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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91화 (91/172)

91화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나는 케이프 깃을 올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고 상대를 바라봤다.

세렌이 나를 보며 물었다.

“진짜 나랑 싸우려고?”

“안 비킬 거잖아. 그럼 싸워야지.”

“…후.”

세렌이 낮은 목소리를 흘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세를 취했고.

나도 서서히 예열하듯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세렌과 붙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이 녀석, 대련 시간에 헥토르를 꺾었다지.’

그렇다면 대인전 능력만큼은 카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탐색전부터 하고 싶지만…….

여러모로 시간을 끌어선 안 되는 처지라, 내가 먼저 선공에 나섰다.

탓.

세렌도 즉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은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휘광을 두른 손톱이 자라나 있었다.

‘은월의 가호… 진심이구만.’

예기가 심상치 않다.

지금 내 내공으로 저 손톱과 정면으로 겨루는 건 어려울 것이다…라고,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까앙!

“……!”

나는 화기를 두른 주먹으로 세렌의 손톱을 후려쳤다.

밀려난 건 오히려 세렌이었다.

뭘 숨기랴, 영옥 덕분이다.

세렌의 내상을 치료하며 영옥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흡수한 덕분에, 지금 내 내공 수준은 그때의 세 배다.

내력 면에선 내가 압도하는 상황.

세렌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 테지만, 물러서지 않은 채 근거리에서 나와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는다.

‘…이상한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어렵지 않게 세렌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우습게 본 건 아니고 나도 수련회에서 얻은 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세렌이 보이는 전투력은 내 예상을 가볍게 넘어섰다.

일취월장조차 아니다.

이 녀석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성장해 있었다.

이것도 세렌의 비밀과 연관이 있는 건가?

빠악!

세렌의 손등이 내 뺨을 후려쳤다.

얼얼한 고통을 느끼며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 지금 내 전력은 평소 절반 이하다.

둘. 세렌은 지금 날 상대로 적당히 싸우고 있다.

“…….”

무인이란 왜 이렇게 멍청한 족속인 건지.

상대가 봐줬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다.

물론 나도 세렌을 죽일 만큼의 공격은 자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걸 셋째 사형이 뭐라고 했더라.

‘내로남불?’

파파팍!

쓸데없는 생각을 한 대가로 몸뚱이에 작은 상처가 생겨났다.

은월의 가호에 대해서라면 안다.

미래의 영웅 실버문의 주력이며, 신수 은호銀狐의 힘을 몸뚱이에 강림시키는 가호다.

‘그러고 보니…….’

보석 산맥에서 아르잔이 보였던 모습도 지금의 세렌과 흡사했다.

아르잔도 가호를 지녔던 걸까?

탓.

그 순간 세렌이 갑자기 물러났다.

그리고 무슨 괴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날 봤다.

“…너 지금 컨디션 엉망인 거 아니었어?”

“맞아. 지금 전력의 절반도 안 나와.”

“절반.”

세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나는 얼굴의 핏물을 닦았다.

치명상은 없지만, 상태가 엉망이라 그런지 피 좀 쏟았다고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게 세렌이 노리는 걸 수도 있겠는데…….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안다.

알지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굿스프링의 명령인가?”

“뭐?”

“가문에서 에반에 대한 걸 미리 들었고 그 녀석을 죽이기 위해 수련회에 잠입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네가 보인 태도들이 어느 정도 납득 가는데.”

“큭큭.”

세렌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추측이야. 그런데 한 가지 고려하지 않은 게 있군.”

“뭔데.”

“내가 굿스프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세렌이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 굿스프링의 혈통은 대단히 강해. 신기하게도 이 가문의 피가 섞이게 되면 어떤 혈통을 지녔든 간에 똑같은 특징을 가진 채 태어나지.”

나는 굿스프링과 접점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 가문의 가주만큼은 한 번 본 적이 있다.

하템 굿스프링.

햇살을 녹인 듯한 따스한 금발과 해수처럼 짙푸른 눈동자.

철혈공과 나란히 선 모습이 너무나 대비돼서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

나는 세렌을 보았다.

내 경우에도 일반적인 배드니커와는 생김새가 다른 편이지만, 그래도 흑요정 특유의 자색 눈동자만큼은 물려받았다.

반면 세렌은 기억 속 하템과 접점이 전혀 없었다.

“굿스프링 역사상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더라. 그래서 가문에선 날 배드니커만큼이나 싫어해. 태어난 순간부터 날 마녀로 여겼으니까.”

“의외로군. 굿스프링은 배드니커랑 정반대되는 곳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라면?”

“그 이름처럼, 따뜻한 봄날 같은 곳일 줄 알았지.”

내 말에 세렌은 마침내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대부분 의도하지 않은 말이 웃음을 자아내면 불쾌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비웃음이란 생각이 드니까.

그런데 세렌의 웃음은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분명 폭소를 터뜨리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느껴졌다.

웃음을 멈춘 세렌은, 그러나 여전히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했다.

“늘 봄과 같은 삶만 계속될 순 없어. 언젠가 반드시 살을 에는 추위를 직면하게 되지. 그래서 난 봄이 싫다. 그 노곤함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들고, 혹독함을 잊게 만드니까. 겨울은 시리지만 현실을 일깨워 주지. 굿스프링의 명령?”

세렌이 중지를 치켜세웠다.

“엿이나 먹으라지. 그딴 게 있었다면 내가 제일 처음 망쳤을 거야.”

“그럼 왜 에반을 죽이려는 건데. 단순히 죽기 싫어서인가?”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일 녀석은 아니다.

“…암흑교단의 소교주를 죽인다면 그 공은 아마 황제가 직접 치하해 주실 거야. 가문의 높으신 양반들이 넙죽 절할 만큼 대단한 업적이지.”

세렌이 입가를 비틀었다.

“네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어. 난 가문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로 여기 있는 거니까.”

“굿스프링에게 인정받고 싶은 건가.”

“인정은 개뿔. 난 그냥 가문이 ‘세렌’을 다시 보고 싶게 만들고 싶은 것뿐이야.”

“뭐?”

“…….”

세렌의 말투가 좀 이상해서 물으니, 이 녀석이 아차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말은 여기까지 하자고. 너도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닐 텐데?”

“그렇긴 하지.”

나는 세렌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녀석이 직접 말한 것처럼 가문을 증오할 뿐인 건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혈연이란 질기다.

가문을 잊고 살아라…….

말은 쉽지, 태어난 장소와 완전히 결별하는 건 무척 어렵다.

나는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해결볍도 알고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가문보다 더 소중한 장소를 찾으면 되니까.

나는 찾았다.

죽은 이후기는 했지만, 이 녀석의 말을 빌리면 인생에 봄날이 온 것이다.

반대로 세렌은 잘 풀리지 않는 듯했다.

“…….”

위로라도 해야 하나?

그건 아닌 것 같다.

내 어설픈 말솜씨를 떠나서, 어쩐지 위로라는 행위 자체가 세렌을 모욕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은 봄에 동경을 품고 있는 것만큼 겨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섣부른 동정은 모욕밖에 안 된다.

그러니 결론은 단순했다.

그냥 싸우면 된다.

서로 만족할 때까지 말이다.

콰아아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폭발 비슷한 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막 서로에게 달려들려던 나와 세렌은 동시에 동작을 멈춘 채 그쪽을 보았다.

소름 끼치는 기운이 폭사됐단 게 피부로 느껴졌다.

“저건…….”

“…악기?”

멍하니 바라보던 세렌의 얼굴에 조급함이 피어났다.

“설마…….”

세렌이 어금니를 물더니, 그쪽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나도 더 싸울 때가 아니란 건 본능적으로 깨달아서,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쫓았다.

* * *

악기가 느껴진 곳은 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었다.

세렌과 함께 내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 펼쳐진 광경을 순차적으로 눈에 담았다.

쓰러져 있는 헥토르와 카론.

피투성이가 된 교의선생 주니앙.

그리고…….

“…에반?”

[…….]

에반으로 보이는 존재가 중앙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물론 내 기억 속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피부가 흑빛이었고 눈은 까뒤집힌 상태.

의술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딱 봐도 정상이 아니란 것쯤은 알겠다.

“쿨럭…….”

교의선생이 피를 뱉었다.

세렌이 급히 다가가 부축하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실패한 겁니까?”

“…실패? 그래. 실패라면 실패겠지.”

“그게 무슨…….”

“책임감 없는 말이지만… 나도 모르겠군……. 분명 에반은 죽었을 텐데…….”

“네. 확실히 죽었지요, 교의선생.”

이 대답은 나도, 세렌도 한 게 아니었다.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늘이 까맣게 물들었다.

우우우우-.

구슬픈 울부짖음이 숲을 울렸다.

파사사삭!

바람도 불지 않는데 수풀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의식이 시작한 이후 고요했던 숲이 발광하는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그그그극-!

하늘을 가렸던 우거진 나뭇가지가 기묘하게 꺾였다. 꼭 관절이 뒤틀리는 듯 불쾌한 소리를 내며.

그리고 나는 나비의 숲에 진입한 직후, 처음으로 나뭇잎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밤하늘 대신 보인 건 배회하는 수십 마리의 악마.

날개 달린 비스트와 밴시가 섞인 채 회전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제사장이 보였다.

“…후안 교관.”

주니앙이 짓씹듯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제사장 후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주니앙. 불운한 날이었습니까?”

“최악의 날이었지. 네놈 때문에.”

“저 말입니까?”

후안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가증스러운 연기는 집어치워.”

“연기가 아니라 진짜 맘이 아프군요.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생명의 은인?”

“농담인 것 같나요, 교의선생? 정말 본인의 처세가 뛰어나서 살아남은 것이라 믿고 있는 모양이군요. 쯧쯧.”

검지를 까닥인 후안이 말했다.

“제사장을 너무 얕보시는 것 아닌가요?”

“…그게 무슨.”

“당신이 악마 사냥의 전문가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만큼은 반드시 이 수련회에 필요했지요. 이른바 마지막 조각이랄까…….”

제사장은 즐거워 보였다.

더 이상 우리를 위험분자로 여기지 않는 것인지, 독 안에 갇힌 생쥐를 대하듯 내려다봤다.

“에반 헬빈은 일반적인 교인과는 다릅니다. 평범한 교인은 봉인한 기억을 되찾을 때 매개체를 부숴야 하지만, 소교주는 죽음으로써 각성하지요.”

“…죽음.”

“그래서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암흑교단에 대해선 물론이고, 교인의 기억 봉인 수법과 그 대처법까지 알고 있는 당신이.”

주니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로 하여금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줬군요. 하하! 에반 헬빈은 최고의 소교주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그럴 수가.”

웬만한 일로는 눈도 깜박하지 않을 주니앙이 처음으로 좌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다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거악巨惡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듯했다.

“결국 네가 옳았군, 루안 배드니커.”

세렌도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여기서 ‘내가 말했잖아!’라고 얼간이처럼 소리치는 건 좀 없어 보이지만.

“…음. 내가 말했잖아.”

그래도 억울해서 한마디 안 하고는 못 배기겠다.

세렌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킥 웃었다.

“…….”

“그래. 그렇다면 나도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방법이 있어?”

“악마를 쓸어버렸던 그거, 한 번 더 쓸 거야.”

“오호.”

“집중하는 데엔 시간이 좀 걸려. 무슨 말인지 알지?”

“시간을 벌라는 거군.”

나는 습관적으로 목 관절을 꺾으며 말했다.

“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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