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암흑교단에 소교주란 직책도 있었어요?”
전생에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단어였기 때문에 우선 물어봤다.
“교주만큼이나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존재한다는 건 확인됐지.”
“…그럼 에반이 소교주인 건 확실한 겁니까?”
“교주는 암흑교단에 있어서도 불가침의 직책이야. 제사장씩이나 되는 존재가 허언할 리는 없어. 우리로 치면 신을 사칭하는 거나 다를 바 없으니까.”
그렇긴 한데…….
“…에반이 소교주라면, 그 아버지인 도즈 헬빈 경이 교주란 뜻입니까?”
“에반 영도의 출생에 관해선 몰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교단의 사술은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무슨 뜻이죠.”
“간헐유전間歇遺傳이라는 말 알아?”
“아뇨.”
“간단히 말하면 조상의 유전자가 몇 세대를 걸친 뒤에 발현하는 거야. 네 아버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겠지.”
철혈공?
“가주께선 형제에 비해 특히 흑요정의 특징이 두드러지잖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흑교주는 최소 수백 년을 산 노괴물이고 그 정체는 아무도 몰라. 그런 괴물이 몇백 년 전 뿌렸던 씨앗이 현시점에서 개화할 줄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수백 년 전 흑교주란 양반이 정체를 감춘 채 가문의 조상과 관계를 맺었을 수도 있었단 건가?
나는 주니앙의 말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거참. 위대한 가문의 혈통주의자들이 들으면 뒤집어질 말씀을.”
“쉬쉬할 뿐이지 누구나 그 가능성에 대해선 염두하고 있어.”
“…….”
나는 잠깐의 간격을 두며 물었다.
“에반을 죽이실 셈입니까?”
주니앙이 나를 보았다.
반쯤 감은 눈동자에선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소교주가 없으면 의식은 실패하고, 우리가 뭐 할 필요도 없이 제사장은 마왕한테 찢겨 죽을 거야. 지금이라도 이 난리를 수습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 아닐까.”
“만약 에반이 소교주가 아니라면.”
“그 녀석을 변호하는 건가?”
“…….”
“그건 아니겠지. 내 말을 들었을 때 넌 놀라지 않았어. 너도 나름대로 에반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단심문관의 주된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심문審問이다.
즉 이들은 악마 사냥이 아니라, 심리전의 대가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책임은 전부 내가 질 거야. 너한테 이 얘기를 해주는 이유는 단순해.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확인 작업일 뿐이지.”
“그렇다고 해도 곧장 죽이는 건 너무 섣부르잖아요.”
주니앙이 나를 보며 물었다.
“너 말이야. 가호는 몇 개 받았어?”
“한 개요.”
“흠.”
그러자 주니앙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섣부르다고 했지? 꼭 그렇지도 않아. 네겐 더욱이.”
뭔 개소리야?
그 순간이다.
별안간 코에서 뜨뜻미지근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
본능적으로 손으로 닦으니 핏물이었다.
“어-.”
그리고 현기증.
순간적으로 쓰러질 뻔해서 벽에 손을 기댔다.
“슬슬 반응이 오나 보군. 하긴. 가호가 단 하나라면 여태껏 버틴 것도 용한 수준이야.”
“뭔 소리를…….”
“4단계에 접어들면 마왕의 악기가 전역에 배포된다. 그리고 내성, 즉 항마력이 낮은 자들부터 영향을 받지.”
“…항마력?”
“가호를 말하는 거야.”
주니앙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가호가 적은 녀석부터 죽는다. 가호가 하나밖에 없는 넌 가장 첫 순서가 되는 셈이지.”
후우-.
주니앙이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간단하게 생각해.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뿐이야. 어려울 거 없잖아?”
“…음.”
과연 그럴까?
나는 주니앙의 말에 거부감이 생겼다.
단순한 반발심 때문은 아니고, 어쩐지 놓치는 게 있는 기분.
나는 현기증이 멎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상태가 좀 나아진 뒤 입을 열었다.
“제 목숨은 얼마나 남았어요?”
“…….”
그러자 주니앙이 잠깐 나를 보았다.
여전히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이지만,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글쎄. 변이엔 개인차가 있지만, 코피가 났다면 일반적으로 대여섯 시간 내로 죽을 거야.”
한나절 정도인가.
나는 주니앙을 보았다.
‘오직 세례를 받은 성직자만이 완전한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여자도 나를 납득시키기 위해 많은 정보를 공유했다.
그렇다면 나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겠지.
“루크 배드니커가 수련회에 잠입해 있습니다.”
“루크? 철혈기사단의 단장 말이야?”
“네.”
“그 사람이 수련회에 잠입했다고? 그보다 그 사실을 네가 어떻게-.”
“아사드 님에게 직접 들었어요.”
“으음…….”
의심 섞인 눈빛.
나는 어쩔 수 없이 중지를 치켜세워서 반지를 보여 줬다.
“갑자기 나한테 엿을 날리고 싶어진 건 아닐 테고.”
“당연하죠. 반지를 보세요. 가주님한테 받은 마도구입니다.”
“반지라…….”
주니앙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확실히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하네.”
“그쵸?”
“게다가 듣고 보니 짚이는 사람도 있고.”
짚이는 사람?
“기사 교관 중 한 명의 실력이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어. 수준을 알고 싶어서 계속 관찰했는데도 허탕만 쳤지.”
“그게 누굽니까?”
“크루라는 이름의 기사야.”
“크루…….”
거꾸로 하면 루크…….
…저딴 게, 가명?
“그 사람, 죽은 건 아니죠?”
“너도 수정을 봤을 거 아냐? 사태가 터지기 전에 기사들이 순찰을 나갔어. 물론 제사장이 그들을 죽였다고는 했지만… 전부는 아닐 수도 있겠지.”
“루크 단장님이 살아 있고, 그분이 참전한다면요?”
“…….”
주니앙이 뜻밖에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말했다.
“마왕의 신벌엔 수렵선생조차 반응하지 못하고 일격에 죽어 버렸지만……. 철혈 단장이라면 버틸 수도 있겠지. 그사이 다른 별동대가 제사장을 공격한다면-.”
“…….”
“승산이 두 배… 아니, 세 배는 올라가겠지.”
주니앙이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희박한 확률이야. 에반 헬빈을 죽이는 게 훨씬 편한 길이라고.”
“사람이 편한 길만 찾다간 언제 한번 크게 데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에반이 소교주인 게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
주니앙이 나를 보았다.
그냥 무시할지, 나를 설득할지 고민하는 모양새다.
“…여섯 시간.”
“네?”
“여섯 시간 동안 에반의 결백을 증명해. 그러지 못한다면 네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그냥 죽일 거야.”
사실 교관인 주니앙이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해 준 거다.
나는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그럼 일단은 루크 단장님과 합류하는 게 우선이겠죠?”
“그래. 통신 수정에 기록된 대로라면 그자가 향한 곳은 A-3구역이겠지. 우선은 거기로 가 보자.”
“알겠습니다.”
얘기가 끝났나 싶어 방을 나가려는데, 불현듯 주니앙이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루안 배드니커, 이단심문관이 될 생각은 없나?”
“…갑자기요?”
“지난번 수업 때도 내 앞에 섰잖아. 이쪽에 관심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선택 과목 시간 때 그런 일도 있었지.
기억하고 있었구나.
“없지는 않은데… 갑자기 왜 그런 제안을.”
“여긴 항상 인력난이야. 너 같은 인재가 오면 대환영이지.”
“저 같은 인재라뇨.”
그래도 주니앙이 나를 좋게 봤나 싶어서 기분이 살짝 좋아졌는데, 주니앙이 갑자기 검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그걸 관자놀이 근처에서 빙빙 돌리는…….
“맛이 간 놈 말이야.”
“…….”
안 가, 시발.
* * *
주니앙은 방에서 준비해야 할 게 있다고 해서, 일단은 나 혼자 1층으로 내려왔다.
내가 내려오자마자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는데, 꼴을 보니 이 어색한 녀석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헥토르가 물었다.
“왔군. 무슨 얘기를 나눴지?”
“앞으로 어떡할지에 대해서 상의 좀 했지.”
“그건 여기서 해도 될 얘기 아니었나?”
그렇긴 해.
‘날카로운 놈’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생각하는데, 적절하게 세렌이 화제를 바꿔 줬다.
“그래서 결론은 나왔어?”
“일단 조력자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쪽으로 이동하기로 했어.”
“조력자? 누구?”
“루크 배드니커.”
그 말에 헥토르가 깜짝 놀랐다.
“단장님이 여기 계신다고? 확실한가?”
“몰라. 나도 들은 거니까.”
“누구한테?”
“교의선생.”
물론 루크의 소재를 알고 있었던 건 나지만, 일단 주니앙과는 그런 식으로 얘기를 맞췄다.
- 왜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 제 입보단 교관님 입에서 나온 게 좀 더 신빙성이 높잖아요.
- 하긴.
다행히 주니앙은 내 변명에 납득해 줬고.
역시라고 할까, 이 녀석들도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단장님이 여기 계신다니……. 그분이 합류한다면 제사장 따위는 문제가 안 될 거다.”
헥토르가 오랜만에 밝아진 얼굴로 말했고, 다른 녀석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철혈기사단장 루크의 명성은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하신가 보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잠시 에반을 보았다.
첫 만남 때부터 쭉 주시하고 있었던 녀석이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말 교단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녀석인지.
아니면 내가 간파할 수 없을 만큼 내숭을 잘 떠는 녀석인지 말이다.
“에반, 컨디션은 어때?”
“나쁘지는 않아.”
에반이 쓰게 웃었다.
“좋지도 않지만.”
“그러냐.”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무리만 말라고. 얼굴이 반쪽이다.”
“응. 고마워.”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카론이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뭐.’
내가 입 모양으로 말하니 슬쩍 고개가 돌아간다.
뭐야?
* * *
교의선생이 내려온 직후, 우리는 곧바로 A-3구역으로 향했다.
지도로 확인하니 공터에서 상당히 가까웠다.
물론 숲엔 악마가 득실거렸기 때문에, 평소라면 10분이면 갈 거리도 한 시간이나 걸렸지만.
‘…으음.’
그리고 나는 실시간으로 컨디션이 떨어지는 걸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염화제일공을 배운 이후, 나는 태양의 상태에 따라 컨디션에 영향을 받았는데…….
지금 상태는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에 일주일은 처박혀 있었을 때와 비슷하다.
“얼굴이 똥빛이네.”
그 까칠하던 세렌이 걱정해 줄 정도니, 내 안색이 어떤지는 말 안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게. 뭘 잘못 먹었나.”
“확실히 그 에너지바는 더럽게 맛없긴 했지.”
힘들긴 했지만, 아직 못 걸을 정도는 아니라서 뒤처지지는 않았고…….
우리는 마침내 A-3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건…….”
“음.”
도착한 즉시 기사의 시체 한 구가 우리를 반겨 줬다.
확인해 보니 시체는 크게 훼손되어 있지 않고 몸뚱이엔 구멍이 딱 하나만 뚫린 상태.
아무래도 수렵선생과 같은 사인 같다.
“…일단은 주변을 좀 찾아봐야겠는걸. 이 근처엔 악마가 없는 것 같으니까 흩어져서 수색하자.”
주니앙의 지시에 우리는 각자 흩어져서 수색을 시작했다.
사박-.
나는 9시 방향으로 향했는데, 얼마 걷지 않아서 또 하나의 시체를 발견했다.
차게 식은 시체의 사인은 앞선 자들과 같았지만, 이 기사의 구멍은 이마 한가운데에 나 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 상처를 눈에 담았다.
‘막을 수 있을까?’
배드니커의 기사와 수렵선생조차 반응하지 못한 일격.
그래도 나는 이게 마왕의 신벌이란 걸 알고 있다.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크니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틀렸을 때의 대가가 목숨이다 보니 나도 신중해진다.
‘직접 한번 보면 확실히 감이 올 텐데.’
통신 수정에 남은 영상으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후로도 나는 몇 구의 시체를 더 발견했지만, 딱히 건질 건 없었다.
오히려 불안감만 커지는 상황.
‘설마 루크도 죽은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나는 상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뭐냐?”
사박-.
죽은 풀을 밟으며 세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는 녀석의 기척이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조금 의아하다.
이 녀석은 나랑 정반대 방향으로 갔을 텐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에반 헬빈과는 절친한 사인가?”
“뭐?”
뜬금없는 질문이다.
내가 인상을 찌푸린 채 노려보니, 세렌이 말했다.
“카론이 말해 주더라.”
“뭘.”
“너와 교의선생이 위층에서 나눴던 얘기.”
“…그 녀석이? 엿들은 건가?”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카론은 편복蝙蝠의 가호란 게 있다더군.”
편복… 박쥐?
확실히 청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동물이라고는 하던데.
설마 그딴 가호도 있을 줄이야.
나는 세렌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에반 헬빈은 소교주가 맞을 거야. 난 거의 확신해.”
“거의 확신이라는 말은 없어.”
“장난칠 때가 아니잖아.”
세렌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악마 사냥에 한해서만큼은 이단심문관의 말을 따라야 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난 에반 헬빈을 죽이자는 의견에 찬성이야. 그러니까… 네가 만약 그걸 반기지 않는다면 나서지 않아도 돼.”
세렌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말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