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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92화 (92/172)

92화

“승산은 있는 건가?”

교의선생도 우리 대화를 엿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괴감을 단시간에 극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름 마음을 다시 잡은 모양이다.

“세렌에게 비장의 수단이 있습니다. 제사장한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으니 걸어 봐야겠죠.”

“그럼 내가 전방으로 나서지. 네가 세렌을 지켜.”

“그럽시다.”

주니앙이 고개를 끄덕인 직후, 하늘을 배회하던 악마 수십 마리가 동시에 하강했다.

오오오오오오-!

숲이 떨린다.

마치 수십 명의 사신이 내 목숨을 빼앗기 위해 동시에 들이닥친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압도된 건 맞다.

그러나 겁먹지는 않았다.

보석 산맥에서도 그랬듯, 적이 아무리 많아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개체는 한정되어 있다.

쿠웅!

바위만 한 것들이 동시에 낙하한 순간, 그 충격으로 지면이 들썩거렸고.

주니앙은 시커먼 악마 무리로 망설임 없이 몸을 집어넣었다.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자진해서 몸을 던진 것.

콰지지직!

주니앙의 무기는 모닝스타였는데, 둥근 머리에 뾰족한 스파이크가 가시처럼 박힌 살벌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그런 흉악한 무기를 괴물 같은 몸뚱이로 휘둘러 대니, 주니앙의 몸은 얼마 가지 않아 악마의 피로 흠뻑 적셔졌다.

‘이크.’

후웅, 악마가 휘두른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한가롭게 구경할 때가 아니다.

나도 비스트의 공세에 백일식으로 대응했지만, 곧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악마에겐 공통점이란 게 없다고 했나?’

언젠가 철혈공이 해줬던 조언.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직접 싸워 보니 알겠다.

비스트는 덩치를 빼면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지만, 성향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놈은 본능에만 몸을 맡겼고.

어떤 놈은 음험하게 기회를 엿봤다.

여러 마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한 놈은 뱀의 꼬리로만 공격했고 한 놈은 뿔로 들이박을 생각부터 했다.

동료 악마가 죽는 걸 개의치 않고 불을 내뿜는 녀석도 있었다.

‘골치 아픈데.’

그런 상황에서 악마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세렌까지 지켜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

수단이 부족하다.

‘백일식 이외에 내게 남은 건…….’

여러 방법을 고려하고 있는 순간이다.

[검을 뽑게.]

갑자기 무신이 말했다.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만 깨어나는 양반이다.

‘제 주력은 검법이 아니라 권법인데요.’

검법에 조예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선 명백한 악수다.

그나마 익숙한 백일식을 사용하고 있어서 버티는 거지, 애초부터 검을 썼다면 진작 시체가 됐지 않았을까?

[알고 있네.]

‘그런데도 뽑으라고요?’

[그러하네. 애초에 나는 백일식을 쓰지 말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네만.]

난 살짝 머리가 둔해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 말씀은…….’

[백일식과 검법을 둘 다 쓰시게.]

터무니없는 요금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쉽지만, 무신님. 제 경지가 두 가지 무공을 동시에 전개할 만큼 고강하지는 않아요.’

각기 다른 무공을 동시에 전개하려면 분심이용分心二用의 묘리를 깨달아야 한다.

스승님께선 분심이용을 단순 훈련만으로 체득이 불가능한 수법이며, 어느 정도 타고난 본성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동시에 전개하라고 말하지 않았네.]

‘말장난하실 때가…….’

[연자여, 이것이 조언이 될지 한낱 단어의 나열이 될지는 그대의 마음가짐에 달렸어.]

‘…….’

[중요한 건 각기 다른 무술을 전환하는 속도일세. 가령 찰나조차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검법과 권법을 신속하게 전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뜻 보기에 두 가지 무술을 동시에 펼친 것처럼 보일 테지.]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이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리 빈정댔을지도 모른다.

나도 미쳤는지, 아니면 이런 상황이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무신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난 마음이 동했다면 해봐야 하는 성미의 소유자였다.

스릉!

번개처럼 칠죄검을 뽑았다.

‘…오른손엔 백일식, 왼손으로는 검술.’

왼팔로 검을 휘두르는 건 내게 익숙한 일이다.

역행 전 삶에서, 오른팔의 힘줄이 끊겼을 때 왼손잡이로서 검을 연마했으니까.

‘동시에 펼치는 게 아닌, 그렇게 느껴질 만큼 신속한 전환…….’

무신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다행히 극한의 상황에서 내 집중력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무신이 말한 [신속한 전환]이란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집중력을 나누자.’

두 무공 모두에게 동일한 집중력을 할당할 수는 없다.

비율로 치면 검술엔 7.

백일식엔 3 정도를 쓰는 게 맞다.

백일식은 내게 가장 익숙하고, 또 자신 있는 무공이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단련했으니 필요 이상으로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다음은 왼손으로 어떤 검술을 펼칠지 고민했다.

처음으로 펼친 건 용병 시절 때 자주 썼던 검법.

이름조차 없는 이 삼류 검법은, 어렸을 때 익혔던 가문의 비전 검술을 왼손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개량한 것이었는데.

사실 지금 펼치기엔 여러모로 어설픈 점이 많았다.

저급한 몬스터면 몰라도, 악마를 상대로는 많이 부족하다.

‘…….’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광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끝이었다.

돌연 출현한 진흙 괴물.

그들을 향해 덤덤히 걸어가는 한 명의 소년.

이윽고 펼쳐진 건, 오직 효율만을 추구하는 살기 가득한 검술이었다.

나는 철혈공이 시연하였던 검술을 떠올린 즉시 내 손으로 펼쳤다.

[호오…….]

이 이름 모를 검술에 가장 중요한 건 필살의 마음가짐이다.

일격, 혹은 이격으로 적을 죽이는 게 아니다.

반 호흡이다.

그 시간 동안은 몇 번이고 공격해도 되지만, 대신 반 호흡 이내로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한 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아직 살아 있는 악마가 내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광오한 검법이구만.’

검법에서 어떤 적이건 반 호흡 이내에 반드시 끝장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여러모로 지금 내 몸뚱이엔 과분한 검법이다.

이대로라면 악마를 모두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쓰러질 판.

‘이다음은?’

용병 시절의 삼류 검법을 썼고.

철혈공이 시연한 대악마용 검법도 썼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건.

‘-아.’

다음 순간 떠올린 건 잊힌 신의 제단에서 무신이 보여 줬던 무공이자 무명왕의 상징.

은하검銀河劍.

그 신위를 내가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다.

지금 내 경우가 그랬다.

아마 은하검의 묘리를 진실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감히 백일식과 함께 펼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어깨너머로 봤던 검술이라서,

그저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그 덕분에 나는 은하검을 흉내라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이한 순간을 맞이했다.

이 정도 난전이다.

모든 순간에 무공의 전환이 자연스러울 수는 없었다.

때때로 나는 검을 쥔 주먹으로 악마를 후려쳤고, 손을 날처럼 세운 채 은하검을 펼쳤다.

이 순간만큼은 왠지 모르게 검법과 권법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맨손으로도 은하검을, 검으로도 백일식을 펼칠 수 있단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검법과 권법은 무술로서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구분되는 것일까.

‘검.’

나는 칠죄검을 보았다.

검은 확실히 편하다.

기본적으로 신체보다 단단하고, 공격에 특화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사정거리도 길다.

‘육체.’

그러나 육체만의 장점이 없지는 않다.

당연하지만 고정된 형태의 검보다는 훨씬 유연하고, 대응 방식도 여러 가지다.

검과 달리 이상이 생기는 즉시 파악이 된다는 점도 있었다.

‘그렇다면…….’

백일식에 후반부 초식이란, 애초부터 필요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럼 스승님은 왜 내게 백일식은 반쪽짜리 무공이라고 말씀하신 걸까?

‘백일식만이 나의 무공이 되지 않길 바라셔서?’

이건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이 무공이 내 한계점이 될 것을 염려하신 게 아닐까?

[염화炎火 속에서 탄생하는 일추一樞라. 적천赤天을 지향하기에 부족함이 없군.]

무신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검에 입문한 걸 축하하네, 연자여.]

* * *

육체가 뜨겁다.

확실히 백일식과 은하검, 둘 다 상승의 무공이라 번갈아 가면서 펼치니 부담이 장난이 아니다.

사실을 고하자면.

그런 육체의 과부하는 어느 정도 바라던 바다.

한계 이상으로 움직이는 몸뚱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댔지만, 반대로 점차 뜨거워졌다.

염화제일공을 구사하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에서 열기밖에 느껴지지 않게 된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악기의 영향마저 잊었고…….

마침내 백화白火에 진입했다.

푸화악!

비스트 두 마리를 손날로 갈랐다.

검을 사용했을 때처럼 깔끔하지는 않아서, 이 녀석들의 상처 단면은 꼭 잡아 뜯긴 듯한 형태가 됐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일반적으로 백화 상태에 접어들면 피로나 고통 따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고양감으로 가득 차지만.

지금의 난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은 매스껍다.

악신의 저주란 백화로도 극복할 수 없는 모양이다.

우어어어어어-.

그 순간 들린 거북한 울음소리.

‘밴시?’

헥토르가 말했던 저급 악마의 울부짖음은 어느 순간 비명으로 바뀌었다.

까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귓전에 닿는 순간, 몸뚱이가 살짝 둔해졌다.

직접적인 공격보단 육체를 둔하게 만드는 건가?

촤악!

‘취소.’

그것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밴시의 길쭉한 혓바닥이 창처럼 나를 내찔렀다.

나는 그 공격을 피한 다음, 내친김에 혀를 낚아챘다.

혓바닥이 튼튼한 편인지 제법 세게 당겼는데도 찢기지 않고 밴시의 몸체가 쭉 따라왔다.

나는 밴시의 몸을 풍차처럼 돌려 주변의 비스트들을 몰아냈다.

세렌에게 영향이 가지 않게끔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았다.

‘조금만 더-.’

악마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살펴볼 여유는 없지만, 간혹 살점이 짓뭉개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주니앙도 아직 살아 있다.

사실 난 스스로에게 제법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큰소리친 것과 별개로, 내가 이 정도까지 싸울 수 있을 줄 몰랐다.

이게 실전의 중요성일까?

영산에서의 수련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곳에 쭉 틀어박혀 있었다면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 데 몇 년은 걸렸을 거다.

‘하지만…….’

내 육체는 느릿하지만, 분명히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아직 주모자인 제사장은 합류하지도 않았는데-.

“……!”

그 순간 세렌의 뒤쪽에 접근하는 악마가 포착됐다.

세렌은 이 추운 날씨에 땀이 맺힐 만큼 집중하고 있어서, 그 접근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나는 급한 대로 칠죄검을 던졌다.

푹!

검은 악마의 머리를 관통시키며 즉사시켰지만.

검의 부재는 여태껏 아슬아슬했던 전황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까아아아아악-!

악마들도 지금이 절호의 기회란 걸 깨달은 것일까?

하늘에서 기회를 엿보던 밴시 무리가 합창이라도 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육체가 둔해지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뚝하며, 일순간 아예 몸뚱이가 동작을 멈춘 것.

츠즈즛!

그리고 여태껏 관망만 하던 제사장의 손바닥에서 새까만 폭풍이 휘몰아쳤다.

나는 어금니가 부서질 듯 악물며 억지로 움직였지만, 한 발자국 늦었다.

스걱-.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고통.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허전함

철퍽.

나는 한때 내 신체였던 일부가 지면 위로 떨어진 걸 보았다.

오른팔이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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