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기절해 있던 헥토르가 일어날 때쯤 배드니커의 기사들이 등장했다.
“…이게 대체.”
가장 앞에 서 있는 건 아는 얼굴이었다.
분명 철혈기사단의 부단장이었나?
이제는 단장이 될지도 모르는 인재다.
헥토르가 그를 따로 불러 상황을 설명했다.
“제사장과 소교주, 거기에 마왕 강림이라니……. 도련님, 진담이십니까?”
“저는 보고 들은 걸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허……. 이 배드니커의 영지에서 그런 일이…….”
부단장은 쉽게 믿기 힘든 눈치였지만, 하필 얘기를 들려준 게 헥토르라서 일단은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저 태도가 혹시 연기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즉 배드니커의 역겨운 계획은 기사단의 부단장에게조차 철저히 감췄던 극비란 뜻이다.
“조금 아프실 겁니다.”
내게도 기사 한 명이 붙었는데, 이 기사가 잘린 팔을 지혈해 주며 물었다.
“혹시 잘린 팔은 어디 있습니까?”
“왜. 붙여 주게?”
말하고 나서 괜히 반말했나 싶었는데, 이 녀석은 다른 기사보다 유난히 어려 보여서 괜찮지 않을까 싶다.
기껏해야 내 또래 정도.
“상태를 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 근처에 없으면 아마 악마가 먹었을 거야.”
“…그렇군요. 유감입니다.”
그때 헥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다른 영도들은 보았습니까?”
부단장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확보한 인원은 수련회 캠프에 있습니다만, 무사한 자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따라오시지요.”
부단장의 뒤를 따라 캠프로 돌아갔다.
고작 십여 분 만에 도착한 캠프는 마치 막 끝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아파… 어, 어억…….”
“기, 길버트……? 농담이지?”
“포션이 너무 부족합니다! 소지하고 있는 분 혹시 없습니까?”
“…….”
교관 동이 있던 곳엔 부상자가 가득했고, 기사와 사용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반명 영도 동이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는데, 대부분의 시체를 그곳에 안치한 것 같았다.
그러다 부상자가 있는 쪽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샤를.”
“…아.”
샤를은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 게.”
잔뜩 갈라진 목소리.
샤를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바질은 물론이고 나중에 합류했을 에디와 신바와 제로스도 근처에 있었다.
다행히 모두 큰 부상은 없어 보였지만…….
한 명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미르는?”
아무리 조막만 한 녀석이라고 해도,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파란 머리카락을 가진 녀석이다.
이런 침침한 숲이 배경이라면 찾는 게 어렵지 않아야 하는데.
“…미르가 우리를 지켰어요.”
샤를이 여전히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샤를의 시선이 쭉 어딘가를 향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제야 미르를 찾았다.
시체가 안치된 곳에, 영도 중에서도 유난히 체격이 작은 시체가 하나 있었다.
“약자를 지키는 게… 영웅이라면서… 저를 대신해서…….”
“…….”
그 순간 뇌리를 스친 건, 내가 미르에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말이었다.
- 네가 저 녀석들을 지켜 줘.
- 약자를 지키는 게 영웅이잖아.
미르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는데, 녀석에겐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대충 지껄인 말을 지키기 위해 미르는 싸웠다.
문자 그대로 사력을 다해서.
“…저는, 영웅 실격이에요.”
샤를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정신을 차리니 전신을 감싸는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덕분에 눈을 뜨기 전부터 침상이란 걸 깨달았다.
‘…기절한 건가.’
상태가 쭉 안 좋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윽…….”
상체를 일으키는 것도 힘들다.
단순히 백화의 부작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어나셨군요.”
그러자 옆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안이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오늘로 나흘째입니다.”
“오래도 퍼질러 잤구만.”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마도 그런 말을 하려던 것 같다.
케이안은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 시선은 내 허전한 오른팔에 닿아 있었다.
“…가문에서 고위 성직자를 수배하고 있습니다. 원로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하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렇구만.”
나는 덤덤하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이 비명을 질렀지만, 일단은 움직이고 싶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케이안이 부축하려는 걸 거절하고 혼자 움직였다.
재활을 위해선 가벼운 스트레칭이라도 하는 게 좋다.
가만히 나를 보던 케이안이 입을 열었다.
“원로회에서 호출이 있었습니다만.”
“그 양반들은 또 왜.”
“글쎄요. 다만 아직 거동이 어려우시면 좀 더 쉬시지요. 제가 알아서 무마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언제 오래?”
“깨어나면 바로 기별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럼 나 일어났다고 전해 줘. 그동안 뭐라도 좀 먹고 싶은데…….”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케이안이 떠나고, 잠시 후 하녀가 푹 삶은 스튜를 가져왔다.
이상하게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허기를 채우기 위해 몇 그릇 정도 먹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케이안이 돌아왔다.
“도련님과 만나길 희망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사실 이틀 전부터 계속 본가에 머물고 있는데…….”
“누군데?”
“도즈 헬빈 경입니다.”
“…….”
나는 그게 에반의 부친의 이름이란 걸 알고 있다.
케이안이 다시 말했다.
“만나기 껄끄러우시다면-.”
“아냐. 어디 계시는데?”
“1층의 응접실입니다.”
“가자.”
나는 케이안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염병할 몸뚱이, 걷는 것도 쉽지만은 않아서 중간부턴 결국 케이안의 부축을 받아 버렸다.
“아……!”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초췌한 안색의 중년인이 보였다.
한때 기사였다고 들었지만,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엔 별도로 단련하지 않은 모양이다.
뚱뚱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몸 여기저기에 군살이 붙어 있었다.
“도즈 헬빈이라고 합니다. 루안 공자님이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그,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도즈 헬빈입니-.”
“방금 말씀하셨습니다.”
내 꼴도 내 꼴이지만, 이 사내의 모습도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잠 한숨 못 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도즈가 저렇게 된 이유, 나를 찾아온 이유까지 뻔히 알고 있는 주제에 뻔뻔스레 물었다.
“제게 무슨 용무라도 있으세요?”
“그, 그게… 수련회에서 제 아들놈과 같은 조였다고 들었습니다.”
“…….”
“혹시 에반을 못 보셨습니까?”
마왕이 사라진 직후, 에반 헬빈은 자취를 감췄다.
에반은 죽은 걸까?
아니면 소교주로서 재탄생한 걸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글쎄요.”
“그, 그렇군요…….”
그리고 잠깐 망설이더니,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에반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행방불명 상태란 것인데…….”
“…….”
“배드니커의 나비의 숲은 웬만한 영지보다도 크다고 들었으니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도즈가 필사적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혹시 공자님께서 힘을 써 주실 수 없습니까……? 아시다시피 숲엔 저 같은 외부자가 발을 들일 수 없는 장소라 수색을 위해선 배드니커의 힘이 반드시-.”
케이안이 헛기침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던 도즈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배드니커엔 제가 한번 말을 올려 보죠.”
“저, 정말입니까?”
“다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도즈가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신분의 차이만 아니었다면 내 손을 감싸 쥐었을 기세였다.
도즈와의 짧은 대면을 마친 다음엔 곧바로 원로회가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그 도중에 케이안에게 물어봤다.
“혹시 경은 에반에 대해 들은 게 있나?”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케이안이 물었다.
“에반 영도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소교주에 관해선 헥토르가 부단장에게 말했지만.
그 정체까지 발설하진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배드니커에서 에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극소수가 아닐까?
“글세……. 그나저나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또 다른 응접실입니다.”
“원로회를 만나러 간다지 않았어?”
“예. 지금 그곳에 계십니다.”
의외다.
분명 재판의 방에서 거드럭대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귀한 손님이 오셨거든요.”
“귀한 손님?”
케이안이 나를 보며 말했다.
“굿스프링입니다.”
* * *
굿스프링.
배드니커와 쌍벽을 이루는 위세를 가진 대가문.
그러나 배드니커와의 사이는 당연히 좋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굿스프링에서 과할 만큼 배드니커를 견제한다.
배드니커는 가주의 방향성 때문인지, 가문 구성원의 적대감 대부분이 암흑교단을 향한다.
굿스프링은 다르다.
전성기 때는 황실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이다.
권력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가문인지라, 근 수십 년 만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드니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굿스프링 누구?”
“산드리아 굿스프링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내 속내를 짐작했는지, 케이안이 설명했다.
“현 굿스프링가의 장로이며, 한때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강력한 정령사였습니다.”
그 정도의 거물이 배드니커에 온 이유가 뭘까.
그리고 나를 부른 이유는 또 어째서고.
나는 의문을 억누르며,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물론 이번엔 케이안은 따라오지 않았다.
“왔군, 루안 배드니커.”
“…….”
방금 도즈가 있던 응접실보다 열 배는 큰 방이었지만.
의외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딱 세 명.
우선 아게노르 배드니커.
원로회의 의장이자 철혈공이 자리를 비울 때면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대리자.
그 옆엔 평소처럼 해초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사드가 있었다.
오늘은 나른함을 넘어서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나를 보더니 손을 살짝 흔들어 주길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
백발과 금발이 반쯤 뒤섞인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 여자였다.
‘이자가 산드리아 굿스프링인가.’
세렌이 왜 가문에서 고독함을 느꼈는지 다시 한번 알겠다.
같은 핏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인상이 달랐다.
산드리아의 인상 자체는 빵집 아줌마처럼 푸근하고 친근했지만, 나는 이유 모를 거북함도 함께 느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아게노르가 산드리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당사자도 왔으니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해 봅시다.”
“그러시지요.”
산드리아가 빙긋 웃으며 얘기를 꺼냈다.
“귀가貴家의 행사에 참가했던 본 가문의 영애가 죽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이를 어떻게 변상하실 생각입니까?”
“시시한 신경전은 생략하지요, 장로. 우리에겐 세렌 굿스프링에게 직접 받았던 서약서가 있소. 수련회에서 어떤 외적 부상이 생기건, 심지어 죽더라도 배드니커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지.”
아게노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도 그대를 이 자리에 부른 이유는 하나요. 귀찮은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
“귀찮은 소란이라니요?”
“시치미 떼지 마시오. 굿스프링이 수련회에 참가했던 영도의 가문들과 모종의 만남을 가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소.”
“…….”
“아무리 서약서가 있다고 한들 다수의 가문에 굿스프링이란 구심점까지 갖춰지면 우리도 상당히 피곤해질 터. 배드니커의 적은 오직 악마와 그를 따르는 이교도뿐,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쏟고 싶진 않소.”
산드리아가 픽 웃었다.
어쩐지 웃음에서 조롱기가 느껴졌다.
“역시 배드니커. 여전히 대단하신 사명감이로군요. 하지만 아게노르 의장. 우리 한 가지는 분명히 하지요.”
“무엇을.”
“그 서명은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본가의 영애는 마왕 강림 의식에 휘말려서 죽었지요. 귀하는 그 두 죽음이 같다고 보십니까?”
“…….”
“거기에 제사장이 잠입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마왕 강림 의식을 제지하지도 못하다니……. 솔직히 말하면 의문이 생기는군요.”
“무슨 의문.”
“배드니커가 그 계획을 정말로 몰랐을까.”
그러자 아게노르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발언에 신중을 기하시오, 장로. 우리 배드니커가 교단과 작당이라도 했단 것이오?”
“그럴 리가요. 다만 악마 사냥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귀 가문이라면, 이러한 계획을 사전에 깨달았는데도 묵인했을지도 모르지요. 제사장을 죽이기 위해서요.”
“…….”
“거기다 과정은 어찌 됐건, 배드니커의 혈육만이 살아남은 것도 의아하군요.”
그 말에 아게노르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안 배드니커는 거의 죽을 뻔했소. 직접 봤으니 그대도 알 테지.”
산드리아의 시선이 내 허전한 오른쪽 소매로 향했다.
그제야 나는 아게노르가 날 이 자리에 부른 이유를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산드리아가 조금 김이 샌 듯한 얼굴로 말했다.
“…뭐, 좋습니다. 이 건은 일단 넘어가지요. 거기에 의장께선 쓸데없는 신경전을 꺼리시는 듯하니 본론을 꺼내겠습니다.”
“말씀하시오.”
“굿스프링이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1년 동안 [헤로스]에 속한 배드니커 소속원의 영웅 활동 정지.”
아게노르의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물론 저는 언제나 제정신입니다.”
아게노르의 입이 다시 열리는 순간이었다.
“받아들이지, 그래.”
아사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대신 활동 자체가 아닌, 성과 보고만 생략하는 걸로.”
“그 말씀은…….”
“배드니커가 교단 사냥을 중단할 수는 없잖아. 어차피 굿스프링의 목적은 배드니커의 성과율을 낮추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일반적으로 위대한 가문의 세력 순위는 헤로스에서의 성과 달성률을 바탕으로 매겨진다.
배드니커는 철혈공의 활약으로 아주 오랫동안 1위를 지켰지만…….
1년이나 공백이 생기면 굿스프링은 물론, 다른 가문에게도 따라잡힐지도 모른다.
그러한 뒤처짐은 곧 위대한 가문 간의 영향력 차이가 줄어드는 걸 의미하고.
그것이야말로 굿스프링이 바라던 것일 터.
예상대로 산드리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마법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양보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리고 그 꼴을 본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좌중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고, 산드리아가 물었다.
“배드니커의 젊은 도련님께선 뭐가 그리 웃기지요?”
“글쎄요……. 그보다 실례가 아니라면 굿스프링의 장로님에게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세렌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산드리아가 두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가문에선 제가 그 아이의 대모였지요. 사사롭게는 큰이모가 되는 관계였습니다.”
나는 자칭 큰이모란 자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세렌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묻지도 않으시네요. 그것 때문에 절 부른 줄 알았는데.”
나 같은 게 지껄여도 될 자리가 아니란 걸 안다.
그런데도 이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한테 용건은 없으신 듯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라도 숙이는 게 맞겠지만, 이 역겨운 노괴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지 않아서 곧장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걷는데, 얼마 안 가 누군가 내 앞을 막았다.
“한 성질 하는군.”
“…….”
아사드였다.
방금까지 방 안에 있던 걸 봤지만, 나는 딱히 놀라지도 않고 대꾸했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딱히.”
“그럼 가보겠습니다. 몸 상태가 지랄 같아서.”
“너는? 내게 따로 할 말은 없나?”
딱히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가, 불현듯 궁금한 게 떠올라서 물었다.
“가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죠?”
“본가에는 없어.”
철혈공의 소재는 극비지만, 아사드는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 말도 사실이겠지.
나는 고개를 살짝 까딱인 다음 방으로 향했는데, 뒤에서 지나가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살아남아서 다행이군. 루안.”
“…….”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한 충격이 전신을 내달렸다.
* * *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가 있는데도 굳이 바닥에 드러누워서, 거추장스러운 샹들리에가 장식된 천장을 바라봤다.
- 어쨌든, 살아남아서 다행이군.
그 말대로다.
나는 살아남았다.
스승님은 나의 죽음을 예견했지만, 나는 결국 살아남아서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성공했나?
전혀 아니다.
이제야 내 상태를 알겠다.
나는 지금 미치기 직전의 심정이었다.
제사장을 죽이기 위해 수십 명의 죽음을 묵인한 배드니커.
딸 같은 아이가 죽었는데도 이익만을 도모하는 굿스프링.
아들의 생존을 갈망하던 도즈 헬빈의 얼굴과 미르의 시체를 바라보던 샤를 루비에타의 옆모습.
겨울의 숲에 홀로 남겨진 세렌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살아남았다고?
그게 아니다.
이건 그냥 연명이다.
내 손으로 직접 삶을 쟁취한 게 아니라, 그냥 겨우 숨통만 트인 꼬락서니다.
적어도 지금의 난 무인으로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고작.”
나 자신의 한심함에 열불이 났다.
과거로 돌아오고, 전과 달라진 것인 양 으스대며,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스스로를 두들겨 패고 싶을 만큼 한심한 결과.
하지만…….
반대로,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변명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이번 수련회에서, 나는 방심하지는 않았다
긴장의 끈을 유지한 채 최선을 다해서 수련회에 임했다.
그런데도 제사장과 마왕의 벽은 높았다.
고작해야 열다섯의 루안 배드니커가 몇 개월 정도 수련한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가령 다시 같은 기회가 주어져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있을까 싶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외람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스승님의 저의조차 의심스러워졌다.
본래 스승님이 보았던 미래가 나의 죽음이었다면, 지금 이 결과는 스승님이 바라던 것이었을까?
고작 이따위 결과가?
수십 명의 영도가 죽었지만, 나는 살았고 제사장은 죽었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천하제일인 백노광은 정말 그런 생각을 했을까?
‘염병…….’
나는 기억 속에서 백노광과 재회했다.
스승님은 나를 향해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였다.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는데, 기억 속 스승님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 최선만으로 부족하단 걸 깨달았느냐.
…예.
- 반드시 이루고 싶은 열망이 생겼느냐.
그렇습니다.
나는 속으로 대답하며, 동시에 의아함과 함께 기억 속 스승님을 보았다.
기억 속…인가?
- 그렇다면, 막내야.
- 너는 오늘로써 강호江湖에 입문한 것이다.
이어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뭐?”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분명 가호식 때, 거울 너머에 있던 세상에서 들었던-.
[영산의 가호가 발동합니다.]
…그리고 눈앞의 시야가 반전했다.
주변 풍경이 수채화처럼 녹아내렸고, 눈부신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빛에 익숙해지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
시야가 확실해지기 전, 익숙한 공기가 먼저 폐부에 닿았다.
뒤이어 꾸물거리던 시야가 형체를 갖추며, 눈에 익은 장소를 만들었다.
안개로 둘러싸인 신비한 장소.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험준한 바위산의 봉우리.
그곳에 있는 허름한 처소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스승님?”
백노광이 다시 나를 부른 것일까?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순간이다.
[막내인가.]
독특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기도 했다.
“…넷째 사형?”
[드디어 왔구나.]
천하제일인 백노광의 네 번째 제자.
아랑 사형이 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