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어찌 됐건 마침내 하루 일과가 정해졌다.
까아아아아악-.
괴조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쯤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우선은 달린다.
전력으로 달린다.
꼼짝할 힘도 남지 않을 만큼 전력으로 질주한 다음, 한계에 다다르면 그 자리에 엎어지듯 주저앉는다.
이어서 곧장 운공을 시작한다.
물론 단순히 운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좀 더 효과적으로 육체 회복에 강점이 생길지 구결을 계속 수정한다.
“우웩!”
오늘도 핏물을 뱉었다.
여태껏 뱉어낸 핏물을 다 합하면 얼마나 될까, 하는 쓸데없는 의문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맥주통 하나는 우습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핏물을 대충 닦았다.
몸은 회복돼도 옷은 자동으로 세척되지 않는다.
즉 핏물을 뱉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했고, 지금의 나는 옷에 피 한 방울 튀지 않게 각혈할 수 있다, 이 말씀.
[FAD의 한 줄 평: 정.말.대.단.해.]
“…….”
나는 손상된 육체가 회복되길 기다리며, 백일식 후반부에 대한 망상도 맘껏 펼쳤다.
내 가상의 대적 상대는 주로 검은 늪의 마왕이 됐는데, 이 괴물 같은 존재는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압도했다.
그래도 극복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자주 곱씹을수록 그놈의 기백에 적응하는 것이 될 테니, 큰 틀에서 보면 이것도 나름 훈련이었다.
마왕의 권능.
단숨에 상대를 짓이기는 힘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까?
‘속도를 극대화한 염염질주? 아니면 불꽃으로 상대의 시야를 속이거나…….’
…육체가 회복을 마쳤을 때쯤엔 망상을 마치고, 다시 질주했다. 그러다 힘이 다해 주저앉고, 운공, 구결의 수정, 다시 망상.
…….
…….
[현재 진행도: 23.3%.]
…….
…….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반복 작업을,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행하는 것.
흔히들 그것을 수련修練, 혹은 단련鍛鍊이라고 부른다.
[현재 진행도: 25.9%.]
…….
…….
세기도 힘들 만큼 익숙한 행위를 반복하고, 이제는 자다가도 줄줄 읊을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걸 재차 되새기고.
이러한 과정이 지루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즐길 수 있는 극소수의 괴짜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적응력이란 무섭도록 빠르다.
바꿔 말하면, 이미 경험한 것엔 쉽게 무감각해지며 흥미를 잃게 된다.
이러한 증상이 심해지면 수련 자체가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현재 진행도: 27.1%.]
…나는,
딱히 수련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단 그게 올바른 수련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 한해서다.
[현재 진행도: 33.2%.]
-50일.
기간의 절반이 지났을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잘 해내고 있는 걸까?
물론 육체는 꾸준히 강해지고 있다. 이제 한 시간을 뛰어도 거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생각했다.
실은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이 방법이 틀린 거라면, 잘못된 방향인 걸 모르고 등신처럼 걸어가고 있는 거라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 쓰레기 같은 놈.
안개 사이로 스승님의 모습이 보였다.
“…….”
물론 나는 저게 헛것인 걸 알고 있었다.
- 감히 네가 내 무공에 손을 댈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금방이라도 사라질 허깨비 같은 모습이었고, 애초에 스승님은 저런 말씀을 하지 않는다.
내가 등신 같은 짓거리를 할 땐 일단 머리통부터 후려치고 보셨다.
그러니 이것도 영산이 주는 시련 중 하나가 아닐까?
아니면 내가 드디어 미쳐 버렸거나.
- 너를 제자로 거두는 게 아니었다.
“…….”
가슴 깊숙한 곳에서 한숨이 나왔다.
환각이란 걸 알면서도 백노광의 얼굴, 백노광의 목소리로 저런 말을 들으니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엔 가뜩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깊어지고 있는 도중이었다.
나는 비관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장소에 수십 일을 혼자 처박혀 있다 보니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문득 일문의 대종사란 자들이 존경스러워졌다.
그건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다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누구도 간 적 없는 길을 걷는다는 건 어지간한 자신감,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 순간 나 자신을 의심하고, 과거에 후회하며, 좀 더 나은 선택이 있지 않았을까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런 고민을 이어 갈 수도 없었다.
나는 방황하면서도 스스로를 닦달하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기 위해 애썼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환각이 증식했다.
아니. 환청인가?
이번엔 넷째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여기서 포기해도 된다만.]
…환청이 아닌가?
이 목소리는 FAD에서 들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뻗은 채로 눈동자만 굴렸다.
“호출한 기억은 없는데요.”
[알아. 그래서 이렇게 FAD를 통해 말을 걸고 있는 거잖아.]
“…….”
[오늘로써 이제 70일이 흘렀다.]
시간 참 더럽게 빠르구나.
50일부터는 세지 않아서 몰랐다.
[그리고 이게 지금 네 모습이다.]
그 순간 FAD의 화면이 바뀌더니,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한심하고 추레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열다섯의 철없는 루안 배드니커가 아닌, 전쟁에 휘말려 한심한 죽음을 맞이한 스물다섯의 루안으로 보였다.
“진행도는요?”
[35퍼센트.]
“반도 못 왔군요.”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넷째 사형은 재차 달리는 내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아직 계속 가려고?]
“네.”
[남은 30일 안에 하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솔직히 확률은 희박한 듯한데…….”
나는 말을 멈췄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걸 단어로 꺼내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뭔가 잡힐 것 같아서.”
결국 애매모호하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갯속을 거닐며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사형. 뜬금없는 소린데, 문득 종사란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졌습니다.”
[왜.]
“그 양반들은 평생을 이런 기분 속에서 살았지 않았겠습니까? 안갯속을 방황하며, 끝이 보이지도 않는 레이스를 홀로 달리는 기분이요.”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낄낄 웃었다.
“종사의 길이란 사무치게 외롭군요.”
[…….]
무언가를 얻어도 그게 올바른 성과인지, 실수의 부산물인지 당장은 알 수 없다.
만약 모든 걸 홀로 선택해야 한다면 그건 완전한 자유가 아닌 고통의 연속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얼마 전부터 떠올렸던 생각을, 동문의 사형제에게 물어보았다.
“스승님도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요?”
천하제일인 백노광을 떠올렸다.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광오하고, 오만하고,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나의 스승.
그분의 삶에도 이런 굴곡이 있었을까?
만약 있었다면, 스승님은 어떻게 극복하신 걸까.
“…혹 스승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면, 저 같은 놈이 개인의 무학을 추구하는 건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뭐가 무섭지?]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는 거요.”
첫 번째 삶에서 경험했다.
나는 가문에 기대받았고, 나조차 자신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고, 처참했다.
실패엔 더없이 익숙하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혹시 제가 스승님의 오점이 되지 않을까… 그게 가장 두렵습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는 건, 익숙지 않다.
두려웠다.
다른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노광에게만큼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루안 배드니커란 놈에게 얼마만큼의 기대를 걸고 있을까.
다른 사형제와 나를 비교하지는 않을까.
나라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엔, 항상 이런 저급하고 열등한 생각이 숨어 있었다.
그때였다.
[나의 본명은 RAN-4700 Type-A이다.]
사형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네? 아, 네. FAD에게 들었어요.”
내가 굼뜬 반응을 보이든 말든, 사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4세대 안드로이드이며, 본래 용도는 군용 병기였지.]
“갑자기 무슨 말씀을…….”
[내 첫 번째 주인은 군인이었다. 전장에서 팔 한쪽을 잘린 다음 은퇴했어.]
이건… 넷째 사형의 과거 이야기일까?
생전 처음 듣는 것 같다.
나는 주인이란 말에 조심스레 물었다.
“노예셨습니까?”
스승님처럼, 이라는 말은 생략하고.
[비슷한 위치였지. 그러나 내 주인은 나를 노예처럼 대하지 않았다. 은퇴 이후에도 전장에 다시 복귀하기 위해, 나를 상대로 무술을 연마했어.]
넷째 사형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어쩐지 사형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인은 낙승을 즐기지 않았다.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하고 많은 데이터가 입력됐고, 패배한 대련을 밤새도록 복기하며 새로운 패턴을 창출했다. 그래도 이기지 못했지. 팔 하나가 없어도, 주인은 무술의 달인이었으니까.]
“…….”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떠올린 두 개의 움직임을 합한 다음 새로운 동작으로 공격했는데, 주인이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했지. 주인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 말하더라.]
“뭐라고요.”
[무인武人이라고.]
“…….”
[아마도 나는 그 순간 비로소 태어났을 거야.]
사형의 말 모두가 이해 가는 건 아니었다.
그가 살던 세상은 아마 내가 살던 세상과 크게 다른 곳일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일 거다.
그리고 감정이란 원래 이해하는 게 아닌 받아들이는 것이고 말이다.
나는 사형의 말을 감정으로써 받아들였다.
[보아라, 루안. 내겐 심장이 없다. 근육이 없다. 혈액이 없다. 단전이 없으니 내공을 쌓지 못하고, 근육이 없으니 육체 단련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를 추구할 수 없는 건가? 내가 무학을 입에 담는 건 그 자체만으로 용서받지 못할 행위인가?]
“…….”
[태어난 그 순간부터 쭉 고민했지. 오랫동안 해답을 내리지 못했다. 무武를 추구하는 기계라니, 어느 데이터베이스에도 그에 대한 해답은 없었으니까.]
그러다 화면 너머에 있는 사형이 빙그레 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스승님을 만났다. 스승님이 말씀하시더군. 그렇다면 그딴 것에 얽매이지 않는 무학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푸핫.”
넷째 사형은 성대모사를 하지 않았지만.
나는 눈앞에서 실제로 스승님이 그리 말하는 게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종사의 자질에 관해선 나도 건넬 말이 없다. 하지만 개인의 무학을 추구할 권리라면 누구에게나 있어. 한낱 나무조차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뿌리를 단단히 내릴 줄 안다. 내 해석으로, 나무는 강인함의 무학을 가진 셈이지.]
“강인함의 무학…….”
[내게 무학이란 거창하지 않아. 강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힘은 상대적이고, 싸움은 변수투성이니까.]
사형이 내게 물었다.
[루안, 네 무학은 뭐냐?]
“…….”
어쩌면 나라는 무인을 정의하는 대답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부담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형의 말이 맞다.
무학이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제 무학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나아가는 것입니다.”
확 드러나지 않아도 좋다.
반드시 육체가 강해지거나, 내공이 깊어지거나, 현묘한 초식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깨달음에서 이어지는 정신의 성장 또한 내게 있어선 큰 전진이었다.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사형.”
나는 오늘도, 한 발자국 나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