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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88화 (88/172)

88화

주니앙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우리를 본 순간… 카론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난번 나와 싸웠을 때처럼, 간격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둘렀다.

후웅!

단검에서 발생한 검풍이 주니앙을 향해 날아갔지만, 주니앙은 놀라기는커녕 미동조차 없는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카앙!

그러자 거목에도 흠집을 남길 만큼 날카로운 검풍이 무슨 산들바람처럼 스러졌다.

주니앙의 손바닥엔 긁힌 상처조차 없었다.

‘미친 내구도…….’

팔만?

아니면 전신이?

어쨌든 둘이서 맞서긴 힘든 상대인 건 분명하다.

“헥토르!”

바깥까지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외친 다음 나도 전투에 합류했다.

상대는 인간일까?

알 수 없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규정지은 다음 암보를 밟았다.

근데 어째 느낌이 쎄하다.

주니앙의 눈동자가 줄곧 내 얼굴에 머물러 있었던 것.

‘이 여자 무슨 동체 시력이…….’

태양교의 이단심문관.

소수이자 정예인 그들 개개인의 전투력은, 일반적으로 마스터에 근접한 무인 수준이라고 하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나 보다.

탓!

그 순간 주니앙이 지면을 박차며 내 코앞까지 당도했다.

암보의 눈속임이 이렇게까지 효과를 못 본 건 처음이라서, 나도 대응이 살짝 늦었다.

어떻게 공격할 셈이지?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데, 주니앙이 내게 손바닥을 펼치더니 말했다.

“아톤이시여.”

“……!”

태양교 최고신의 이름을 중얼거린 순간, 주니앙의 손바닥에서 성력이 분출됐다.

나는 순간적으로 양팔을 교차시켜 그 에너지탄을 막았지만, 충격을 줄이지는 못했다.

콰장창!

회의실 문을 몸으로 박살 낸 다음, 바깥 지면을 굴렀다.

“루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달려오는 에반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알아보는 중.”

솔직한 대꾸였다.

아직 상대가 적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다른 쪽 벽이 부서지며 카론도 날아왔다.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르던 카론이 벌떡 일어나며 벽 너머를 노려봤다.

“성질 급하기는…….”

뚫린 구멍을 통해 교의선생이 걸어 나왔다.

주니앙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다가, 곧 누군가의 얼굴에서 멈췄다.

“살아 있었군, 에반 헬빈.”

“네?”

접점이 거의 없는 교의선생한테 갑자기 불릴 줄은 몰랐는지, 에반이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녀석들이 퍼뜩 정신을 차린 채, 상대를 포위하는 진형을 구축한다.

물론 그래도 딱히 유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주니앙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난 적이 아니야.”

“…근데 왜 공격했습니까?”

“너희가 먼저 공격했잖아.”

“…….”

그렇긴 해.

먼저 의심한 건 나였지만, 거기서 카론이 미친놈처럼 달려들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교단, 혹은 마왕의 권능 중에 사령술이란 게 존재하며.

단순히 시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타인의 몸뚱이를 빼앗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방금 교의선생은 자신이 교인이 아님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72신의 성력을 사용한 게 그 증거다.

- 오직 세례를 받은 성직자만이 완전한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

이는 태양교의 사제들을 두고 나온 말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암흑교단의 교인은 결코 태양교의 세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가문의 후예만이 받을 수 있는 가호조차, 저주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됐다.

물론 72신이건, 마왕(앙신)이건 선악의 유무를 배제하면 같은 신이고, 가호와 저주조차 단어의 차이일 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니 방금 주니앙이 분출한 신성력은 백 마디 말보다 더욱 그녀의 결백을 증명해 준다.

내가 먼저 전투태세를 푸니, 주변에 있는 녀석들도 슬그머니 긴장을 풀었다.

나는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교의 성직자이신데 왜 경전을 읊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거 몇 줄 읊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러자 주니앙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사람이 잘하는 게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지.”

“예?”

“단순 암기는 내 체질이 아니야.”

“경전인데요?”

“그깟 글귀가 무슨 소용인데.”

그러더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중요한 건 신을 믿는 마음이니라.”

“…….”

부서진 건물을 배경으로 기도하고 있는 그 모습이, 순간적으로 대단히 신성하게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솔직히 방금 보인 모습은 성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의심이 풀렸으면 일단 안에서 얘기할까? 뭐 좀 먹을래?”

* * *

주니앙을 따라 교관 동으로 다시 들어갔다.

우리는 교관 동의 식당, 적당히 넓은 테이블에 앉아서 회의실의 통신 수정을 통해 봤던 영상을 공유했다.

“제사장이라고? 후안 교관이?”

“말도 안 돼.”

“…음.”

헥토르와 에반은 크게 놀랐고.

세렌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받아.”

그때 잠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한 주니앙이 우리를 향해 뭔가를 던졌다.

하나는 수통이고, 하나는…….

“이게 뭡니까?”

“에너지바라고 부르는 거야. 너희도 나중에 정식 영웅이 되면 물리도록 먹게 될 거니 미리 예습하라고.”

“…….”

생긴 걸 보니 무슨 잡곡물을 뭉치고, 굳혀서 만든 것 같은데.

까드득.

아무튼 더럽게 딱딱해서 먹기는 힘들었지만, 배를 채운다는 것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주니앙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살아남은 영도는 너희가 전부야?”

“몇 명 더 있습니다.”

“그렇군.”

맛대가리 없는 에너지바를 잘도 씹어 넘긴 카론이 물었다.

“다른 교관님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거나 제압당했지.”

“누구한테 말입니까?”

“후안 선생. 이제는 제사장이라 불러야 하나?”

“…제사장.”

나는 표정이 굳은 헥토르를 향해 물어봤다.

“형님, 무예선생에 대해 뭐 아는 거 없어? 대사범이 되기 전의 행적이라거나.”

이쯤 되면 대체 뭐 하던 양반이었는지 궁금하다.

제사장씩이나 되는 존재가 본가의 대사범 직책을 차지하는데, 진짜 아무도 몰랐을까 하는 의문도 있고.

“후안 선생은 남부 명문가인 바스케스 가문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무예 전반에 천부적인 자질을 보였고, 그 우수함을 바탕으로 최연소로 제3황실기사단에 입단하여 서른 살엔 단장의 위치까지 올랐다. 이후로는 황실 사범 제안까지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우리 가문의 대사범으로 오게 됐지.”

“음…….”

명문가 출신에 황실기사단 경력까지.

이 정도 내력이라면 의심하는 게 오히려 무례할 지경이다.

연도만 보면 교단과 접점이 생길 틈도 없어 보이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에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어떡하죠?”

“…….”

그러자 주니앙이 에반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뚫어지게.

‘그러고 보니…….’

주니앙은 쭉 에반을 의식하고 있었다.

에반이 슬슬 부담감을 느낄 때쯤, 주니앙이 시선을 떼며 말했다.

“나비의 숲에 형성된 결계 때문에 외부의 개입은 당분간 기대할 수 없겠지…….”

“…….”

“…라고, 일반적으로는 그리 생각할 테지만 어쩐지 구린내가 난단 말이야.”

“구린내요?”

“아무리 대마법사의 결계가 있다고 해도 말이야. 이만한 사건이 터졌는데 배드니커가 모르는 게 맞는 걸까?”

“…….”

날카롭다.

논리적인 사고가 우수하다기보다는 직관력이 대단히 뛰어난 느낌이랄까.

헥토르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지금 배드니커가 이 사태를 묵인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난 그냥 의아하다고 말한 것뿐이야. 높으신 양반들의 사정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

“적들 사이에 고립된 데다 외부의 지원마저 기대할 수 없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헛된 희망은 집어치우고 가진 수단만으로 전략을 짜야 해.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살아 있는 자들만으로 제사장을 죽이는 거겠지.”

세렌이 특유의 투명한 눈동자로 주니앙을 보며 물었다.

“…교관님들마저 아무것도 못 하고 몰살당하지 않았습니까. 영도인 우리가 뭘 할 수 있단 거죠?”

“그건 제사장이 죽인 게 아니야. 마왕이 개입할 여지를 준 거지.”

“무슨 뜻입니까?”

주니앙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너희도 통신 수정의 영상은 봤을 거 아냐? 제사장이 말했지. 무지란 곧 비극이라고. 거기 있는 자들은 의식이 시작한 시점에 제사장을 공격했어. 그 때문에 마왕이 개입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러니 우리는 그 이외의 방법으로 의식을 망치면 돼. 그럼 분노한 마왕이 제사장을 죽일 거야.”

속사포처럼 쏟아진 말.

‘마왕이 제사장을 죽인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나도 잘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주니앙은 이단심문관이다.

교단에 대해선 현역 영웅 이상으로 정확히 꿰고 있는 자들.

“의식을 어떻게 망치면 되나요?”

“제물을 강탈하거나, 이 숲의 마나를 흩뜨려 놓는다거나, 제단을 부순다거나……. 어떤 형태로건 의식을 진행할 수 없게 깽판을 치면 돼.”

“음…….”

“물론, 이건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고……. 다른 방도가 있을지도 모르니 좀 더 머리를 굴려 봐야겠지.”

주니앙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쉬고 있어라. 그리고 루안 배드니커?”

“네.”

“넌 잠깐 나 좀 보자.”

나 혼자?

내가 스스로를 가리키니, 주니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2층까지 올라간 주니앙은 어느 방으로 들어갔는데, 내부 구조를 보니 아마 개인실인 모양이다.

“저한테 하실 말이라도 있어요?”

“그래. 일단 묻겠는데, 네가 저 녀석들의 리더 맞지?”

솔직히 말하면 회피하고 싶은 주제였지만, 마땅히 대체할 인물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흠.”

주니앙이 애매한 반응을 보이더니,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뭔가 싶더니 파이프 담배였다.

주니앙은 같이 꺼낸 담뱃잎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에반 헬빈 말인데.”

다시 에반의 이름이 나왔다.

어쩐지 이 자리에 나를 부른 이유도 그 녀석과 연관됐을 거란 생각이 든다.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어?”

“딱히 없었는데요.”

레이븐을 자체 봉인해서 마물 상대로 쩔쩔매긴 했지만.

주니앙이 묻는 건 그런 종류가 아닐 것 같다.

“왜 그리 에반에게 집착하는 겁니까?”

“흠. 눈치챘나.”

“처음부터 계속 의식하시던데, 그걸 못 깨달으면 등신이죠.”

“그렇군. 그런데 집착하는 건 내가 아냐. 제사장이지.”

“네?”

그때 주니앙이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뭔가 싶더니, 불을 지필 성냥이 없는 것 같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이리 줘 봐요.”

나는 엄지손가락에 화기를 집중시켜서 담뱃잎에 불을 붙여 줬다.

“오… 제법인데.”

“별말씀을.”

뻐끔.

주니앙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피우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 마왕 소환엔 여러모로 의아한 점이 많아. 그중에서도 가장 납득이 안 되는 건 제물의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지.”

주니앙이 벽에 기댄 채로 창밖 너머, 차갑고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마왕… 교단의 말을 빌리자면 앙신은 아주 까다로운 신이야. 교단의 지보인 [악의 경전]은 한번 외기 시작하면 반드시 끝마쳐야 하고, 한 구절이라도 실수하면 육체가 변이하거나 목숨을 잃지.”

“음…….”

“그러니 녀석들도 의식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진행해. 한번 시작한 의식을 실패로 돌아가면, 의식을 진행한 모든 교도가 처벌당하니까.”

흥미로운 지식이긴 하지만…….

이게 에반과 무슨 관계가 있단 걸까.

“그런데 그러한 페널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있어. 의식을 망쳐도 처벌받지 않고, 별다른 조건 없이 마왕과 소통할 수 있으며, 여섯 마왕 모두의 총애를 받는 존재. 제국 최악의 적이자 악의 화신化身.”

나는 주니앙이 말하는 게 누군지 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 있지만, 모순적으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베일에 싸인 존재.

“암흑교주.”

“맞아. 교주가 직접 주관하는 의식은 그 난도가 훨씬 낮아져. 제물의 수도 줄고, 경전을 끝까지 외울 필요도 없지.”

“설마 이곳에 교주가 와 있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하지만 이 의식에 제물의 수가 부족한 건 분명해. 그리고 나는 제사장의 지시를 엿들었지.”

“뭐라고요.”

“의식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소교주님을 확보해야 한다고.”

그 순간 나는, 전생의 에반 헬빈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에반 헬빈의 타락은 인류에게 가장 뼈아픈 배신이었다고.

그런데 사실 배신이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에반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라면…….

후우-.

독한 연기를 내뱉은 주니앙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 헬빈. 그 녀석이 제사장이 찾는 소교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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