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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90화 (90/172)

90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엿들은 거 아니냐?”

“맞아.”

“그럼 잠자코 있어. 에반의 처우를 결정하는 건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이제 다섯 시간인가?

하여튼.

그런데 세렌이 내 뜻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이리 말했다.

“아는 사이라서 껄끄러운 거야? 아니면 의외로 살인에 거부감이라도 있는 건가.”

“늘 가져야 하는 것이지.”

세상에 죽어야 할 놈들이 많다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가볍게 여기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세렌이 답답하단 듯이 나를 노려봤다.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교의선생은 여섯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네가 거기까지 버틸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어.”

“날 위해서 죽이시겠다? 이거 눈물 나는데.”

까득.

세렌이 이를 갈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거야? 이대로라면 넌 죽어. 목숨이 위협받는데도 잠자코 죽을 생각인가?”

“잠자코 죽을 생각 없어. 그리고 전제가 엉망진창이잖아. 에반이 확실히 언제 날 죽이겠다고 군 적 있어? 내가 보기에 맛이 간 건 너희들 머리야.”

그제야 세렌은 내 저의를 이해한 듯했다.

“…넌 결국 에반 헬빈을 죽이지 않겠다는 거군.”

그리고 세렌은,

의외라고 해야 할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더 우기거나, 나를 설득하려 들 줄 알았는데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렇게 순순히 내 의견을 존중할 녀석이 아니다.

‘아니, 잠깐만.’

설마?

불현듯 스친 생각에 내가 세렌을 지나치려고 한 순간이다.

이 녀석이 나를 막았다.

세렌이 나를 막아섰다.

“안 비키냐?”

“교의선생의 지시를 따라. 우린 여기 조력자의 흔적을 찾으러 온 거잖아.”

“그사이 나머지 녀석들이 에반을 죽이고?”

“…….”

역시나.

“놀라운데. 나 빼고 다 찬성한 거야?”

“헥토르는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동의하더군.”

“…….”

“안색만 봐도 알아. 지금의 넌 날 못 이겨.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라. 뭣하면 좀 쉬어도 좋으니까.”

“실수한 거야.”

“뭐?”

나는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내 안의 반골 정신이 깨어나 버리잖아.”

* * *

으레 그 나이대의 소년이 그렇듯, 에반 헬빈은 한때 기사에도 선망을 품었다.

기사는 에반의 꿈이었다.

영웅이란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영웅을 목표로 한 이후에도 기사들을 안 좋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름 아닌 에반의 부친이 기사였기 때문이다.

“…….”

에반은 이름 모를 기사의 눈을 감겨 줬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기사의 얼굴엔 고통이나 두려움이란 흔적은 없었다.

이 기사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죽은 것이다.

그걸 행운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에반은 두려움에 얼룩진 팜의 얼굴을 떠올리며 의문을 느꼈다.

“후우…….”

볼살을 에는 듯한 추위.

에반은 입김을 토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찰대의 참가는 에반에게 있어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솔직히 스스로도 정확한 까닭을 말할 수 없을 정도.

그렇지만.

어쩐지 거기서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는 건 에반을 비참한 심정으로 만들었다.

남은 자들에겐 실례되는 생각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합류한 이후, 비로소 에반은 자신의 진짜 열망을 알게 됐다.

숲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헥토르.

길잡이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카론.

악마 열댓 마리를 단번에 쓸어버린 세렌.

그리고 루안 배드니커.

…에반은 단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 쟁쟁한 영도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서, 자신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에반 헬빈.”

에반은 문득 들린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소리조차 없이, 뒤쪽엔 교의선생이 서 있었다.

분명 흩어져서 수색하기로 하지 않았나?

“암흑교단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지?”

그리고 주니앙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교단이요?”

“그래.”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잔말 말고 대답이나 해.”

에반은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영웅, 나아가서는 제국의 주적이 아닙니까?”

“끝인가.”

“음… 죄송합니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좀 더 교단에 대해서 공부를-.”

“제사장이 널 보고 소교주라고 하더군.”

에반이 멍청하게 두 눈을 깜박거렸다.

“소교주요?”

“그래. 교주의 핏줄을 이은 자를 그리 말하지.”

“어…….”

“그 사실을 인정하나?”

“자, 잠깐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에반은 말을 멈췄다.

교의선생의 양측에서 카론과 헥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교의선생과 비슷한 눈동자로 이쪽을 보았다.

의혹과 의심, 적대심.

그리고-.

“…….”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눈빛에 많은 것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에반은 깨달았다.

이들은 에반의 변명이나 듣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결백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면 이들에게 무슨 말을 지껄이건 의미가 없다.

두근-.

뛰지도 않았는데 호흡이 가빠진다.

순간적으로 추위도 잊을 만큼의 열기가 목구멍에서부터 치솟았다.

분노, 당혹, 슬픔, 억울함이란 감정이 복합적으로 몰려왔다.

그러한 감정 뭉치는 곧 에반으로 하여금 무의미한 행동을 하게끔 만들었다.

“아, 아니에요. 전 교단이, 소교주 같은 게-.”

소용없단 걸 알면서도 결백을 주장.

그 순간 카론과 헥토르가 동시에 덮쳐왔다.

스릉!

에반이 급히 검을 뽑아서 대응했지만, 애초에 일대일로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인재들이다.

몇 합 제대로 겨루지도 못한 채 에반의 검이 튕겨 날아갔다.

“…….”

털썩.

에반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에반이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분노나 억울함보다도 허무함이었다.

에반은 이 두 명의 영도와 모두 대련한 적이 있다.

그때도 수준 차이는 절감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런 생각도 있었다.

진짜 실전이라면 다를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쉽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겨룬 순간 깨달았다.

이 둘은 실전 경험조차 에반보다 훨씬 풍부했다.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은 에반을 향해 주니앙이 다가왔다.

“교인의 술법 중 가장 악랄한 걸 알려 줄까.”

“…네?”

“부분적으로 기억을 숨기는 거야.”

주니앙이 검지로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쉽게 설명해 줄까? 가령 교인이 ‘교인으로서의 모든 기억’을 숨기면 어떻게 될까? 기억의 공백으로 혼란스러워할까? 아니면 정신이 망가질까?”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주니앙은 자문자답했다.

“둘 다 틀렸어. 전혀 다른 인격이 되더군.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교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끔한 인격이.”

“그게… 무슨…….”

“루안 배드니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난 이미 네가 교인이라는 증거를 찾았어. 언제가 됐든 교인은 봉인된 기억을 풀어야 하니까, 그 매개체를 품고 다니지. 물론 이 수련회엔 대부분의 마도구를 지참할 수 없지.”

주니앙이 약간의 침묵 후 말했다.

“무기를 빼고는 말이야.”

그리고 튕겨 날아간 에반의 검을 쥔 다음, 그 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마치 먼지를 걷어내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성력을 주입한 것이다.

파지직!

그 순간 검에서 검은색 스파크가 튀며 검날에 문자를 만들어 냈다.

백색의 검은 순식간에 시꺼먼 색으로 물든 채 불길한 기운을 토해 냈다.

“악마어는 몰라도 교단의 악기는 느낄 수 있겠지, 에반 헬빈.”

“…이럴 리가.”

“이 검은 어디서 얻은 거야?”

“검…….”

저 검을 어디서 얻었지?

에반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 기억이… 기억이 나지 않습-…….”

주니앙은 그 광경을 보며 두 눈을 감았다.

‘…아톤이시여.’

이단심문관 시절 몇 번이고 보았던 광경이었지만, 이 순간마다 그녀는 신을 부르짖었다.

차라리 목숨을 걸고 악마와 싸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건 꼭 죄 없는 인간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 같다.

그렇기에 주니앙은 교단을 증오한다.

“루안 배드니커가 곧 죽어.”

“…….”

그 말에 에반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제 다섯 시간 정도 남았어. 나는 너를 여전히 교인으로 생각하지만, 지금 네가 보이는 태도를 어느 정도는 믿으마.”

“…무슨 뜻입니까.”

“영웅으로 죽어라.”

“…….”

주니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정말 에반 헬빈이라면, 그 만들어진 인격에 애착이 있다면 순순히 숙청을 받아들여라. 네가 교인이었다는 사실은 묻힐 거야. 에반은 물론이고 헬빈가의 명예도 지켜지겠지.”

“…….”

“이것은 에반 헬빈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하는 제안이다.”

교의선생이 검을 던졌다.

챙그르르… 검에서 생기던 검은 스파크가 사라지고, 문자 또한 자취를 감췄다.

“…….”

에반은 두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버지의 얼굴이다.

아들이 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뻔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겠지.

‘…이런 생각조차, 만들어진 것이란 뜻일까?’

푸흐흐.

에반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의 에반은 여전히 영웅을 선망하고, 교단을 증오한다.

그리 생각하니, 자신의 선택지는 애초부터 하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반이 다시 눈을 떴다.

어쩐지 차가워진 머리로 셋을 보니, 이제야 그 진면목이 보였다.

교의선생도, 헥토르도, 카론도.

모두 필사적이었다.

살고 싶어서,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발버둥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이곳에 없는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영웅이라는 꿈을 가지게 됐을 때.

에반은 때때로 자신의 죽음을 그려 보았다.

그중 가장 극적인 건 역시 동료를 대신해서 죽는 것이었다.

동화에 나왔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익살스러운 일이다.

지금 에반은 동료를 위해 죽으려고 하지만, 그 행위에 명예로움이란 없었다.

“교관님.”

“말해.”

“방금 하신 말씀, 꼭 지켜 주십시오.”

주니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께 맹세코, 반드시.”

에반이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검은 여전히 꺼림칙한 어둠을 발산하고 있었다.

‘…영웅이 되고 싶었는데.’

푹.

그리고 역수로 쥔 검이 심장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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