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00화 (100/172)

100화

나는 지금 당장의 상황을 모조리 잊기로 했다.

하산의 진행도, 남은 시간, 기껏 열심히 짜놓은 일과까지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운다.

애초에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고려하는 건 나와 맞지 않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우선순위를 매긴 뒤 눈앞의 장애물을 하나씩 해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걸맞은 방식이다.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건 구결의 수정 작업이었다.

여태까지처럼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게 아니다.

끝을 보기 전까지 이것에만 몰두할 생각이다.

그러다 시간을 초과한다면… 별수 없는 일이 아닐까.

어차피 백날 육체를 단련해 봤자 지금 속도로 땅바닥을 밟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오만했던 것일 수도 있고.’

몸을 미친 듯이 혹사하고, 육체가 회복하는 시간을 이용해 수정 작업을 하겠다…….

효율적인 측면에선 훌륭한 작전일지 모르지만, 글쎄.

지금 생각하면 무려 백노광의 무공을 수정하는 일인데 그딴 알량한 각오로 가능할 리가 없다.

“후우…….”

초심이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다.

실행에 앞서, 우선 나는 여태껏 열심히 수정했던 구결을 완전히 잊고…….

본래 구결대로 운공을 시작했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염화제일공을 배운 사람처럼 말이다.

“…….”

수정했던 구결을 모두 잊었다고 해서 그 시간이 쓸모없게 된 건 아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염화제일공에 몰두하며, 나는 이 심법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됐다.

그 덕으로, 본래의 구결을 다시금 외웠을 뿐인데도 이 무공의 대단함을 보다 확실히 알겠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경로, 분기점, 순환하는 내공의 총량과 그 분배, 심지어 갈래로 뻗어 나가는 희미한 루트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렇구나.’

여태껏 나는 이 무공을 암기로만 이해했던 거구나.

감탄이나 놀라움보다 신기함이 앞섰다.

이런 경로였기 때문에 그런 식의 작용이 가능했구나 싶기도 하고.

“후우우…….”

마침내 운공이 끝났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화제일공의 주천周天을 수행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런 대단한 무공을 내 손으로 훼손해도 될까.’

이미 완벽한 작품이라면 더하는 것도, 빼는 것도 흠이 될 터다.

하지만…….

“…….”

나는 과감하게 다시금 구결을 수정했다.

하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최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구결을 수정하는 방향이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고,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나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한 발자국씩.”

저 멀리 있는 놈들은 내가 걷고 있단 사실을 깨닫지 못할 거다. 어쩌면 보이지도 않겠지.

그래도 나만큼은 분명히 보고 있다. 알고 있다.

앞을 향해 한 발자국씩,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금은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 * *

모든 깨달음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까아아아아악-.

문득 이름 모를 괴조의 울부짖음이 귓전에 닿았을 때,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그러다 문득 쭉 내 옆에 붙어 있던 녀석의 존재를 오랜만에 깨달았다.

“…FAD.”

[네.]

“오늘이 며칠째지?”

[하산을 시작하고 90일이 경과했습니다.]

나는 내 생각보단 시간이 적게 흘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틀림없이 진작 100일이 지났을 거라 예상했는데.

[현재 진행도: 33.2%.]

FAD의 화면엔 여전히 진행도가 나타나 있었지만, 내 마음은 차분했다.

조급함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일단은 꾹 참았다.

중대한 문제이니만큼 마지막 확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즉시 가부좌를 틀었고-.

운공을 시작했다.

화륵…….

단전에서 치솟은 불길- 이라는 느낌의 진기를 다루며, 그 불길의 경로를 내가 정한다.

십이경맥十二經脈은 물론이고 기경팔맥奇經八脈에 번지는 사소한 불길의 이탈도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새로 만든 구결의 핵심은 백회百會를 통과하는 게 아니다.

염화제일공의 회복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이 열기를 전신으로 고루 퍼뜨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수많은 신체 기관에서,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건 하나.

오로지 심장뿐이다.

두근!

심박이 작은 폭발처럼 느껴졌다.

이 폭발은 곧 불길이 돼서, 전신에 빈틈없이 펼쳐졌다.

펼쳐진다기보다… 확장이 되는 느낌이다.

인체라면 어쩔 수 없이 감각이 둔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엉덩이는 고통에 둔감한 편이고, 당연히 손가락보단 발가락을 움직이는 게 어렵다.

제아무리 감각이 예리한 사람이라고 해도, 의지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근육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이 운공을 통해 그런 제약에서 해방됐다.

지금의 나라면 손가락 까닥 안 하고 근육을 찢을 수 있고.

고의적으로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거나, 심지어 멈추는 것도 가능할 거다.

쿠르르르…….

그 순간 나는 몸속에 있던 어떤 거대한 둑이 무너지는 걸 깨달았다.

“하아아아…….”

둑이 무너진 순간, 나는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호흡이 편하다.

평생 기도가 절반 정도 막혀 있다가, 이 순간에서야 마침내 뚫린 듯한 느낌이다.

눈을 뜨니 평소보다 안개가 훨씬 뚜렷하게 보였고, 공기의 맛까지 느껴졌다.

최소 세 배는 확장된 기감.

여전히 체내의 내공은 쥐꼬리만 했지만, 지금의 나라면 이걸 누구보다 잘 운용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내 경지가 나아갔음을,

그리고 염화제일공이 마침내 2단계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모든 심법이 그렇듯 염화제일공에도 단계가 나뉘어 있지만, 다른 심법처럼 그 경계가 뚜렷하지는 않다.

스승님은 이것이 총 5단계까지 있다고 말씀하셨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한 단계씩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셨다.

“단순히 내공만 늘린다고 될 게 아니었군.”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구결을 수정해야 한다니.

세상에 이런 미친 무공이 또 있을까 싶지만, 그 무공의 창안자가 천하제일인 백노광이라면 또 납득 간다.

‘애초부터 이걸 노리셨던 걸 수도.’

문득 케이안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육체가 허약하고, 내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쩔쩔맸다.

지금이라면 좀 다를 것이다.

상황은 여전히 열세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내공과 외공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지 멀쩡한 육체란 그 자체만으로 축복이다.

저벅.

나는 안갯길을 걸었다.

영산이 가하는 제약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압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현시점에서 이 정도라면, 아예 영산을 떠나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을 때 내 신체 능력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음. 설레발 자제.’

나는 고개를 털었다.

[우선은… 축하한다고 말해야 할까.]

그때 FAD에서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전이 있을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설마 고금제일공의 2단계에 진입할 줄은 몰랐다. 극히 희박한 확률이었을 텐데.]

“그래요?”

사형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이라면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하산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려울까요?”

[그래.]

나는 사형의 말, 그리고 여태까지의 태도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끼며 물었다.

“혹시 사형은 시작하기 전부터 제가 실패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일단 질문의 형태였지만, 나는 반쯤 확신을 가진 채 물은 것이었다.

[그래.]

사형은 순순히 수긍했다.

[너를 무시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야. 영산의 진짜 시련은 시작하지도 않았어.]

역시 이다음에도 뭐가 있나 보다.

[과거의 개변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나는 이쯤에서 포기를 권하고 싶다.]

“음.”

나는 애매한 태도로 터벅터벅, 벼랑길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또 편법을 쓸 생각이냐? 아쉽지만, 그 방법까지 고려한 계산 결과였다.]

편법이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에 뛰어내릴 때부터 계속 떠올렸던 방법이 있어요. 도무지 실행에 옮길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뭐지?]

나는 사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줬다.

허공에 한 발자국을 내디딘 것.

물론 내 경지가 허공답보虛空踏步까지 이른 건 아니다.

내 몸뚱이는 중력에 의해 즉시 아래로 낙하했다.

허공을 밟지는 못해도,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 경사라면 충분히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콰가가가가각!

‘이거, 생각보다, 더 짜릿한데……!’

지금 내가 내달리고 있는 건지, 단순히 굴러떨어지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쭉쭉 나아가는 다리는 반쯤 제어를 벗어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상태로 시선만큼은 분명하게 앞을 보았다.

‘엿 같은 안개 때문에 잘 안 보이긴 하는데.’

어쨌든 이 상태로 산의 밑바닥까지 쭉 달릴 생각은 없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 줄 알고 그딴 미친 짓을 한단 말인가.

[루안, 위험해.]

사형이 평소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여전히 내달리면서 외쳤다.

“왜요! 이렇게 달려도 시간에 못 맞춥니까!”

[아니. 모든 거리에서 가장 짧은 경로는 직선이니까, 이론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이 길은 위험해.]

“영산은 원래 위험해요!”

[그 말이 아니야. 애초에 아무리 네 신체 능력이 향상됐어도 단 한 번도 안 쉬고 땅까지 내달리는 건 불가능해. 그 전에 분명 기력이 다할 거다.]

그렇겠지.

하지만 중간에 휴식을 취할 방법은 이미 생각해 뒀다.

나는 한참을 달리다, 체력이 좀 떨어졌다 싶을 때쯤 발걸음에 힘을 억세게 줬다.

꽝! 꽝! 꽝!

그렇게 열 걸음 정도 걸었을 때, 내 다리는 산의 표면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박혔다.

종아리 아래가 지면에 파고든 듯한 꼴이 된 거다.

“후우우…….”

나는 그 상태로 어설프게 엉덩이를 붙이고, 등을 기댔다.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됐지만, 뭐 어때.

그럭저럭 쉴 만하니까 만족한다.

“이렇게 하면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어요. 저 좀 천잰 듯.”

내 꼴을 본 사형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스승님의 제자답구나.]

어쩐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0