라앉았다.

“…이곳에 곧 앙신께서 강신하실 겁니다. 배드니커의 가주인 철혈공보다 훨씬 강한 존재지요. 그러니 우리는 그분께 복종하는 게 맞습니다.”

…….

“여기까지, 혹시 이상한 게 있습니까?”

후안의 말에 대답할 이는 남아 있지 않았다.

* * *

“…….”

“…….”

재생이 끝났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상엔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제사장의 정체가 담겨 있었다.

“무예선생이 흑막이었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군.”

카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녀석 기준으로는 그런 모양이다.

나는 딱히 의외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쩐지 처음부터, 무예선생 후안이라는 존재는 내게 껄끄럽게 느껴졌으니까.

웃기지도 않으면서 웃고 다니는 놈들은 높은 확률로 속이 뒤틀렸다는 게 내 지론이다.

“영상은 여기까진가?”

“그런 것 같군.”

이 이후 후안이 어디로 향했는지,

나머지 살아 있는 교관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나와 카론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위층으로 향했다.

“…잠깐만.”

그때 카론이 말했다.

“…위에 있었던 인기척이 움직이고 있다.”

“뭐? 도망치려고 하나?”

“아니. 이쪽으로 오는 중이다.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다……. 벌써 왔-.”

저벅-.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먹에 화기를 둘렀고, 카론은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끼이익-.

그리고 회의실이 문이 열렸다.

“…뭐야. 너희 아직 살아 있었나.”

권태로운 얼굴의 여자.

교의 수녀복을 입은 여자는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대삽범 중 한 명.

교의선생 주니앙.

“…….”

“…….”

물론 나와 카론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 여자는 적인 건가, 아군인 건가.

고민 도중 주니앙이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드니커의 지원이 온 줄 알았더니…….”

“…….”

힐끗 나를 보는 카론을 향해 일단 고개를 끄덕여 줬다.

우리는 전투태세를 풀며 말했다.

“주니앙 교관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 마당에 교관은 무슨… 주니앙이면 돼. 그보다 너희, 혹시 연초 있나?”

“…….”

성직자가 연초를 피워도 되던가?

태양교의 교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영도에게 담배를 찾는 걸 보니, 이 작자도 맛이 간 것 같기는 하다.

“없는데요.”

“그래? 아쉽군.”

“여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후안이 마각을 드러내고, 수렵선생을 저 꼴로 만든 것까지는 봤는데.”

“봤다? 아. 통신 수정을 이용한 건가. 똑똑하군.”

주니앙은 낮은 목소리로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근처에 있던 피투성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미 모두 떠났다. 나는 일 때문에 잠깐 숲에 나가 있었는데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제사장이 교관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나요?”

“악마 놈들의 이목을 피하는 게 특기거든.”

“…….”

주니앙이 교회의 이단심문관이라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다.

악마와의 싸움에 있어선 아마 탄코 이상의 전문가겠지.

“제사장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제단이 있는 곳으로 갈 거다. 마왕을 소환하려면 필요한 도구 중 하나니까.”

제단.

그 단어에 세렌이 떠올랐다.

만약 후안이 잊힌 신의 제단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그곳에서 마왕 강림 의식을 벌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일행은 너희 둘이 전부인가?”

주니앙의 말에 카론이 대답했다.

“바깥에 몇 명 더 있습니다.”

“그래? 혹시 에반 헬빈도 있나?”

“네.”

그 말에 나는 다시 주니앙을 보았다.

여전히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권태로운 얼굴이지만…….

“교관님.”

“주니앙이라 부르라니까.”

“혹시 교의 경전 몇 소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지금 말이야?”

카론이 미친놈처럼 나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여기 오는 길에 악마를 보았는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영도로서 부끄럽지만, 두려움이 전신을 좀먹더군요. 신실한 성직자이신 교관님의 경전을 몇 소절 들을 수 있다면 용기가 북돋아질 것 같습니다.”

주니앙이 귀찮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음… 갑자기 하는 건 좀. 장소도 좀 그렇고.”

피칠갑을 한 회의실을 보며 그리 말하길래, 나는 손으로 합장하듯 기도하며 말했다.

“이런 장소니까 더 해야죠. 아직 사자의 넋을 위로하지도 않으신 듯한데.”

“흐음…….”

“아니면 혹시 이단심문관이셨던 교관님이 경전을 모르는 건 아니겠죠?”

“…….”

그제야 카론도 뭔가를 느꼈는지 딱딱한 얼굴로 주니앙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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