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넷째 사형은 어리둥절한 나를 데리고 스승님의 처소로 향했다.
침구조차 없는 삭막한 내부.
낡은 서랍 하나와 탁자. 두 개밖에 없는 의자는 내 기억 속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앉아라.]
넷째 사형이 특유의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권했다.
“아, 넵…….”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쉽게 질문하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넷째 사형이 가진 분위기는 굉장히 독특했기 때문이다.
사형은 등을 돌린 채 다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 구수한 냄새가 처소 내부를 채웠다.
[차는 여전히 좋아하나?]
“네, 뭐…….”
[다행이군.]
나는 사형이 내민 찻잔을 받으려 손을 내밀다 위화감을 깨달았다.
“…어?”
오른팔이 멀쩡히 돋아나 있었다.
아니, 돋아났다기보단 애초에 다친 적이 없는 것처럼 멀쩡한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으음… 아니에요.”
우선 찻잔을 받았다.
그리고 향부터 음미한 뒤 천천히 찻물을 들이켰다.
후룹.
…넷째 사형이 종종 타 주던 이름 모를 차는, 기억 속 그대로의 맛과 향을 건넸다.
사형은 차를 딱 한 잔만 준비했는데, 그 자신은 차를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례에 뛰어난 사람이 차를 안 마신다니, 아까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사형이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힐끗 넷째 사형을 보았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입술을 뚫고 나온 건 나조차도 예상 못 한 말이었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그 헬멧은 안 벗어 주는 거예요?”
천하제일인 백노광의 다섯 제자는 모두 개성이 강한 인물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개성적인 외견을 지닌 건 단언컨대 넷째 사형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합금으로 만든 듯한 헬멧은, 겉보기엔 유리처럼 반들반들한 재질로 보였지만.
실은 그보다 수십 배는 단단했고 때때로 인공적인 빛까지 점멸했다.
[항상 말하지만, 이건 투구가 아니야.]
사형이 웃음 섞인 목소리가 대꾸했다.
넷째 사형의 주장에 따르면 저 헬멧 자체가 얼굴이란다.
그러니 내 제안은 피부 가죽 아래를 보여 달라는 것과 같다고.
처음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딱 한 번, 넷째 사형의 칙칙하고 어두운 외투 아래에 있는 육체를 본 적 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형의 얼굴 부분이 헬멧이라면, 육체는 꼭 갑옷 같았다.
물론 과할 만큼 부피가 크지 않고, 대단히 콤팩트한 디자인의 갑옷 말이다.
‘기계로 된 몸이라고 했지.’
내가 아는 가장 복잡한 기계는 고작해야 시계인데, 넷째 사형의 육체는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복잡했다.
아마도 사형은 연금술사들이 창조한다는 골렘과 흡사한 인공 생명체인 듯했지만.
사실 깊게 물은 적은 없다.
어차피 우리 사형제는 각기 다른 세상에서 살았고, 과거의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성미였다.
“후우…….”
차를 한 잔 깨끗이 비우니 혼란스럽던 머리가 많이 편안해졌다.
아마 넷째 사형도 그런 의도로 내게 차를 줬을 거다.
“그래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전 방금까지-.”
[네 세상에 있었겠지.]
사형의 말에 나는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설마 제가 겪은 건 전부 환상이라든가, 뭐 그런 거였어요? 그냥 긴 꿈을 꾸었던 것뿐이고, 실상은 쭉 영산에 처박힌 채 잠을 자고 있었다든가. 그 왜, 셋째 사형 식으로 말하면-.”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네, 그거.”
[그건 아니야.]
넷째 사형이 웃으며 말했다.
[대사형에 대한 얘기는 나도 들었다. 스승님의 네게 내린 명 또한.]
넷째 사형의 목소리는 무기질적이었지만, 어쩐지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었다.
잔잔한 심정이 되게 한달까.
나는 간만에 다섯 사형제의 막내가 돼서, 투정 부리듯 말했다.
“…안 계시니까 하는 말인데, 드디어 미치신 게 아닌가 했죠.”
넷째 사형이 낮게 웃었다.
“강함으로 따지자면 둘째 사저가, 친한 걸로 치면 셋째 사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원한다면 넷째 사형이 적합했다고 봅니다.”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나도 스승님의 판단엔 동의한다.]
“네?”
[대사형에 관한 일은 네가 적임이야.]
나는 머뭇거리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제 고향에서요. 대사형의 행적을 알아봤는데 마왕 노릇을 하고 있다던데요.”
[마왕?]
“나라 하나를 멸망시켰다더라고요.”
[…….]
“솔직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 던져진 것 같기는 한데, 어느 방향으로 휩쓸리고 있는지도 분간이 안 가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회귀 이후, 나는 단기적인 목표에만 치중했다.
징수인에게서 팔의 힘줄을 지킨다거나.
보석 산맥을 벗어난다거나.
원로회의 견제를 이겨낸다거나.
넷째 사형이 말했다.
[그럼 대사형과 아직 직접 만나진 못한 거군.]
“네.”
[너도 알다시피 대사형은 함부로 살육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라 하나를 멸망시켰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둘.]
나도 그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선 알 것 같아서, 사형의 말을 받았다.
“완전히 미쳤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거나.”
넷째 사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잠깐 따라와라.]
나는 사형의 뒤를 따라서 처소를 나섰다.
넷째 사형은 벼랑 끝으로 향했는데, 나로선 꺼림칙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그러니까…….
스승님이 나를 과거로 보낸답시고 나를 집어 던졌던 그곳이었다.
“…….”
어쩐지 꺼려져서 주춤거리며 서 있으니, 넷째 사형이 재촉한다.
[좀 더 가까이 와.]
“으음…….”
나는 진짜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넷째 사형의 옆까지 가서 나란히 섰다.
그래도 넷째 사형이 나를 갑자기 집어 던지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다.
넷째 사형은 안개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경관을 보며 말했다.
[영산靈山. 우리는 이곳을 그 이름으로 부르지. 그런데 루안, 넌 이 세상이 정확히 어떤 장소인지 알고 있나?]
“글쎄요…….”
내가 영산에 대해 아는 걸 말하라면…….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바위산.
사시사철 사라지지 않는 안개.
산봉우리를 제외한 영역엔 온갖 사악한 요괴가 들끓으며.
마지막으로, 천하제일인 백노광의 거처 정도가 되겠다.
내가 아는 개념을 찬찬히 설명하니, 넷째 사형이 말했다.
[네가 말한 건 어디까지나 이 장소의 겉면뿐이다. 본질적으로 영산은 스승님의 퍼스널 스페이스지.]
“퍼스… 뭐요?
[쉽게 말하면 스승님이 직접 창조한, 스승님의 천하天下라는 뜻이다.]
“…….”
이런 황당무계한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스승님- 천하제일인 백노광이 대단한 사람이란 건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하나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건 그냥 신 아닌가요?”
[네가 생각하는 신의 전제가 창세創世라면, 그렇게 칭해도 되겠지.]
“…….”
[영산은 일반적인 우주의 시공간 영역- 그 외곽에 위치한 장소다. 그러니 나는 이곳을 ‘시간의 휴게소’라고 부르기도 하지.]
“말씀이 또 너무 어려워지는데요…….”
희한한 단어를 자주 입에 담는 건 넷째 사형의 말버릇이었으나.
오늘은 특히 더 아리송했다.
[간단히 설명하지. 너는 스승님의 인도에 따라 영산으로 왔고 10년의 수련을 거친 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넌 기존의 시간대로 복귀했나?]
“음… 아뇨.”
원래 세상에서 난 25살이란 나이에 죽었지만, 영산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귀환했을 땐 열다섯 무렵이었다.
기존 세상에서의 10년과 영산에서의 10년.
체감 시간으로만 치면 20년이란 시간을 회귀回歸한 셈이다.
[이곳에 입산한 자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크건, 작건 후회하지 않은 자들은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어.]
“으음…….”
[지금도 마찬가지다. 네가 품었던 후회가 너를 다시금 영산으로 부른 거지. 그리고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막내가 다시 이곳에 올 때쯤엔, 무인의 마지막 요소를 비로소 갖췄을 것이라고.]
“무인의 마지막 요소요?”
[필사적인 마음가짐.]
넷째 사형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한 마음가짐만큼은 타고난 천성과 황금 같은 조언, 뼈를 깎는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다.]
“그럼 무엇이 필요합니까?”
[사건이지.]
“…….”
[가슴속에 불을 지필 만한 사건만이 필사적인 마음가짐을 형성한다. 나는 그것을 무인으로서의 시작점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순간, 스승님의 흐릿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 너는 오늘로써 강호江湖에 입문한 것이다.
[네겐 재능이 있다. 의지가 있고, 독기까지 갖췄지. 하지만 뚜렷하고 확실한 목표만큼은 없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으셨겠지만, 스승님은 늘 그게 마음에 걸렸을 거야.]
나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가짐은 분명히 생겼습니다. 사형 말대로 최선으로도 부족하다면 필사의 각오로 매달려야겠지요.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오기 직전, 내가 겪었던 일을 떠올린다.
수십 명의 영도가 죽었고.
에반은 소교주가 됐으며.
그 사달을 일으킨 제사장이란 작자는 이미 죽었다.
그 모든 사건을 겪고, 나는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갈 길 없는 분노였다.
소교주 에반을 죽이면 이 감정이 해소될까?
만약 그래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다음은 마왕이라도 죽여야 하나.
[잘 모르겠다니.]
“이미 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해냈어야 할 일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분노란 감정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이 감정을 제 연료로 삼는다면 전 단순한 복수귀가 될 겁니다.”
한동안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아까 내가 해줬던 말을 벌써 잊은 모양이구나.]
“네?”
[루안, 떠올려라. 영산에서의 수련이 끝나고 스승님이 널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냈을 때, 너는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갔나?]
“그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전쟁에 휩쓸려 죽기 직전인 25살의 루안 배드니커가 아닌,
징수인 케이안에게 힘줄이 끊기기 직전인 15살의 루안 배드니커로서 회귀했다.
아니, 잠깐만.
“그럼 설마…….”
[100일.]
넷째 사형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슴을 후려쳤다.
[이번에 네가 영산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다. 너는 그 기간 동안 이곳에서 수련을 마치고, 다시 너의 천하로 돌아갈 것이다. 이번에도 재차 시간을 거슬러서.]
나는 이 순간에서야 영산의 가호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네겐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거야.]
이건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가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